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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가 끝나고 맞이한 첫 수업시간이었다. 출석을 부르면서 살펴보니 책상에 책도 공책도 내놓지 않은 아이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시험이 끝나면 공부도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요즘 대다수 학교의 풍속도이다보니 그닥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앞자리에 앉은 한 아이가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나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영화 봐요."
"안 돼. 이 시간도 엄연한 수업 시간이야. 그리고 오늘 교장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특별히 강조하셨어. 학기말 시험 끝났다고 영화나 보고 그러지 말라고 말이야."

아이들을 설득하기가 버거울 때는 교장선생님을 팔면 일이 손쉬워진다. 아이들도 힘없는 평교사의 처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하긴 방학을 내일 당장 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너덧 시간은 공부할 시간이 남았는데 그때까지 수업을 안 하고 적당히 넘길 수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시험에 맞추어 진도를 다 끝낸 터라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곤란하다.  

이런 학기말 자투리 시간을 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이때 영어선생인 내가 가장 많이 애용하는 것은 팝송이다. 유명한 영화대사를 모아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다. 가령, 영화 '러브스토리'나 '스파이더 맨'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학생들의 흥미를 끌만하다. 

Love never means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이란 결코 미안하단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The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날도 나는 아이들에게 영화대사 몇 개를 소개한 뒤 <아바>의 'I Have a dream(나에겐 꿈이 있어요)'란 노래를 배우며 수업을 하고 있었다. 먼저 노래를 두 번 들려주고는 노랫말을 번역해주었다.

노랫말은 본래 시다. 아니, 시가 본래 노랫말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어쨌거나 팝송을 가지고 수업을 하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나는 꼭 흥분을 하고 만다. 물론 내가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날 위한 시간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난 시냇물을 건너겠어, 난 꿈이 있으니까)

시는 비밀이다. 그 비밀을 풀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데 어찌 흥분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이들은 나와 다르다. 표정을 보아하니 흥분은커녕 무색, 무취, 무표정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라도 흠뻑 감동해야 아이들에게도 그 감동의 열기가 전염 될 게 아닌가.  

"여러분이 너무 어리면 시냇물을 건널 수 없겠지요. 물살이 세면 물에 떠내려가기도 할 테니까요. 그래서 날 위한 시간, 그러니까 시냇물이나 강을 건너기에 딱 알맞은 그런 시기가 되면 비로소 물살을 헤치고 강을 건너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강을 건너야 내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요. 강을 건너는 그 자체가 꿈을 이루는 과정일 수도 있고요."

여기까지 말하고 아이들의 눈빛을 살펴보니 아직 감동이 전염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중 한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조용히 물었다. 얼마 전에 나랑 한바탕 전쟁(?)을 치른 아이였다.  

"네 꿈이 뭐야?"

"연기자가 되는 거요."
"그럼 강을 건너야겠네?"
"예?"

"지금의 네 모습으로는 곤란하잖아. 넌 외모는 갖추어졌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아직 아니잖아.  훌륭한 연기자가 되려면 얼마나 많이 인내해야 하는데. 자기 기분대로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되고. 남이 해주는 말도 고맙게 새길 줄도 알아야 하고. 그것이 너에게 많이 부족하다는 것 알고 있지?"
"예."

아이가 순순히 "예"라고 대답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에는 한 사람의 안타고니스트(상대 악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악역은 없다. 아이가 변했으니까.

그날도 나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그 아이 차례가 되어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사실은 아이는 대답을 했는데 내가 못 들은 것이었다.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버럭 화를 내며 나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전에도 그렇게 나에게 버릇없이 군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아직 어린 탓이려니 하고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하고, 한 번인가는 눈물이 핑 돌도록 혼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런 일만 아니라면 나와는 썩 사이가 좋은 아이였다. 어쩌면 그런 친밀감이 버릇없는 행동을 유인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었지만 아이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그 기회를 저버렸다.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격분했다. 입에서는 침이 튀겨 나왔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한 아이에게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낸 것은 근래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내가 아이에게 하지 않은 세 가지 행동이 있었다. 욕을 하지 않았고, 손찌검을 하지 않았고, 그리고 아이를 미워하지 않았다. 이미 감정의 고삐를 놓아버린 내가, 그런 나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아이와 격렬한 입씨름을 벌이면서 내 마음속으로부터 아이에 대한 미움을 밀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에게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아이의 잘못된 행동이 그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미움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 생각을 오랫동안 마음에 새기다 보면 아이에 대한 미움을 비켜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화를 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화를 낸 그 순간 아이에 대한 미움이 없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증거가 있긴 있다. 아이가 내 말에 "예"라고 곱게 화답해 준 것,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내가 침을 튀기며 퍼부은 불같은 언어에 미움의 비수가 서려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니 아이를 미워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인격이 부족한 나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그날 아이는 세찬 물살을 가르며 험한 강을 건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아이가 기꺼이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은 그에게 연기자가 되고 싶은 당찬 꿈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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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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