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들 사이에, 내 생각이지만, 이스라엘 친구들은 인기가 없는 편이다. 나부터도 그들이 모여드는 숙소는 꺼리게 된다. 보통 네댓 명이 몰려다니며 안하무인격으로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짓을 꼭 용감하게 하곤 한다.
그들은 담뱃불조차 금지된 마추픽추산정에서 늠름하게 버너를 켜서 차를 끓인다.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사진관 하는 한인에 따르면 '이미 인화되어 나온 사진 값을 깎자고 덤비는 유일한 놈들'이 그들이다. 또 젊은 혈기를 자랑하느라 밀림 속 어린 악어 입을 묶어두고 도망가버려 악어를 굶겨 죽이기도 했다. 그 사건은 볼리비아에서는 유명했던 사건이라 한다.
그런데 왜 그럴까. 어떤 여행자는 유대 선민의식 때문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남녀 모두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 이스라엘 친구들은 제대 후 취업하기 전까지의 기간에 여행을 하는데 군인의 치기가 집단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 산크리스토발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우리가 묵는 호스텔에 이스라엘 친구 다섯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첫날부터 파티를 열었는데, 다 함께 쓰는 공동부엌을 점령(?)하고 자정이 넘도록 시끌벅적 술을 마셔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체력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루는 옥상에 빨래를 널고 햇볕을 즐기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내 옆 자리에 와서 털썩 앉았다.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평소 궁금하던 문제를 물어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니?"
"팔레스타인 뭐?"
"뭐?"라는 말끝이 사뭇 날카로웠다. 의자에 깊이 파묻혀 느긋하게 해를 쬐던 나는 불에 덴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곤 대충 얼버무린다는 게 그만 심중을 꺼내 보이고 말았다.
"아니, 난 그냥, 땅 문제가 쉬운 건 아니겠지만…, 서로 평화롭게…."
"무슨 땅 문제? 넌 성서도 안 읽어 봤냐? 그 땅은 대대손손 우리 땅이라고!"
나 역시 디아스포라 이후 2천년의 세월 동안 세계에 흩어져 천대받으며 살아왔던 유대인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세월동안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무력으로 내쫓는 건 또 뭔가. 동병상련하는 마음이 생겨나야 인지상정 아닌가. 그의 말처럼 굳이 성서로 따지더라도 모세가 이스라엘 족속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질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서 일종의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이스라엘 여행자를 만나도 절대 팔레스타인 문제는 얘기하지 않는다. 대화 자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신 꼭 한 번 이스라엘을 가보고 싶었다.
마침내 이스라엘로 입국하는 날.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 담당 여군은 이미 여러 질문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아내와 나의 여권을 뒤적이고 있었다. 또 무언가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압적인 말투로 따지듯이 묻는다.
"이란에는 왜 갔죠? 가만, 파키스탄도 갔었군요!"
"이것 보세요! 난 여행잡니다!"
이미 내 말투 또한 까칠해져 있었다. 이스라엘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들은 가상 범죄인처럼 취급당했다. 건물 밖에서 배낭을 통째로 넘겨주고도 1시간 넘도록 소지품 검사를 했고, 다시 1시간이나 더 기다려 여권심사를 시작했지만 질문은 몇 십분째 계속되고 있었다.
"이란에 친구 있습니까?"
"그런 것까지 제가 대답해야 하나요?"
베흐루즈, 아사디, 코르세, 알리, 자흐라…. 사막에서 피어난 꽃처럼 아름답고 순박했던 내 친구들. 그들 때문이었을까. 드디어 내 눈에 핏발이 선 모양이었다. 아내가 내 옆구리를 꾸욱 찌르고 나서 얼른 수습에 나선다.
"우린 지금 세계여행 중이에요. 호호. 여행자가 길에서 만나면 다 친구죠 뭐. 호호."
여군이 다시 묻는다.
"시리아도 갈 겁니까?"
"터키 가는 길이잖아요. 비행기를 탈 수도 없고. 호호."
이런 순간 아내는 더욱 현명해진다. 난 성질만 내고….
