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를 처단하다담살이(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장 부대가 의병을 일으킨 목표는 다음 세 가지라고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밝히고 있다.
첫째 탐학(貪虐 탐욕이 많고 포악한)한 관리와 주구자(誅求者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관리) 근절, 둘째 친일세력(주로 일진회원) 제거, 셋째 일본인 구축(驅逐 몰아서 쫓아냄)이었다. 탐관오리(貪官汚吏)와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매국 무리들은 일본인 못지않게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다.
어느 나라 역사를 보듯, 이들 부패한 탐관오리와 좌고우면(左顧右眄 이리저리 돌아 봄)하며 외세에 빌붙는 무리는 바깥의 적보다 더 무서운 내부의 적이었다. 안규홍 의병장은 앞선 강용언 의병장과는 달리, 부하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군기를 엄정히 하였으며, 선량한 백성들의 재물을 뺏는 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는 담살이 출신답게 가능한 농민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그의 부대 통솔 방침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라남도 통신을 거한즉(따른 즉),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하는 안 아무개가 의병을 많이 모집하여 그 고을 안에 두류하나(주둔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 ‘남도의병’
오랜 농민들의 원한을 풀어주다이런 일들로 안규홍 의병부대는 주민들의 지지와 신망을 크게 얻었다. 담살이 출신 안규홍에게는 의병부대 재원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문덕 법화마을의 지주인 고종 박제현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탐관오리들에게 재물을 빼앗거나 지주들의 소작료나 재산의 일부를 빼앗아 군용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타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들의 의식주를 어찌 이 재원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랴. 안규홍 의병부대는 활동지역 내의 각 면장들에게 일정 금액의 군용금을 할당 협조하는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안규홍은 후원자의 숨은 협조를 비롯하여 탐관오리의 재물 탈취, 농민들의 자발적인 도움, 그리고 각 면장들로부터 거둬들인 군용금 등을 재원으로 대대적인 항일 투쟁을 펼쳤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동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그 첫 번째가 탐관오리들과 토호(土豪)들과 같은 백성들의 암적 존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1908년 8월 25일 장흥 유치에서 가혹한 세금징수원을 응징하고 세금을 탈취한 것을 시작으로 부재지주의 소작료를 빼앗아 군용금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이러한 활동은 부패한 관리와 탐학한 부호들에게 끊임없이 수탈당해 온 오랜 농민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로 안 의병장은 농민들의 환영을 크게 받았으리라.
안규홍 의병부대의 두 번째 활동 목표는 친일세력의 제거로 그 대상은 일진회원이었다. 이들 일진회원들은 나라의 독버섯과 같은 존재들로 의병의 거취를 밀고하거나 외세에 빌붙어 양민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기 때문에 안규홍 의병부대에게 처단되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이들 친일 일진회원들을 가차 없이 총살, 참살하여 사기를 드높였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안규홍 의병부대의 세 번째 활동목표이자 궁극적 투쟁 대상은 일본세력이었다. 1908년 4월 26일, 보성군 조성면 파청 비들고개에서 매복 기습작전으로 일본 헌병 나가또(永戶)와 히라이(平井)를 사살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09년 9월 25일 보성군 봉덕면(현 문덕면) 법화에서 의병장 안규홍과 부장 염재보가 체포되고, 10월 13일 보성군 복내면 묵석산에서 부하 임창모가 전사할 때까지 일본 헌병이나 수비대 등 일군과 맞서 기록에 남은 것만으로도 2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주 근거지는 광양의 백운산으로, 투쟁 무대는 보성,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과 순창, 남원 등 전북 동남부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일제는 1910년의 한일병탄을 앞두고, 그 정지작업으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펼쳤다. 이 작전은 특히 전남지방 의병을 뿌리 뽑기 위한 의병 초토화 작전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일제는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물샐틈없는 포위선을 구축하였다.
일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 옥죄어 오자 그동안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해온 안규홍 의병부대도 동요하여 투항하는 부하들이 속출했다. 그러자 안규홍 의병장은 1909년 9월, 마침내 해산명령을 내렸다.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천운(天運)이 일정치 못하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하다.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지경에 있다. 게다가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이 미치고 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여러분은 각자 잘 계획하여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라.”
우리 의병사에 금자탑을 세우다1909년 9월 25일, 안규홍 의병장은 부장(副將)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부하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체포되거나 투항하기도 하였다. 혹은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안담살이 의병의 해산과 의병장 안규홍 등 지도부의 체포는 남한대토벌작전의 종료를 의미하였다. 이 작전이 끝난 뒤, 일본군은 안규홍을 체포한 보병 제2연대 제8중대를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부대의 하나로 표창하였다.
비록 안규홍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와해되었지만, 이 땅에 가난한 농민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평민 중심의 의병부대로 우리 의병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일군에 체포된 안규홍은 광주에서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뒤 이듬해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순절하였다. 그때 안규홍 나이 서른세 살로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순절을 애석히 여겼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유해를 반장치 못하다가 1923년에야 양자 종련이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에 모셨다.
