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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밑에서 '우드득!'하는 소리에...

   2007년 7월 4일 수요일,
   순례 12일째, 20km.
   오전 7시 출발, 오후 12시 40분 도착.

   다섯 시 반쯤 되었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겨우 뜬 눈에 랜턴 빛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M의 일행들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일어나서 짐을 꾸려 같이 걸어볼까, 그렇지만 조금 더 늦장을 부리고 싶었다. 적어도 인사는 하고 싶은데, 이미 눈은 감긴 채로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이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 시계는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옆자리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 비가 오고 있었다. 짐을 꾸리고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나는 다시 불안한 고독으로 돌아왔다.

    느낀 것: 지난하게 이어지는 고속도로 옆길을 따라 걷는 것, 발바닥의 물집이 돌멩이를 밟을 때의 악 소리가 튀어나오는 아픔, 비가 오니 달팽이 떼들이 우르르 나와 행렬하는 모습과 그 애들을 밟지 않으려고 퍽 노력했지만 정신이 다른데 가 있는 사이 발밑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물컹한 감에 곧 미안해지고 마는 것….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달팽이와 개미들을 밟아 뭉갰을까, 아니 알지도 못하는 존재들을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죽여왔을까, 문득 ‘미안해지고 마는 것’ 자체가 미안하기만 한 아침이었다. 발밑에서 기어가는 달팽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10시가 좀 넘어 '벨로라도 Belorado'에 도착했다. 나바렛에서 쉴 때 들춰본 신문에서 이 동네에 미디어센터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궁금한 마음으로 한달음에 찾아간 곳은 작은 전시관이었다. 앞으로 걷게 될 카스티야 레온 구간에 대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많이 남아있어서 특히 성당을 보고 싶다면 굉장히 좋은 길일 거야.’

C가 내게 일러준 것처럼 전시관 한 편에는 주요 마을마다 만날 수 있는 성당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C, 너 잘 걷고 있니? 난 지금 기대가 되기도 하고 또 두려워지기도 해.

   짧게 전시관을 돌아보고 안내인 언니에게 다가가 웃으면서 여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정겹게 웃으며 내 여권을 펼쳐 정말 정성스럽게 도장을 꾹! 하고 찍어주었다. 그리고 홍보용 지도를 건네주었다. ‘아타푸에르카 Atapuerca'에 아주 유명한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다며 혹시 들르고 싶으면 이 시간에 들르라고 꼼꼼하게 유적지 개장시간까지 써서 여권에 끼워 넣어준다. 아침부터 좋은 사람을 만나 기분이 상쾌해져 ’아디오스(안녕히)‘를 외치며 길 위로 올라섰다.

   성당과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시간이 꽤 흘러 걸음을 재촉했다. 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 아침에 흩뿌리던 비는 간데없고 햇빛이 사나운 열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예정했던 비야프랑카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했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마치 중지신호처럼 아파오는 다리를 끌듯 걸었다. 눈앞에 ‘이제 곧 Albergue(숙소)'라는 광고표지가 어른거렸다. 작은 집 모양의 액자 한가운데에는 소박한 숙소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목적지고 뭐고 다음에 나오는 곳에 짐을 확 풀어버리겠다 작정을 하고 이를 앙다물고 걸었다.

외딴 마을의 순례자 숙소 위태로운 겉모습에 따뜻한 보금자리를 품고
▲ 외딴 마을의 순례자 숙소 위태로운 겉모습에 따뜻한 보금자리를 품고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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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정말 마을 맞아?   

다행스럽게 몇 백 미터를 걷자 곧 사진 속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자리 잡은 작은 2층짜리 집은 거친 돌담을 따라 담쟁이덩굴이 자라 오르고 집 앞 작은 화단에는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발길은 집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대체 여기가 어딘지, 주위에는 왜 아무것도 없는지, 여기가 정말 마을은 맞는지 하는 생각으로 복잡했다.

