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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도를 품고 서 있을까 카스트로헤리츠 가는 길의 십자가 앞에서
▲ 어떤 기도를 품고 서 있을까 카스트로헤리츠 가는 길의 십자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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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7일 토요일, 날씨 어떻게 이렇게 맑지?
순례 15일째, 20km. 오전 7시 출발, 낮 12시 30분 도착.

사과 한 개 물고 걷는 아침은 힘겨웠다. 마음속으로 어느새 '카페 콘 레체~'를 부르짖는다. 로그로뇨, 혹은 로스 아르코스 쯤에서 폴란드 아저씨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이 길에서 순례자들은 나의 순례 선생님이 되어준다. 비노를 마시는 법을, 카페 콘 레체와 가예타로 시작하는 아침을, 지팡이에 이름을 새기고 빨래집게와 닿았던 곳의 핀을 사서 가방 뒤에 줄줄이 매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배웠다.

10km, 2시간 반 동안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방 360도가 전부 밀밭으로 둘러쳐진, 마을 하나 안 보이는 (일종의) 세상의 끝에 이르니 약간 두려워진다. 이런데 사람이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 걸까? 분명 사람 손이 닿으니 밀이 자라긴 할 텐데, 괴롭게 힘들게 길 위에 온갖 생각을 흩뿌리며 두 시간 반을 걸었다. 그리고 작은 마을 '온타나스(Hontanas)'에 닿았다.

폐가와 돌무더기들이 있는, 스산한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성당이 잘 보이는 바에 들어가 랩에 포장된 보카디요와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노천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리라 마음먹고 조심조심 잔을 들고 나오는데 어제 부르고스 나서는 길에 보았던 순례자가 들어온다. 꼭 봐야할 것이 있다며 우리를 잡아끌던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큰 키의 남자였다. '올라'를 전하며 밖으로 나서려는 내게 한 마디 건넨다.

"께딸(Que Tal)?"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스페인어 인사야. How are you?"


그러고 보니 그는 어제 처음 만났을 때도 나에게 '께딸'이라고 말했고,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멍하게 서서 그와 일레나가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알았다. 오늘은 스페인어로 인사하는 법을 배운 날이다. 나 역시 '무이 비엔(아주 좋아)'하고는 웃으며 바의 바깥으로 나가 아침밥을 즐겼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서넛의 젊은 여성 순례자들이 몰려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숙소 식당에서 '에디트 슈타인'을 찾던 아이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각 나라 이미지를 뜯어 붙인 듯한 모자이크 같은 집

붉은 벌판을 따라 양귀비가 흐드러진 7월의 순례길
▲ 붉은 벌판을 따라 양귀비가 흐드러진 7월의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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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위장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느 새 오늘의 목적지,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에 가까워졌다. 마을 입구를 따라 곧게 뻗은 나무가 줄줄이 늘어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길을 걷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 곳에서 그늘 한 편에 앉아 쉬고 있는 정은 언니를 보았다. 나보다 일찍 아침에 출발해서 숙소에 도착해서야 만날 줄 알았는데, 잠시 멈춰서 언니와 얘기를 나누다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을 알리는 표지를 만나고, 박물관에 들어가 고요한 실내에서 투박한 등산화가 내는 소리를 조심하며 성물과 각종 전시물들을 보고 마을의 모형을 구경했다. 3km 정도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마을은 생각보다는 큰 편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숙소를 찾아 마을을 걷는 사이 눈앞에 금발의 남정네와 함께 걸어가는 정은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세 개의 숙소가 있는 이 마을에서 어느 숙소에 갈 것인가를 두고 이리저리 헤매다 남자는 가격이 싼 공립숙소를 찾아가고 우리들은 약속한 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있는 사설숙소로 정했다.

그곳은 활짝 열린 대문 밖으로 나른한 재즈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마치 인도나 태국의 분위기가 풍기는 옷을 입은 마른 체형의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각 나라의 이미지를 뜯어와 붙인 듯한 모자이크 같은 집이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화장실과 샤워실은 벽이 뻥 뚫려 안이 훤하게 보였다. "여기서 샤워를 할 수도 있겠지만, 말리진 않을게. 하하하!" 주인 남자가 웃으며 숙소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었다.

꽤 일찍 숙소에 도착해 한산한 분위기였다. 짐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마치니 곧 시에스타 시간에 가까웠다. 정은 언니와 함께 동네 상점에 뛰어 들어가 쌀이며 얼린 생선에 샐러드 거리를 샀다. 오래간만에 밥과 반찬을 두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냄비에 뜸 들여 지은 밥을 포크로 모아 입에서 굴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열심히 함께 준비한 언니와의 식사는 걸음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복대 속에 넣어둔 집으로 가는 항공권을 꺼내보다

카스트로헤리츠 마을 안내판이 보이면 오늘 걸음도 끝
▲ 카스트로헤리츠 마을 안내판이 보이면 오늘 걸음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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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숙소는 다른 곳에 비해 컴퓨터 사용이 편리해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부터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준비해 온 여행일정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 터였다. 길 위에서 한 달, 유럽여행에 한 달을 공평히 배분하고 왔던 애초의 계획에서 점점 순례의 비중이 커져간다. 지체 없이 걸음을 마치고 아프리카 모로코로 날아갈 비행기며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에서 묵을 숙소들도 모두 공들여 예약을 하고 왔건만….