지하에서 원한이 되리라
우리 일행은 허름한 안 의병장 묘소에 절을 드린 뒤 씁쓸히 하산하고는 곧장 예당의 한 밥집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들었다. 밥상머리에서 후손 병진씨는 집안내력을 얘기했다.
안 의병장은 미혼이라는 기록과는 달리, 결혼하였으나 후손이 없어서 이복형 규태의 둘째 아들 종련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는데, 그분이 바로 병진씨의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종련씨는 일제 등쌀에 살 수가 없어 이 마을로 피신 와 정착한 셈이라고 하였다.
안규홍 의병장의 부인은 청상(靑孀)이 된 후, “그때 당시 홀엄씨들이 남몰래 보쌈으로 가듯이 벌교 아무개 마을로 개가를 했으나, 거기서도 후손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 할머니가 출산을 못하는 체질이었나 보다”고 병진씨는 말하면서, 그 할머니가 아흔이 넘도록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묘소는 이장하지 못하였으나 제사는 자기가 모신다고 하였다.
나는 일행보다 점심을 빨리 먹고 셈을 하고자 주인을 찾았더니 병진씨가 이미 계산을 하였다고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을, 강원도에서 예까지 와서 하시는데 노자는 보태 드리지 못할망정 내 어찌 밥 한 끼 대접치 못하겠소.”
병진씨의 말이었다.
“어따메 전라도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지 않은께 가만있으시오.”
고영준씨가 뒤따라 나오면서 인사를 받으라고 하였다. 수저를 놓은 뒤 거기서 가까운 비들고개에 있는 파청 승첩비로 갔다.
오호라, 공의 충성은 해와 별을 꿰었고 의기는 골수를 메웠다. … 애석하다. 황천(皇天 하늘)이 도우지 않아 마침내 흉측한 무리를 말끔히 소제하여 나라의 터전을 회복치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었으니 지하에서 원한이 되리라.
- <파청승첩비문> 가운데 안규홍 의병 부대의 수많은 전적지를 도저히 다 둘러볼 수 없는 형편이라, 안 의병장이 담살이를 하고 창의의 깃발을 날린 법화마을의 동소산과 가장 치열했던 전적지 서봉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다행히 두 곳 모두 광주로 돌아가는 길섶에 있다고 하였다.
안병진씨는 동네 초상으로 바쁜 듯 하여, 고영준씨가 길을 자세히 물어 어림잡고는 안병진씨와 버들고개에서 헤어진 뒤 우리 일행은 서봉산이 있는 진봉리로 달렸다.
참말로 '엿' 같은 세상이다
보성에서 광주로 가는 18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몇 차례 물은 끝에 복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진봉리를 찾고는 서봉산을 확인하였다.
이 산들은 안규홍 의병장이 담살이를 할 때 나무하러 다니던 산으로 그가 지리에 매우 밝은 곳이었다. 하지만 기껏 낫이나 죽창, 화승총이나 천보총 등, 재래무기로 일군의 최신식 무기에 당할 수 없어 이곳 전투에서 일군 2명 살상에 아군 25명이 순절한 큰 희생을 치른 곳이었다.
썰렁한 마을에서 온 마을을 뒤지다시피 간신히 주민을 찾아 서봉산을 확인한 뒤 아직도 멧부리에 떠돌고 있을 이름 없는 의병의 혼령에게 묵념을 하고는 발길을 법화마을로 돌렸다.
다시 광주로 가는 18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자 곧 문덕면사무소가 나오고, 거기서 우측 주암댐을 끼고 달리자 동산리 법화마을이 나왔다. 안규홍 의병장이 자란 마을이요, 20여 년 간 담살이하던 마을이었다. 안 의병장의 집터라도 알아보고자 주민을 찾았으나 집집마다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만 그런 게 아니라 진봉리에서도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산골도 그렇다. 요즘 시골에는 어디나 사람이 없다. 몇 집을 수소문한 끝에 한 집 섬돌에 신발이 여러 켤레 놓여 있기에 “계십니까?”라고 소리치자 반갑게 한 주민이 나오셨다.
안 의병장 집터를 묻자 마침 오늘이 혼인식한 뒤 집안 식구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뜰 수 없다고 하면서 개천 복개한 끝 10여 평 공지가 바로 안 의병장의 토담집이었는데 뜯겨 버렸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그가 가르쳐준 곳으로 가서 허망하게 공터만 보고는 차머리를 돌렸다. 단군 이래 최대 도적도, 친일파 언론인 사주도 아방궁을 짓고 살고, 법을 짓밟고 거짓말을 법먹듯이 하는 시정 잡배도 고래등 같은 대궐에서 사는데, 담살이 의병장 토담집은 흔적도 없다. 훈장 출신으로 제자들이 보는데 욕은 할 수 없고, 참말로 '엿' 같은 세상이다.
광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묵직한 피로와 함께 내 귀에는 김남주의 <노래>가 들려왔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 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덧붙이는 글 | 다음 회는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전적지 순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