굳게 닫힌 대문을 서성이며 의문은 더해갔지만 몸은 당장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 숙소 주위를 한 바퀴 서성이다 체념하듯 길로 되돌아가려는 그 때에 끼익 하고 육중한 나무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북실북실한 은색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숙소의 주인인 듯했던 할아버지는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 후 집 안에서 코팅된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나와 쥐어주었다. 받아든 것은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일본어로 각각 쓰여진 숙소 안내문이었다. 12유로, 저녁, 아침 제공, 그런 것들만 확인한 후 무조건 ‘비엔(좋아요)’을 외치며 들여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흙먼지가 가득한 신발을 신발장에 벗어두고 할아버지를 따라 방을 안내받았다. 이층침대 세 개가 자리한 방에 맨 처음으로 짐을 풀었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샤워며 빨래며 해치워버리자는 생각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일을 마치고 낮잠을 잤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깨어보니 다섯 시였다. 여전히 방에는 나 혼자였다. 이쯤 되면 순례자들이 하나 둘 올 때가 되었는데, 어쨌든 일어나서 마을 주변을 둘러보는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성당마저 공소 같은 곳이라 일요일에만 미사가 있단다.

조금 더 걸어 구경을 나가볼까 하다 발바닥이 아물기 전엔 함부로 걸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는 네 시간 만에 바삭하게 말라 하나씩 걷어 끌어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차피 멀리 걷지 못할 바에야 카메라를 들고 이 이색적인 숙소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화단의 장미꽃을 찍으며 향기를 맡는 동안 문득 하늘 위로 쉬익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떠가고 있었다. 문득 나의 8월 22일 12시 45분의 로마를 생각했다. 65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향할 나를 떠올렸다. 요즘 들어 하늘을 긋는 비행기들을 보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남은 시간은 한 달하고도 18일 정도,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다.

힐아버지 컬렉션 숙소의 거실 벽을 가득 채운 온갖 소품들
▲ 힐아버지 컬렉션 숙소의 거실 벽을 가득 채운 온갖 소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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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안 됐다해서 실패한 것은 아냐   

숙소에 들어와 1층 거실에 앉아 할아버지의 다양한 컬렉션들을 감상했다. 골무처럼 생긴 것들, 병정인형, 작은 총과 칼 모형, 성수대, 십자가 등 갖가지 소품들이 벽면 사방에 가지런히 정리된 것이 놀라웠다.

할아버지 방에서는 ‘My way’, 그리고 ‘You raise me up'의 스페인어 버전이 들려온다. 차분하면서도 웅장한 음색을 배경삼아 푹신한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꺼내 명화감상을 시작했다. 정말 이색적인 곳이다. 거짓말 같은 곳이다. 그리고 결국 이 날의 순례자는 나 홀로였다.

   식사시간은 8시였다. 나는 7시 반쯤 되어 1층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의 식사준비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자 이것저것 준비하시던 할아버지가 오셔서는 손사래를 치며 나를 거실로 데려가신다. 그리고 방명록을 펼치셔서는 한국어로 빼곡하게 쓰여진 면을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방명록을 읽었다. 마치 산장 주인처럼 이 작은 숙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읽으니 재미있다. 오늘 정말 특이한 곳에서 하루 손님이 되어 묵는다.

    순례자는 그저 쉬기만 하면 된다며 오늘 손님은 나뿐이니 5분이면 된다고 고맙다고 하시는 할아버지, 정말 대체 내가 이 길에서 한 거라곤 그저 걷는 것뿐인데(그것마저도 사실 살살 요령부리면서 20km정도…) 문득 어제부터 짊어지고 온 양파며 감자며 토마토들, 내가 해먹겠다고 짐처럼 끌고 왔던 음식재료들이 우습기도 하고 정말 감사해서 뭐라고 할 말이 생각이 안 났다.

