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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 김소희. 고창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에 한 번 본 판소리에 불가항력으로 빠져들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명창의 반열에 올라 선 천재 소리꾼.
 만정 김소희. 고창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에 한 번 본 판소리에 불가항력으로 빠져들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명창의 반열에 올라 선 천재 소리꾼.
ⓒ 고창판소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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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
 고창읍성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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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 장어집들이 선운사 가는 길을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고창 읍내에는 고창읍성, 신재효 생가, 판소리 박물관이 한 데 모여 있어서 '소리'로 꽉 찬 느낌을 준다. 언젠가는 고창읍성을 걷는 내내 만정 김소희의 판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고창에서 태어난 천재 소리꾼, 그니의 목소리를 하늘이 거두어간 지 10년도 넘었다. 

성 밖에 사는 아낙들이 윤달에 옷을 차려 입고서 성 밟기를 했다는 읍성을 걸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성을 쌓을 때 일부러 내놓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좁은 틈으로 보는 바깥은 뚜렷했다. 적이 들어와 성을 파괴해버렸던 정유재란, 그 때 왜구와 맞섰던 사람들의 기개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헤아려봤다.

어른 손 두 개를 합쳐야 한 그루를 감쌀 수 있는 읍성의 대나무 숲은 '되바라져'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 경험도 많아서 알아준다는 것의 기쁨도 안다. 입도 싸져서 비밀을 품어주지 않는다. 나무에 새겨 놓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바람·전화번호를 그대로 노출시켜 버린다. 우리 세상살이와 닮아 보였다.

읍성의 대나무숲.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해 봐서 알아봐 준다는 것의 기쁨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읍성의 대나무숲.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해 봐서 알아봐 준다는 것의 기쁨을 알고 있는 듯 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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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을 나와 사랑채만 있는 동리 신재효의 집으로 갔다. 열어놓은 방에서는 떠꺼머리를 한 인형들이 앉아서 스승의 소리를 따라했다. 누군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다는 것은 숭고하다. 1860년대부터 판소리의 체계를 잡은 신재효는 제자들의 먹고 사는 걱정일랑 붙들어 매주고서 소리에 빠지도록 도왔다. 편견을 깨고 최초로 여자 명창 진채선도 탄생시켰다.

판소리는 무가(巫歌)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양반들은 천한 백성들의 놀이판을 그네들의 술자리에 '스카우트' 했다. 과거에 합격해서 문희연을 열 때도 광대(남자무당)는 소리를 했다. 광대는 줄을 타면서도 소리를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리는 슬퍼진다. 김연수의 <춘향전>에서는 한 번만 하던 이별도 두 번으로 늘려서 애간장을 녹인다.

무가에서 시작해서 양반들의 세계로 세계로 '스카우트' 된 판소리
 무가에서 시작해서 양반들의 세계로 세계로 '스카우트' 된 판소리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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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판소리박물관에서는 득음하는 과정도 보고, 직접 판소리에 맞추어서 북도 치고, 판소리 여섯 마당 모두를 들어볼 수도 있다.
 고창판소리박물관에서는 득음하는 과정도 보고, 직접 판소리에 맞추어서 북도 치고, 판소리 여섯 마당 모두를 들어볼 수도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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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는 입으로만 전해지던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젹벽가, 변강쇠가를 정리했다. 그를 거쳐 다시 태어난 판소리 여섯 마당은 신재효의 옆집 격인 판소리 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판소리에 맞춰 북을 쳐 보고, 깊은 산속에서 백일 동안 처절하게 소리 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득음한 소리가 폭포수 소리를 뚫는 과정을 거쳐서인지 판소리와 조금 친해보였다.  

신재효는 대곡인 판소리 말고도 단가나 잡가도 정리했다. 더듬어보면, 내가 어릴 때 들어본 소리는 날 것의 잡가였다. 굿판의 소리라 사연에 따라 달라졌다. 동네 저수지 수문 관리를 하던 동네 삼촌이 죽었을 때에 당골네는 갓 태어난 아기와 새색시를 두고 떠나야 하는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애원하고 구르며 소리를 했다. 저수지에다가 삼촌이 신던 고무신을 띄웠는데 해질녘에야 머리카락 한 올이 담겨진 채로 제자리로 왔다.

진짜 판소리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정면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금요일 밤마다 열린다는 '해설이 있는 판소리' 공연을 보기 위해 전주 전통문화센터에 갔다. 사랑방처럼 신발을 벗고서 바닥에 앉았다. 어렵게 느껴지는 판소리 내용을 먼저 쉬운 말로 들었다. 소리꾼이  서는 무대 옆에는 영화를 볼 때처럼 한글과 영어 자막이 있었다.

전주 전통문화센터
 전주 전통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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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관광객들도 왔는데 아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판소리 공연을 보는데 남의 나라 음악을 알기 위해 온 그네들의 존재는 감동이었다. 나는 저녁 때 그네들이 주고받는 말로 인사했다.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아줌마처럼 웃는 자세가 되어 있고, 자세는 다소곳한 이가 물었다.

