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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일 일요일.
순례 9일째, 12km.
오전 10시 출발, 오후 1시 도착.

이른 아침이다. 희한하게 눈은 잘 떠진다. 걷자, 걷자고 마음먹었다. 어제 숙소를 들락날락하며 길 반대편에 카르멜 수도원 건물이 있음을 기억해두었다. 도시에 자리한 교육센터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미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강당 앞의 게시판에서 일요일 미사가 9시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짐을 챙긴 후 J와는 숙소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걷기로 했다고, 분명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날 거니까 그동안 열심히 걸어서 또 만나자고 하고 서로 포옹을 나누고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곧장 길을 가로질러 수도원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어제 닫혀 있던 강당의 출입문은 열려 있었고, 지금까지 순례하며 방문했던 성당과는 다르게 마치 구민회관이나 기념관 같은 좌석이 늘어선 강당 위에 제대와 미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대 오른쪽 벽에는 프로젝터 빔이 성화를 쏘아 비추고 있었다.

띄엄띄엄 꽤 많은 사람들이 강당을 채우고 있었고, 역시나 대부분은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와 할머니셨다. 신자에게는 의무인 주일미사인데도, 젊은 사람들은 간혹 보일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국가 스페인의 초상화인지? 곧 서툰 일반화를 거둔다.

몸뚱이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좁은 좌석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스페인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성체만 받아 모시는 반쪽짜리 미사를 마음 속으로 죄송스럽게 여기며, 그리고 하루 잘 쉬고 다시 걷겠다는 마음을 주심께 감사하며, 앞으로의 길에도 함께 계심을 깊게 느꼈다.

미사를 마치고 길 위에 다시 올라 로그로뇨를 빠져나가는 신시가지 길을 걸었다. 관광지라 할 수 있는 구시가지에서만 시간을 보낸 터라, 조금 걷자 나타난 신시가지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일상용품점과 주택과 사무실, 은행의 풍경은 한국에서 보던 것과 닮아 있었다. 어느새 길은 외곽도로로 바뀌어 널따란 도로 양편으로는 렉서스부터 기아까지 자동차 딜러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드디어 도시의 끝자락에 닿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잘 닦인 트랙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양편으로 잔디며 나무들이 열을 지어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로그로뇨시 외곽의 공원을 지나고 있는가보다. 때마침 일요일이라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참 많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길 위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올라’를 외쳤는데, 어쩐지 사람들은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점 지쳐갔다. 에라, 혼자 힘 뺄 게 뭐 있겠어. 그럼 나도 인사 안 해 하면서 묵묵히 길을 걸었다. 새파란 잔디 위로 스프링클러가 털털털 돌아가며 길 위에까지 물을 흩뿌리고 있었고, 나는 바닥의 물 자국을 돌아 걸어나갔다.

그 한 시간 남짓, 내가 마주친 이들은 가벼운 차림의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커다란 가방에 조개를 달고 걷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명 노란 화살표가 드문드문 보이는 걸로 봐선 순례 길은 맞는데. 아차, 나는 10시에 출발했지! 늦은 출발로 시간대가 틀어진 것이다.

아마 새벽같이 걷기 시작한 그들은 스산한 길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누군가에게 뒷모습이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드문드문 걸어갔을 테고, 나는 이 순간만큼은 나 홀로 순례자가 되어 로그로뇨 시민들을 헤치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바렛을 향해 포도밭을 따라서
▲ 나바렛을 향해 포도밭을 따라서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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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 시민공원(?)을 빠져나올 즈음, 몇몇 순례자들이 쉬고 있는 것을 만났다. 순간 긴장하던 마음이 풀어지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경쾌한 걸음을 이어나가던 마야를 만났다. 큰 키에 짧은 금발 머리, 양손에 든 스틱으로 땅을 짚어나가며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시원스러웠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함께 걸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그녀는 도서관 사서로 한 달짜리 휴가를 받아 카미노에 올랐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네팔 트레킹을 꼭 해보라고 권하던 그녀에게서는 경력여행자의 내공이 물씬 풍겼다.

“여행 많이 해 봤구나?”
“어떻게 알았니?”
“너를 보니까 그런 느낌이야. 여행을 아는 사람들의 여유 같은 것 말야.”
“맞아. 난 일하면서 매년 한 달 정도의 긴 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그때마다 여기저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 특히 이렇게 걷는 여행을 좋아하지.”

