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의 국장을 마친 태종은 풍양궁에 칩거했다. 당당했던 태종이 생의 동반자를 잃고 날개가 꺾인 듯 의기소침했다. 옆구리가 시림을 느꼈다. 살아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원경왕후가 떠나고 난 다음에 대비가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동지였다는 것이 새삼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아버지에 항거하여 혁명의 깃발을 들었을 때 병장기를 내주며 격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처형할 때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부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뭔가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을 때 해원(解寃)의 살풀이를 하지 못한 것이 유감으로 남았다.
더욱이 대비가 운명하였을 때 장모인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명빈전(明嬪殿)에 전(奠)을 올리며 오열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송씨는 대비의 모친이다. 그 모습이 사위 잘못 만나 아들 잃고 딸을 먼저 보내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태종은 환관을 불러 송씨에게 날마다 술 두 병씩 내려 주라고 명했다. 마음의 징표다.
풍양궁으로 유정현이 찾아왔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송씨가 제주에 있는 죄인 유해를 거두어오기를 청합니다.”
제주에서 처형되어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고 있던 민무질 민무구의 유해를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제주 안무사에 명하여 배와 양식을 대어주도록 하라.”
제주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민무질 민무구의 유해가 육지로 옮겨져 노모의 손에 의하여 안장되었다. 태종과 처가의 살풀이는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태종 사후, 세종이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병이 났을 때 외가에 거둥하여 문병하는 것으로 부왕의 뜻을 대신했다.
운명은 재천이라지만 몸 둘 바를 몰랐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제일 긴장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이 전의감(典醫監)이었다. 대비에게 전국술(醇酒)을 처방한 것이 전의감이었기 때문이다.
전의감은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며 의학교육과 의학실력을 시험하여 사람을 뽑는 의학취재(醫學取才)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의(醫)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3품 제조를 비롯하여 종6품 의학교수와 30명의 의학 습독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조직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의원 반열에 중인계급이 진출했지만 초기에는 주부(注簿) 이상은 모두 과거 합격자였다. 세조 6년 혜민국에 통합하기까지는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을 합쳐 삼의사(三醫司)라 불렀다.
당대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어의(御醫)들이 대비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전국술을 처방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운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몸 둘 바를 몰랐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최후의 단방 약이었을까? 어느 한 사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어의들이 합의 하에 내놓은 처방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죽었다. 책임 추궁은 없었지만 어의들 모두 전전긍긍했다.
풍양궁에 머물고 있던 태종이 낙천정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좋지 않아 강바람을 쐬기 위해서다. 시야가 확 트인 낙천정에 있으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점점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태종은 시종하는 의원(醫員) 원학이 미덥지 않았다. 태종은 원학을 시켜 전의감정(典醫監正) 정종하를 불러 오도록 했다.
“너의 의술이 매우 능하다 하니 앞으로는 나를 시종하도록 하라.”
평소에 임금의 주치의로 발탁되면 영광의 길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등골이 오싹했다.
“소인의 의술은 제조에 비하면 아직 닦여지지 않았습니다.”
모셔야 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무서웠다. 정종하는 정중히 사양했다.
“양홍달은 너무 늙었다. 네가 맡도록 하라.”
“소인의 의술은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상왕의 시종을 드느니 차라리 죽겠다
정종하가 극구 사양했다. 사양이 아니라 어명을 거역했다. 하지만 태종은 문제 삼지 않고 돌려보냈다. 정종하를 돌려보냈지만 전의감에서 제일 의술이 특출하다는 정종하에게 미련을 거두지 못했다. 이튿날 환관을 보내어 정종하를 불렀다.
그런데 정종하가 부름을 거역했다. 낙천정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대노한 태종이 정종하를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했다.
의금부에서 정종하에 대한 신문이 시작되었다.
“왜 나가지 않았느냐?”
“상왕께서 의약에 명철하시온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하였습니다.”
의약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태종의 박식함에 정종하가 겁을 먹은 것이다. 의원들은 자신이 진시(診視)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환자로 보았다.
비록 품계는 낮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질환에 따라 쓰는 화제(和劑)에도 소신이 있었다. 그런데 태종이 이 약을 써라, 저 약을 써라 간섭하면 치료에 방향을 잃고 책임만 따라오는 것이 두려웠다는 것이다.
스스로 치유력이 있는 인체가 병이 났을 때 도와주는 것이 의와 약이라고 의원은 배웠다. 환자를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모든 약재에는 시간 차가 있는데 그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약재를 바꾸었을 때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원은 사람에게 병이 나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이라 배웠다. 우주의 정기를 담고 있는 인체가 음양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은 보(補)하고 넘치는 것은 사(瀉)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의술이라 믿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환자의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지천명이라 생각했다. 죽음은 인간 영역 밖이라는 것이다.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당치않다는 관념이었다. 이러한 의원들에게 불로장생을 꿈꾸는 군주는 가장 껄끄러운 환자였다.
“상왕의 어명을 거역한 자는 대역죄로 처단할 수 있다. 그래도 나가지 않겠느냐?”
“네.”
의금부 신문관들이 대역죄를 거론하는 것을 정종하는 엄포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권력 가까이 붙어 의원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과오를 저지른 것에 대한 대죄(待罪)였을까? 검은 말을 타고 축석령 고개를 넘었던 일이 씻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끝내 정종하는 상왕전에 나가지 않고 대역죄로 참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