클릭 한 번으로 모든 숙소의 예약들을 취소하고, 환불도 변경도 불가능한 저가항공 예약은 어쩔 도리 없이 남겨두었다. 첫 해외여행에 아무것도 모르고 불안한 마음에 예약은 필수라는 말을 듣고 한국 땅에 앉아 셀 수 없는 검색과 몇 통의 메일, 또 신용카드 결제를 통해 준비해 놨던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이 곳에 와서 부딪히는 것은 많이 달랐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또 그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즐거워하는 나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재미있다. 문득 복대 속에 넣어두었던 집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꺼내보았다. 손이라도 베일 듯 빳빳했던 종이가 어느새 여기저기 헤어지고 구멍이 뚫려 후줄근하다. 'Date Change OK', 날짜 변경 가능이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은 이미 붕 뜬 채 한 달 후, 두 달 후의 나를 향한다.

문득, 지금 내가 엉뚱한 곳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순례가 좋아서 어떻게든 이 길 위에서 오래 있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 '어느 여행지, 관광지를 가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할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쫓으며 '새로운 계획'에 나를 내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저 계획을 그만두는 것 까지만, 생각 그만!

계획에 없는 '놀라움'을 즐기기 시작하다

컴퓨터에서 일어나 침대로 돌아왔다. 오래된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낮은 초원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정은 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내가 무심코 지나쳐버린 그라뇽에서 아름다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다 같이 저녁식사를 만들어 한 식탁에서 나누고, 성경을 읽고 또 나눔을 하고, 성당 첨탑위에 올라가서 노을을 보았는데,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사실 지금까지 순례를 한다고 했지만 가끔 성당에 찾아가는 것 말고는 내가 기대하던 종교적, 혹은 영적인 경험은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브라질 순례자 줄리아나가 에우나테 성당에서 흘렸던 눈물, 그리고 언니가 그라뇽에서 만났던 감정에 욕심이 났다. 나름대로 심각한 순례자인 내게는 왜 그런 경험이 비껴만 가는 걸까?

"안내 책에서 본 건데 여기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예전 성당을 개조한 숙소가 있대요. 카미노 길은 아니고, 길에서 약간 비껴난 마을이지만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을 만한 곳 같아요."

까사 노스트라의 풍경 순례자 숙소 창밖의 너른 들판
▲ 까사 노스트라의 풍경 순례자 숙소 창밖의 너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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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의 이름은 '이테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 한 가닥 실마리를 붙들고 내가 가진 정보를 모두 조합해 보았다. 가지고 있는 숙소자료지에도 분명히 있는 마을이다. 주변 순례자들에게도 물어물어 그림을 그려보니 한 번 가 볼만한 곳 같았다. 문득 며칠 전 에스피노사 델 카미노에서 보냈던 따뜻한 하룻밤이 떠올랐다.

순례를 시작했을 때엔 계획했던 대로 하루하루 목적지에 닿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지쳐있을 무렵 로그로뇨에서 하루를 쉬고 다시 걸을 힘을 재충전하고, 예상치 못한 작은 마을에서 환대를 받는 등의 경험으로 오히려 내가 세운 계획과 목적지 바깥에 알지 못했던 놀라움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 놀라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마음을 정했다. 내일은 10km만 걷고 그 마을에서 쉬자.

숙소를 들락거리다, 온타나스에서 나에게 께딸의 의미를 알려준 순례자를 만났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어제 부르고스에서 할아버지랑 같이 갔었지? 어땠어?"
"옛날에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남아있는 곳을 알려주셨어. 도장도 찍고 둘러보고 왔지. 감사했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거든."


'여권에 도장 하나 찍을 곳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워졌다가 문득 머리가 멍해졌다. 할아버지는 나의 상상처럼 사기꾼도, 노숙자도, 위험한 사람도 아니었다. 괜히 그를 마주보기가 부끄러워졌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에게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스페인 중소도시의 치부처럼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오스피탈레로 아저씨에게 미사시간을 물었다가 오늘 혼배미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간만의 미사를 하러 부지런히 성당으로 향했다. 두 번째로 만나는 혼배였다. 멍한 채로 미사에 앉아 성체를 모시고 신랑신부를 축하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신부가 우크라이나 사람이라던가, 루마니아 사람이라던가 하는 마치 한국의 그것과 퍽 닮은 아주머니들의 수근거림을 엿들으며 박수로 축하했다.

폭죽과 쌀알이 흩어지는 성당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엽서와 핀을 사기 위해 기념품가게에 들어갔다. 주인할아버지는 "나이는 몇 살? 혼자 왔어? 어디서 왔어? 오늘은 어디서 자고?" 연신 질문을 쏟아내며 내게 달려들어 어깨를 껴안는다. 처음에는 끄덕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하다 성가시고 께름칙한 마음에 값을 치르고 빠져나왔다.

침대에 누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10시의 석양, 이제야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참 빨리도 간다. 내일은 일요일, 늦게라도 주일미사를 제대로 드리고 출발하자. 이틀 동안 함께였던 정은 언니와도 내일이면 헤어져 각자의 길을 향한다. 먼저 일어나 걷게 될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잠들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니, 이 길은 나를 내일 어떤 놀라움으로 데려가 줄까?


#성지순례#스페인#도보여행#산티아고가는길#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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