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말이 나오기 무섭게 뱀의 혀처럼 연검에서 쏘아진 한줄기 백광이 천과를 향했고, 너무나 지척의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기습을 받은 천과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심장을 관통 당했다.
“헉!”
천과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미 빠져나간 연검을 따라 심장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핏줄기 방향을 따라 꼬꾸라졌다. 엽락명은 냉정했다. 그의 목표는 천과가 아니고 추산관 태감이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한 가지 일이 바로 추태감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몫을 떳떳하게 요구하려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말을 하면서 천과가 추태감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그에게 먼저 살수를 뻗은 것뿐이었다.
엽락명이 삼수검(三手劍)이란 별호를 얻은 것은 그의 검초식의 변화도 현란했지만 무엇보다 빠르다는 점에 있었다. 다른 사람은 두 손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세 손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빠른 쾌검(快劍)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불린 명호였다.
파팟!
천과의 심장에서 피가 뿜어지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연검은 추산관 태감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천과의 심장을 찌름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처럼 보였다. 미처 옆에 서 있던 간번(艮幡)마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깨닫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헛!”
간번이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몸으로라도 엽락명의 검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반드시 추태감은 엽락명의 검에 당할 것이라고, 아니 당했으리라 생각할 터였다. 허나 그 순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띵!
경쾌한 금속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추태감의 미간과 목젖 그리고 심장을 동시에 노리며 찔러가던 엽락명의 검이 무언가에 의해 옆으로 튕겨나며 엽락명의 움직임이 멈췄다. 당연히 자신의 검에 피를 뿌릴 줄 알았던 상대로부터 목줄을 잡힌 사람은 당연히 그러할 것이었다.
“헉! 욱!”
동시에 간번(艮幡)이 품속에서 어느새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한 자 정도 길이의 갈고리처럼 생긴 기형병기를 꺼내들고는 엽락명의 옆구리를 찍자 엽락명은 놀라 탄성과 함께 헛바람이 빠지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내상을 입고 있는 곤번 역시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정신을 추스르며 쌍장을 내뻗으려다가 이미 목줄을 잡고 살소(殺笑)를 띠고 있는 추태감을 보며 멈췄다.
“끄…륵…무공을…익히…고 있…었…”
엽락명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크고 마른 체구였지만 보통 사람보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추태감에게 목줄을 잡힌 채 무릎을 엉거주춤 굽히고 있는 모습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허나 그의 두 눈에는 정말 극도의 경악스러운 기색이 담겨있었다.
추태감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아니 그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쾌검이라면 타의추종을 불허할 엽락명의 검을 튕겨내고 꼼짝할 수 없도록 목줄을 움켜쥘 수 있을 만한 절정의 무공을 숨기고 있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본관은 지금껏 무공을 익혔다거나 익히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그렇다고 누가 물어본 적도 없지.”
어느새 추태감의 손톱이 엽락명의 목을 파고들고 한 마디의 손가락까지 파고들었다.
“끄륵”
엽락명의 목젖에서 피가 흥건히 흐르며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본관이 지금까지 무공을 사용한 적이 모두 열두 번 있었지. 너까지 열세 번째야. 그리고 본관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본 자는 모두 죽었다.”
약간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더욱 괴기스럽게 들렸다.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엽락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추태감의 손이 어느새 그의 목줄을 끊어 버리고 목뼈를 부러뜨렸기 때문이었다.
우드득
체구에 비해 작은 머리를 가지고 있던 엽락명의 고개가 꺾였다. 추태감이 살짝 밀자 엽락명의 몸은 뒤로 넘어갔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하얀 천을 꺼내든 추태감이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곤번과 간번의 얼굴에도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추태감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상만천!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추태감은 꼼꼼히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면서 중얼거렸다. 운중보 내의 많은 인물들을 미리 포섭해 놓았던 것이다. 엽락명은 중의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 우군이라고 믿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성곤 역시 운중이라면 몰라도 중의로 인해 추태감 편을 들면 들었지 상만천과 손을 잡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허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누구냐?”
문득 추태감은 고개를 홱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언제 있었는지 모르지만 능효봉이 모습을 드러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네 놈을 저승으로 데려갈 사람.”
섬뜩했다. 왠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허나 추태감은 여전히 보는 이로 하여금 괴기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하는 살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비영조의 개로군. 이제 주인까지 물려고 하는 건가?”
능효봉은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개보다 못한 인간을 저승으로 고이 보내려 하는 것이지.”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곤번이 소리치며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경고도 없이 쌍장을 뻗었다. 간번 역시 기형병기를 꼬나 쥐며 능효봉의 좌측을 공격해 들어갔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을.
“빌어먹을! 목숨 두 개 더 거둔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
이미 능효봉은 살계(殺戒)를 열고자 작정한 상태였다. 자신과 싸우고자 덤비는 자라면 누구든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능효봉의 신형이 빠르게 오른쪽으로 두어 번 회전하며 짓쳐들었다. 몇 초식 안으로 이들을 정리하고 추태감의 목줄을 끊어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파파파팟!
허나 간번과 곤번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그들이 비록 동료 모두를 허무하게 잃었다고는 하지만 단지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무림인의 생리와 진정한 무림들과 싸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