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입구 길을 알려주는 순례표지 비석을 따라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입구 길을 알려주는 순례표지 비석을 따라
ⓒ JH

관련사진보기


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날씨 그냥 맑음, 순례 18일째.
프로미스타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20km.
오전 6시 출발, 오후 12시 도착.


12시쯤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나보다. 소라씨랑 걷기로 약속한 시간이 새벽 6시, 5시가 조금 넘어 짐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어제 샀던 우유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고 캄캄한 길을 걷는다.

이 날은 유난히도 비석이 많았다. 무릎 높이의 돌 위에는 푸른 바탕에 노란 색의 조개그림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길을 따라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찻길 옆을 따라 걷는 지난한 길이었지만 유쾌한 소라씨와 함께 학교, 책, 미래, 꿈, 카미노 그리고 모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 이 작은 마을에 숙소만 세 군데나 된다. 우리들은 오늘 점심을 함께 해 먹기로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엌을 쓸 수 있는 숙소를 찾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의 숙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카리온 순례자숙소 시원한 레몬수 한 잔과 따뜻한 온정의 기억으로 남은 곳
▲ 카리온 순례자숙소 시원한 레몬수 한 잔과 따뜻한 온정의 기억으로 남은 곳
ⓒ JH

관련사진보기


잿빛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방금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레몬향 나는 시원한 음료수를 권하던 곳, 순례자들이 둘러앉아 함께 영적인 나눔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이 있는 곳, 그러나 부엌에는 달랑 전자레인지뿐인 곳. 소라씨와 나는 다른 곳을 향할지 이곳에 짐을 풀지를 두고 고심하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천주교 신자인 나를 위해 그가 배려한 것이었다. “언니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짐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 마을로 나와 오래된 약국에서 햇빛에 익은 피부에 좋다는 알로에 젤과 ‘콤피(Compeed)'라고 불리는 물집보호 밴드를 사고 상점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카트를 끌 수 있는 큰 상점이 반가웠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아차, 전자레인지밖에 쓸 수 없죠, 우리의 신세를 깨닫고 전자레인지에 데울 수 있는 인스턴트 라자냐와 닭 들어간 쌀밥을 고르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어젯밤의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며 식사를 마치고 쉬었다. 숙소에서 알려준 순례자 모임 시간이 가까워졌다. “강요는 아니에요. 시간이 되면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은 시간이 될 거예요”, 수녀님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피곤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마음에 뭉그적거리다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거실과 계단에까지 가득 찬 순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앉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타와 클라리넷, 리코더를 닮은 피리를 불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삶에는 기쁨과 즐거움만큼 아픔과 슬픔이 함께 해’, 삶에 감사하고 또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들을 함께 부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박자에 맞춰 소심한 박수를 치며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

카리온을 굽어보는 분 마을의 성모마리아상
▲ 카리온을 굽어보는 분 마을의 성모마리아상
ⓒ JH

관련사진보기


곧 근처 성당의 미사시간이 되어 오래간만에 미사를 하러 갔다. 전례가 끝난 후 신부님은 특별한 예식으로 순례자들을 초대했다. 성당 한쪽 벽에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간 곳은 사제의 집무실과 닮은 곳이었다.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둘러섰고, 순례자들은 각자의 나라 말로 준비된 예식문을 돌아가며 읽었다. 믿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나약함마저 모두 드리고 이 밤 당신의 품에서 보호받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제는 성반 위의 솜에 알콜 같은 것을 뿌리고 불을 붙인다. 성반 위로 불길이 타들어가고, 나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들이 - 발바닥의 물집과 발목의 시큰거림과 밤의 코고는 소리까지도! - 이 불길과 함께 사그러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신부님은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 하나하나 손을 잡아주며 힘을 전해주신다. 참 특별한 강복이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늦은 밤, 숙소의 1층 거실에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수녀님은 작은 소쿠리에 담긴 별 모양 종이를 하나씩 건네시며 이 별이 당신의 순례의 별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사람들이 들어차 비좁은 실내를 헤쳐 나가며 순례자 한 명 한 명의 이마에 축복을 전하는 수녀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러분들은 내일 이 곳을 떠나 순례를 이어가겠지만 우리들은 이곳에 남아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모두 여러분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줄리아나의 에우나테 성당, 정은 언니의 그라뇽에서의 하룻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그렇게나 기다려왔던 영적 분위기로 충만한 밤이다. 이 밤이 지나면 소라씨는 이른 아침 길 위로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오후에 떠나는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갈 것이다. 갑자기, 버스를 타겠다는 나의 결정이 아쉬워진 밤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다지고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날은 많은 순례자들 속에서 그와의 첫 인연이 닿은 날이었다. 비록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성지순례#도보여행#카미노데산티아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