    어제도, 그제도, 아니 사실은 내 인생 전부, 나는 그저 태어나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받기만 해왔고 그것마저도 모자르다 화를 내고 있었구나, 싶었다. 나는 한 것이 없는데…, 이 길에서 그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인다.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내가 ‘올라(안녕)’만큼 많이 얘기한 그 단어…, 진정으로 입에선 그라시아스 말고는 더 나올 말이 없는(단어도 모르지만)길이다.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 게 삶인가 봐.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는 변함없지만 그 안의 하루하루들은 신기하고 놀라운 변주들로 가득 차 있고, 매일 매 순간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길로 향하는 하루의 작은 조각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오늘이 이렇게 아름다운 색의 빛깔을 입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잖아. 스페인의 태양과 푸른 하늘 초록 언덕과 바람과…, 그래서 즐거운 삶(또 즐겁지 않은 혹은 오늘보단 덜 즐거운 날도 있겠지만)이라는 것, 온몸으로 배운다.

책에서 징그럽게 읽고 대체 뭐냐고 이해를 못했던 이론시간 다음의 철저한 실습기간? 즉 나에게 이 두 달은 그동안 수천 권(쯤은 될 거야)의 책을 읽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으로 나를 잡아먹었던 - 그렇지만 내게 모두 필요했던 - 이론시기를 거치고 본격적으로 경험하는 실습기,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아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내가 ‘살아있다!’는걸 느끼는 순간순간.

 일정이 많이 틀어져서 길 위에서는 거의 혼자, 많아도 하루에 기껏 너 댓명, 그들은 하나같이 긴~ 다리로 나를 앞질러 걸어가고, 나는 그저 천천히 걸어간다. 정말 이 길에 빠져버린다면, 예약한 비행기며 숙소며 다 날려버려도 그냥 계속 지낼 수 있을 듯싶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라 해서 실패했다거나 잘못한 게 아냐, 어쩌면 더 깜짝 놀랄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 마치 오늘처럼…, 순례가 끝나고 달성하겠다고 세워놓은 빼곡한 계획들을 허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할아버지의 요리 토마토와 버섯, 고추와 감자로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
▲ 할아버지의 요리 토마토와 버섯, 고추와 감자로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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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감사하기만 한 저녁 식사   

할아버지와 함께 오붓하게 식탁에 앉아 함께 먹었던 저녁은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할아버지의 고향 바르셀로나식 요리라고 하신다. 다섯 번의 카미노를 통해 바로 지금 이 곳에 숙소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는 할아버지, 스페인어와 손짓 발짓으로 끄덕이고 또 웃으며 보냈던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사실 너무 많은 음식이었는데도 남기면 안 된단 생각에 열심히 다 먹어서 배가 조금 아팠다. 설거지 정도는 내게 맡겨 달라고 했더니 쉬면서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며 나를 식당에서 내쫓으신다.

창밖으로 숙소에서 내다본 낮은 언덕의 풍경
▲ 창밖으로 숙소에서 내다본 낮은 언덕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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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올라와 창밖을 멍하니 쳐다본다. 작은 창으로 나지막한 언덕이 정겹다. 오래간만에 홀로 방을 쓰는 기분이 산뜻하다. 침대에 담요를 깔고 그 위로 침낭을 깔아 담요를 둘렀다. 7월인데도 실내가 추워 밤이 약간 걱정된다. 이번 여름은 정말 제대로 된 피서를 하는 구나.

숙소 주인장 페페 할아버지 한 사람의 순례자도 친절하게 맞아주신 오늘 순례의 천사님
▲ 숙소 주인장 페페 할아버지 한 사람의 순례자도 친절하게 맞아주신 오늘 순례의 천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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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집을 찾아주는 순례자들이 모두 내 가족이지.”

   외딴 마을 작은 집에서 순례자들을 가족처럼 정성으로 맞으며 홀로 살고 있는 페페 할아버지의 집에서 지낸 하루가 저물어 간다. 한 밤에는 별이 잘 보이겠지? 창문을 열어봐야지.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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