요르단 암만을 떠난 지 꼭 5시간 30분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차를 탄 시간은 2시간 남짓. 그러니까 국경심사에만 3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우린 예루살렘 성 다마스커스 문 근처의 호스텔에 짐을 풀고는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까칠해진 기분이 좀 누그러지면 저녁을 먹으러 나갈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 계세요? 이리 나와서 저녁식사 좀 해요!"
들어올 때 잠깐 눈인사를 나누었던 한국인 아저씨다. 그런데 무슨 식사?
공동부엌으로 갔다. 놀랍게도 밥과 닭도리탕, 양배추로 만든 김치가 뷔페식으로 놓여있었다. 그 때야 자신을 '토마스'라고 소개한 매니저가 아침은 물론 하루 세끼를 제공한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이런 횡재가!
여행이 길어지면서 몸이 아프거나 우울할 때 한식만한 특효약은 없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딱'이었다. 아내와 나는 신이 나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었다.
"아저씨, 여기서 일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토마스가 그렇게 말하지요? 나 여기서 밥해주는 사람이라고. 그러지 말라 했는데도…."
"그럼 아니라는…."
"내가 좋아서 내 돈 들여 하는 일이에요."
아저씨는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난 모양이었다. 처음 만난 우리에게 사연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는 더없이 어눌했는데, 한국전쟁 때 갓난아이로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아저씨의 이름 '이영생'도 그 때 원장님이 지어준 거였다. 고아원을 나와 지금 이 때껏 넝마도 지고 '노가다'도 다니며 그날그날 비만 피하며 살아왔단다.
"그래도 배 곯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다 예수님 덕분이지요."
영생 아저씨는 그것이 감사해 어느 날 예루살렘에 와서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단다. 그간 모아둔 돈과 알고 지내던 목사님 도움으로 11개월 전부터 지금껏 여행자들을 위해 밥을 해주고 계신 거였다. 그런데 호스텔 측은 자기들 서비스인 양 생색을 냈던 것이다.
"제가 영어를 못하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여행온 한국학생한테 부탁해서 저걸 썼어요."
식탁 뒤쪽 벽에는 'Jesus Gives this Food!'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때 영국인 한 명이 자기도 식사해도 되느냐고 물어왔다. 아저씨가 벽에 붙은 종이를 가리키며 국적 없는 언어로 대답한다.
"예쓰. 이거 Jesus가 줬어. 그러니까, Jesus 땡큐, 응? 맛있게 냠냠. 오케이?"
영국친구는 장난스럽게 종이를 향해 두 손 모아 "Thanks Jesus!"하고는 접시에 음식을 퍼 담았다. 이번엔 일본친구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저씨가 "제패니즈 노!"하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오늘 점심식사 후에 자기 접시를 닦지 않았단다.
당황한 그들에게 대신 내가 설명해준다. 이건 영생 아저씨가 자비를 들여 만든 음식이라는 것, 여행자들이 밥 먹고 기운 내서 많이 보고 느끼고 돌아가라는 그의 마음이라는 것, 그런데 너희들은 자기 밥그릇도 씻어놓지 않아 화가 나셨다는 것. 일본친구들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아저씨는 알았으면 됐으니까 어서들 식사하라고 손짓하신다.
다음날 예루살렘 성안을 돌아보았다. 유대인, 기독교인, 모슬렘, 아르마니아인,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미로 같은 골목길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차도르를 쓰고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황금사원'으로 향하는 여인들. 모자부터 구두까지 검게 차려입고 양쪽 머리를 꼬아내린 채 '통곡의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유대 청년들. 검정 망토를 걸친 아르메니아인 할머니. 아장아장 금발 아이의 손을 잡고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관광객들. 예루살렘 성안은 그야말로 인종과 종교의 박물관이었다.
'이처럼 살 수 있으면서도 왜 서로 미워하고 전쟁을 하는 걸까?'