"저기요, 도련님이 뭐예요?"
"(허걱, 기절한 척 할까?) 남자… 결혼을 안 한."
"아! 그래요? 고마워요."

때 맞춰 시작한 공연이 나를 살렸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남원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장면이었다. 옛날에 이별은 보통 사람의 세계에는 없고, 관리와 기생 사이에서만 있었다고 한다. 춘향과 이도령은 내리 사흘째 이별을 하는 참이었다. 춘향네 집에서도 밤새 서로를 괴롭히며 이별했으면서도 그 둘에게는 여전히 표현과 눈물이 남아돌았다. 무서운 10대의 체력이었다.

"<진양조>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숲을 울며불며 나가는디, 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씻치면서 농림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우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거!"

"<중모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어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천연히 집에 앉어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으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 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요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으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노라."

나는 소리꾼의 소리에 맞춰서 바뀌는 자막을 보았다. 진양조, 자진모리, 중모리, 아니리, 휘모리로 바뀔 때마다 소리의 느낌이 달랐다. 어떤 장면은 슬프고, 때로는 활달하고, 판소리는 맞는데 마치 나이 든 사람이 따라하는 랩 같은 구석도 있었다. 몸이 약간 떨렸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 몇은 고수가 넣는 추임새를 따라 하기도 했다.

<해설이 있는 판소리> 공연이 끝난 뒤, 소리꾼 조준희님.
 <해설이 있는 판소리> 공연이 끝난 뒤, 소리꾼 조준희님.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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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은 판소리 이전에 백제 향가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리에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고창과 이웃한, 영광에서 자란 나는 그런 소리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는 상여집이 있었고, 상이 날 때마다 곡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구슬펐는지, 동네 아이들은 놀다가도 상여 뒤를 따르면서 울었다.

소리는 대단했다. 즉흥적이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발표력이 없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도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곡을 지나치게 잘 해서 듣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바로 내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일이 잘못 되거나 식구들끼리 불화를 겪을 때에 "오메 오메 살아도 나는 못 살아"라고 곡소리를 했다.

지금부터 몇 십만 년 전의 사람들도 장례를 치를 때에는 사람과 꽃을 함께 묻었다. 꽃이 있다면, 말도 오갔을 것이다. 말은 흐느낌이 되고, 서로를 붙들고 울다가 곡이 되었을 거다. 3000여 년 전, 고창 고인돌에 사람을 묻던 사람들이 장례식을 무성영화처럼 했을 리 없다. 새로운 고인돌 무덤이 생길 때마다 곡소리도 더욱 애달파 졌겠지.

세계문화유산인 고창 고인돌. 새로운 고인돌이 생겨날 때마다 애닯은 곡소리도 늘어갔겠지 싶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창 고인돌. 새로운 고인돌이 생겨날 때마다 애닯은 곡소리도 늘어갔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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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체험장에서 아이들, 어릴 때는 저렇게 놀다가도 상여 나가는 곡소리를 들으면 놀다가도 울면서 상여를 따라갔다.
 고인돌 체험장에서 아이들, 어릴 때는 저렇게 놀다가도 상여 나가는 곡소리를 들으면 놀다가도 울면서 상여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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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이면서 부안에 더 가까운 만정 김소희 생가를 찾았다. 김소희는 열세 살 때 판소리를 딱 한 번 보고는 이끌렸다. 식구들이 말려도 소용없는 불가항력이었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천재였다. 그러나 깨끗한 감성을 유지하면서 제자들을 길렀고, 소리를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생가는 옛날 모습대로 지으려고 애썼다. 바람벽도 진흙과 지푸라기를 짓이겨서 만들었다. 토방에 앉아보니 햇볕이 잘 들고 포근했다. 이런 집은 새들도 좋아한다. 새 똥 흔적이 있는데 누군가는 새가 집 짓지 못하게 탱자가시를 올려놓았다. 사람이 살지 않고, 감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사람이 없어서 집은 '후질러지는' 속도가 빠를 게 분명하다. 

나는 친구 길림과 둘이서 어린 김소희가 먹고 자랐을 지도 모르는 감을 먹었다. 감을 토방에 올려놓고 합장을 했다. 이미 나이를 먹어버린 우리가 천재가 될 수는 없어도 가을이면 감 먹으러 오자고 했다. 그 때쯤, 왜 남의 집에 함부로 와서 감을 주워 먹느냐고 혼내는 사람이 있고, 그 이가 토방에 앉아서 김소희의 판소리 한 대목씩 듣고 가라고 붙들면 좋겠다.

만정 김소희 생가. 옛집처럼 진흙과 지푸라기를 짓이겨서 바람벽을 세웠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아서 금방 후질러질 것 같다.
 만정 김소희 생가. 옛집처럼 진흙과 지푸라기를 짓이겨서 바람벽을 세웠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아서 금방 후질러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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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을여행,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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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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