그리고 자기의 여행경험이며 이야기들을 넌지시 건넨다. 문득 유럽여행을 준비할 때 슬로베니아가 동부유럽의 알프스로 유명하다는 기억이 나서 그 얘기를 했더니 웃음을 띠며 고국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좋은 사람들과 재회하고 맘껏 마시고 즐기고, 안녕을 나누고, 하루를 잘 쉰 아름다운 추억으로 곱게 물든 로그로뇨의 추억을 뒤로 하고 마야와 나는 길을 걸었다.

순례자 오두막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는 마르첼리노 아저씨
▲ 순례자 오두막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는 마르첼리노 아저씨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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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공원을 빠져나오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리고 순례자들이 쉬고 있었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곳이었다. 테이블에는 비스킷과 과일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오두막 안의 긴 의자에 짐을 풀어놓고 쉬기도 하고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마야와 함께 도착한 후 도장을 받고, 꼭 방울토마토같이 생긴 노란 열매를 먹었다. 생각보다 아주 달았다.

스페인어가 정답게 오고가는 분위기에서 멍한 채 주위를 둘러보다 테이블에 방명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서 들춰보던 중 간간이 한국어가 눈에 띄었다. ‘여기가 책에서 본 지팡이 공짜로 주시는 할아버지 집이구나’라는 글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오두막 옆에 막대기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주변의 순례자들에게 ‘혹시 막대기 하나 가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고, 스페인어를 하는 순례자가 내 말을 주인 할아버지에게 전했다.

할아버지는 불쑥 의자에서 일어나시더니 나를 살펴보시고 막대기들이 잔뜩 놓여 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만져보시다가 ‘이게 너한테 딱 좋겠다’ 하는 것처럼 긴 막대기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사포를 꺼내와 손잡이 부분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내게 건네주셨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막대기를 받아들었고, 내 키보다 훌쩍 큰 지팡이의 맨 위에는 ‘NINO'라는 이름과 ‘2007’이라는 연도가 씌어 있었다. 주위의 순례자들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 할아버지 이름이 마르첼리노야. NINO, 이 지팡이 이름처럼.”
“와, 너무 감사한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세 개면 된다고 하시는데?”

세 개? 3유로를 말씀하시는 건가? 방명록에서 분명 무료 지팡이라고 했지만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지, 나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동전을 찾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보면서 주위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 당황하며 지팡이 값을 찾지 못하는 내 앞으로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그만 찾으라는 듯 내 손을 붙드신다. 순간 얼어버린 내 앞에 선 할아버지는 북실북실한 수염이 가득한 얼굴을 내 뺨에 대며 ‘우노(하나)’, 반대쪽으로 또 뺨을 마주치며 ‘도스(둘)’,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 세 번째지!”

그리고 ‘뜨레스(셋)’라고 말하며 뺨 인사를 마쳤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며 책상으로 돌아가 여권을 내미는 순례자들에게 도장을 찍어주고 비스킷을 권하셨고, 오두막 주위를 둘러싼 순례자들은 순간의 해프닝에 경쾌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나는 멍한 채로 볼에 닿은 까칠까칠하고 따뜻한 온도를 느꼈다. 손에는 세 번의 볼 인사와 맞바꾼(?) 나의 새 길벗이 들려있었다. 너를 여기서 만나기 위해 그동안 나는 빈손으로 걸어왔던 것이구나.

고마운 오두막을 향해 인사를 건넨 후 마야와 길을 걸어갔다. 문득 길 오른편에 철로 된 그물망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물망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무수한 십자가가 촘촘히 걸려 있었다.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뭇가지를 십자가처럼 만들어 그물에 걸어놓은 것이다. 수를 셀 수 없는 십자가의 행렬 속에서 길 위에 자신의 바람과 기도를 걸어놓은 수많은 순례자를 생각했다.

철조망에 걸어둔 기도 끝없이 이어지던 십자가의 길에서
▲ 철조망에 걸어둔 기도 끝없이 이어지던 십자가의 길에서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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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을 이 길 위에 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이 십자가에 어떤 절실한 기도를 걸어놓았나요?'