숙소로 돌아오니 영생 아저씨가 저녁준비 중이었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요리하겠다며 아저씨를 식탁에 억지로 앉히자, 전날의 영국친구가 자기도 도울 일이 없냐며 끼어들었고, 일본친구들은 오늘 설거지는 자기들이 몽땅 맡겠다고 나섰다.
참으로 평화로운 하루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해 조카로부터 온 메일을 열어보는 순간 평화는 깨져버렸다.
"삼촌, 지금 어디 있어? 이스라엘엔 들어가지 마! 오늘 한국인 기자가 납치됐어!"
우린 이미 이스라엘하고도 예루살렘인데 대체 무슨 소리야! 바로 뉴스를 검색했다. 평화로웠던 오늘 하루, '성 밖'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군이 여리고 감옥을 습격해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잡아갔고, 이에 항의해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외국인 기자들을 납치했는데 KBS특파원도 들어 있었다.
다음날 예루살렘 거리에는 무장군인들이 쫙 깔렸다. 아무래도 사해·마사다·여리고 투어는 당분간 힘들 모양이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갔다가 오후에는 4.4㎞ 성벽을 따라 성 밖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고 이스라엘을 그만 떠나고 싶어졌다. 꼭 총을 든 군인들 때문이라 할 순 없었다.
박물관은 세계 유대인들이 기증한 유물과 그곳에서 뜯어온 유대교 회당과 토라로 가득 차있었다. 방마다 아이들이 교육받고 있었는데 군인들도 많았다. 나라 없는 2천년 세월을 견뎌낸 민족이 그 자부심을 교육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왜 내 마음은 불편하고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선택받은 민족, 우수한 두뇌, 미국을 주무르는 경제력. 부모 중 한 쪽만 유대인이어서는 유대인이 될 수 없다는 이 닫힌 사회가, 민족의식이 강해지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과 함께 멕시코에서 만났던 이스라엘 청년이 생각났다.
어둠이 내릴 무렵에 숙소로 돌아왔다. 영생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고 준비된 저녁식사도 없었다. 여행자들은 왜 오늘 저녁이 없는지 의아해하며 할 일 없이 부엌을 드나들고 있었다. 가끔 토마스에게 따져묻는 이도 보였다.
정작 아저씨는 방에 누워계셨다. 아프신 것이다. 나도 처음 들여다본 그의 방이란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아래에 천막을 둘러쳐 만든 좁은 공간에다 침대 하나 달랑 있는, 사실 바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곳이 호스텔로부터 50% 할인받는다는 아저씨의 방이었다.
나는 문뜩 화가 치밀어 호스텔 매니저 토마스에게 달려갔다.
"토마스! 호스텔에서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한다고 말했지?"
"그래, 맘껏 먹어. 공짜라고. 예루살렘에 이런 호텔은 없을 걸!"
"그럼 저 한국인, 너희가 고용했어?"
"너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그는 말꼬리를 내렸고, 난 또박또박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토마스, 잘 들어. 너희 고용인이면 지금 아프니까 약 사다줘라. 그리고 숙박비 한 푼도 받지 말고. 쌀이나 야채값도 지불하고. 만약 너희 고용인이 아니면, 손님들에게 말해. 저 사람의 진심을 가로채지 말란 말이야! 여행자들도 알고 먹을 권리가 있다고! 내 말 알아들었니?"
예루살렘을 떠나는 날이었다. 아저씨는 올리브 나무로 직접 깎아 만든 십자가와 먼 여행길에 김치담가 먹으라며 멸치액젓과 참기름 한 병을 배낭에 넣어주셨다. 나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봉투에 담아 억지로 드리면서, 토마스에게 당하지만 말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뒷머리를 긁으며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난 괜찮아. 예루살렘에 다녀간 사람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그런데 난 괜찮지가 않았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 아저씨가 행복한 사람인지. 아저씨가 해준 밥을 먹는 여행자들이 행복한 사람인지. 성 안 예루살렘이 진짜인지, 성 밖 예루살렘이 진짜인지. 전쟁을 왜 일으키는지, 평화는 어떻게 도달하는지. 예수와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무엇이 같고 다른지.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괜스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