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종무를 의주로 급파한 태종은 전위 주문사를 꾸리라고 명했다. 명나라의 추궁이 있기 전에 세종의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빨리 알려 고명을 받아 오라는 것이다.

“안원군(安原君) 한장수를 정사로, 공조참판 이적을 부사로 하여 사은사를 보내고 김여지를 청승습주문사(請承襲奏聞使)로 삼을까 합니다.”

세종이 태종에게 명나라 사신 명단을 보고했다.

“사은사는 반드시 친척을 보내야 한다. 한장수가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심온만 못하고 또한 심온이 평소에 황엄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이니 심온이 간다면 황엄은 반드시 정성을 다할 것이다.”

명나라에 파견할 사은사와 주문사가 결정되었다. 황엄은 비록 환관이지만 명나라 조정의 내사다. 국내에 들어오면 총독처럼 군림했지만 조선의 유일한 대명(對明) 창구다. 여자 좋아하고 뇌물 좋아하는 황엄과 심온이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제격이라는 것이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다. 사위가 등극했으니 국구(國舅)다. 국구 파견은 명나라에 대한 최상의 예우이며 환상의 선택이다.

사신에게 물량공세를 퍼부어라

압록강을 건넌 명나라 사신을 의주에서 맞이하여 밀착 호위하고 있다는 이종무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도총제(都摠制) 노귀산을 평양으로 보냈다. 색향 평양에서 어느 정도 손을 보라는 것이다. 하룻밤을 묵으며 흐물흐물해진 육선재가 평양을 출발했다는 장계를 받은 태종은 길창군(吉昌君) 권규에게 선물을 가지고 개성으로 떠나라 명했다.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대대적인 물량공세다. 개성에서 유숙한 명나라 사신이 한양 입성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원민생을 개성에 보내어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원민생은 대명외교에서 잔뼈가 굵은 명나라 통이며 명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흠차환관(欽差宦官) 육선재가 홍제원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었다. 태종을 모신 세종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모화루에서 영접했다. 신왕과 구왕의 동시 출영이다. 간단한 영접절차를 마친 세종이 사신을 경복궁으로 인도했다. 의식대로 근정전에서 행례가 거행되었다. 태종이 전(殿)에 올라가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조선 국왕이 ‘장자 이제(李禔)는 덕이 없어 후사가 되기 어렵고 셋째 아들 이도(李祹)는 성질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써 나라사람들이 모두 촉망하므로 후사에 세울 만하였다’고 아뢰었는데 짐이 생각건대 후사는 맏아들로 세우는 것이 고금의 변함없는 상도이다. 그러나 나라 일에 있어 사자(嗣子)의 자질은 국가의 성쇠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사자가 어질지 못하면 종사(宗祀)가 의탁할 바가 없고 나라가 어지러워 패망이 뒤따를 것이며 온 나라의 백성이 화를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왕이 국가를 위하여 장구한 염려를 하고 성쇠존망의 기운(機運)을 살펴보아 어진 이를 세워 사자로 삼고자 하니 조선 국왕이 택한 바를 들어 주노라.”

칙서를 받은 태종이 섬돌을 내려와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숨고르기를 끝낸 태종이 다시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사신과 마주섰다.

“나는 본래 병이 있어 아들 도(祹)를 후사로 삼기를 주청하고자 하여 원민생을 보냈었던 바, 그 후에 병이 더 심하게 되어서 도로 하여금 국부를 권섭(權攝)하게 하였노라.”<세종실록>

대국이라고 너무 깊게 간섭하지 말라

허락 요청이 아니라 일방통보다. 아무리 대국이라도 아비가 아들에게 대권을 위임한 것을 너무 깊게 간섭하지 말라는 선언이다. 말을 마친 태종이 소차로 돌아가고 세종이 전상으로 올라갔다. 세자가 아닌 대권을 위임받은 신분으로 세종이 사신과 마주했다. 육선재가 문제 제기를 할 겨를도 없이 행례가 끝났다. 사신이 한 마디 말을 꺼낼 틈새를 주지 않았다. 용의주도한 영접행사였다.

태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가고 사신은 태평관으로 향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세종이 태평관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다. 이튿날, 세종이 지신사 하연을 보내어 사신에게 문안케 하고 말(鞍馬)·의복·갓·신 등을 선사했다. 태종도 병조참의 원숙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태종은 명나라의 고명 없이 전위했고 세종은 등극했다. 문제가 불거지면 외교문제로 비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 사신 육선재가 국내에 들어와 있다. 꼬투리를 잡히면 대국의 압박과 요구에 끌려가야 한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면 임금을 비롯한 조정은 대책마련에 부심해야 하고 국력이 소모된다. 사신이 돌아가는 날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패. 조선시대 사용했던 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태종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군권에 이상기류가 감지되었다. 일찍이 ‘군권은 직접 청단하겠다’고 천명했건만 군권의 총사령탑 병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태종은 군권에 균열이 생기면 세종을 지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태조의 건국 위업마저 와해된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틀어쥐고 왕권의 초석을 깔아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었다. 이러한 태종의 소망에 불길한 징조가 포착된 것이다. 태종이 강상인을 불렀다.

“상아패와 오매패는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인가.”

병조참판 강상인이 세종에게 패((牌) 더 만들자고 주청했다. 영문을 모르는 세종은 병조에서 필요한 패이려니 생각하고 상서원에 명하여 상아원패(象牙圓牌) 12개와 오매패(烏梅牌) 30개를 더 만들게 하였다. 어제 하명했는데 당일에 태종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오매패(烏梅牌)는 임금이 대군이나 의정대신·삼군대장·병조판서를 비밀히 부를 때 사용하는 명소부(命召符)다. 국가 위기관리망의 핵심 징표다. 패를 소지한 자의 통행을 제지하면 어명으로 처단한다. 야간통행금지도 없다. 오매부(烏梅符)라고 부르기도 하는 오매패는 조선팔도에 오직 태종 혼자만 가지고 있다. 군권의 상징이다.

“이것으로 대신을 부르는 데 쓰나이다.”

노기를 애써 감추며 잠자코 듣고 있던 태종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아패와 오매패를 꺼내어 강상인에게 주었다.

“여기서는 소용이 없으니 모두 본궁으로 가져가라.”

태종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강상인이 곧 이를 받들고 주상전으로 가지고 가 세종에게 바쳤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것이냐.”
“이것으로 밖에 나가 있는 장수를 부르는 데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두어서는 안 된다.”

세종의 용안이 새파랗게 변했다. 경기(驚氣)가 날 정도다. 오매패는 세종에게 금지된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만져서는 안 될 양날의 칼이었다. 호랑이 같은 부왕의 불호령이 금방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세종은 강상인으로 하여금 곧바로 가지고 가서 상왕께 도로 바치도록 했다.

패(牌)를 싸가지고 창덕궁으로 뛰어가는 강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종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려졌다. 잠저시절부터 부왕을 20년 이상 모신 강상인이 아버지의 시험에 든 것이 안타까웠다.


태그:#오매패, #상아패, #육선재, #원민생, #심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