나 역시 길을 멈추고 바닥에서 작은 나뭇가지 두 개를 들어 십자가 모양으로 그물에 엇갈리게 걸어놓았다. 그리고 잠시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지금도 그 길 위 작은 십자가는 내 기도를 지속하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십자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유쾌한 벗과 함께 걷는 길, 눈 깜짝할 새에 ‘나바렛(Navarette)'에 도착했다. 1시까지 숙소가 닫혀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왕좌왕하던 가운데 마야는 다른 순례자들과 합석하여 점심을 즐겼고, 나 역시도 별도리가 없어 가방을 풀어두고 점심을 먹었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의자 하나가 비어 있는 미국에서 온 두 순례자와 합석했다. 광주에서 영어교사를 했다는 폴라와 지금 중동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는 조이, ‘우리는 순례자 숙소에 묵지 않아. 차를 타고 마을들을 둘러보고 호텔에서 묵지’ 식사를 마치고 숫자게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 이런 순례도 있구나' 생각했다.

마야는 이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걸을 것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작은 종이쪽지에 메일주소며 연락처를 적어 ‘혹시 슬로베니아에 오게 되면 연락해’라며 쥐여주었다. 그리고 좋은 순례가 되길 기원하며 가방을 짊어지고 걸어갔다. 하루만에 다시 걷는 길에 좋은 동료가 되어줬던 친구와 석연찮은 마무리를 하게 되어 미안하기도 했고, 배려가 고마웠다.

건네준 쪽지를 노트에 고이 보관하고, 샐러드 큰 접시 하나와 튀긴 생선 그리고 플랑이라고 하는 푸딩까지 거나한 3 코스 정식을 해치웠다. 곁들여 마신 라 리오하의 비노 덕분인지 시간감각이 늘어져 파라솔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진을 치고 앉아 있다 1시가 훌쩍 넘어 숙소에 들어갔다. 짐을 풀고 샤워며 빨래며 마쳤다.

문득 스산해졌다. 할 일이 없었다. 카미노 잡지를 들춰보기도 하고 신문에 난 모든 지역 성당의 미사 시간을 메모하다 로그로뇨를 빠져나오며 마르첼리노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지팡이가 떠올랐다. 함께 길을 걸었던 브라질 사람 J의 인상적인 지팡이를 따라 나 역시도 이름을 새겨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기대놓았던 지팡이를 들고 식당 겸 라운지(?)로 갔다. 테이블에 신문을 깔고, 에스테야에서 산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들고 열심히 이름을 새겼다. J의 그것처럼, 지팡이 아랫부분에 이름을 파 나가기 시작했다. 영문자를 새기는 일은 퍽 시간이 걸렸다. 나의 희한한 작당을 쳐다보며 사람들은 말을 걸기도 하고 신기해 하기도 하다 곧 다시 자기들의 관심사로 돌아갔다.

“너 뭐하니?”
“응? 지팡이에 이름 새겨.”

스코틀랜드에서 온 N과 J라고 소개한 두 남자애들이 테이블에 책을 펴놓고 있었다. 마치 교재 같은 두꺼운 것을 읽으며 종이에 열심히 적어나가는 모양새가 공부하는 것 같았다. 전에 스페인어를 배웠지만 좀 더 잘하기 위해 단어를 외우는 중이란다. 가방에 그렇게 큰 책이 들어가 있단 말야? 잠시 그 책을 쳐다보고는 다시 열심히 지팡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 애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순간 이것이 네이티브와 비 네이티브의 차이인가 싶기도 했다. 혹은 나 자신이 네이티브에 대해 갖는 부담감 따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혹은 ‘좀 더 천천히 말해줘’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저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너희를 이해하고 있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해한 것인지 짐작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찌 되었건 마치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던지는 상대와 썩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지팡이에 이름 새기는 것이 끝나고 ‘안녕’을 나누는 것으로 그들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고, 나는 조금 뿌듯한 마음으로 완성된 지팡이를 끌어안고 방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해는 여전히 길었다. 나는 마을을 둘러보기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열심히 글을 끄적이고, 집으로 보내는 매일의 엽서를 한 장 쓰기도 했다. 너무나 긴 여유 시간의 덕분인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머리 위로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일, 카미노 후, 한국에 가서 성적표를 받고, 나의 졸업 후, 그따위 것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지금 여기만을 생각하자고, 아니 생각조차도 말고 그저 지금 여기에 ‘있자’고 했는데…,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렇다. 어쩌면 혼자되니 다시 불쑥불쑥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동네를 둘러보다 상점에서 사 온 세 개의 달걀을 삶아 내일 아침거리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여전히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는 창 밖을 쳐다보며 잠들었다. 되돌아온 고독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내일은, 조금 일찍 걸어야겠다.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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