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해가 바뀔 때마다 해 보던 다짐들이 왠지 민망했다. 누구 보라고 하는 다짐이 아니니 드러 내놓고 하진 않았지만, 잘 지키지도 못하는 다짐들을 올 해 또 반복하려니 스스로 자신에게 낯이 뜨거워 밍기적 밍기적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뜻하지 않은 새해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일지 만들기 작년 생활일지에서 남은 종이를 잘라내서 구멍을 뚫고 있다.
일지 만들기작년 생활일지에서 남은 종이를 잘라내서 구멍을 뚫고 있다. ⓒ 전희식

작년 말에 누리터서점에 신청한 책이 한 보따리 왔는데 제일 먼저 송경용 신부님의 <사람과 사람>을 읽어 나가다가 너무도 죄송스런 마음이 들어 책장을 계속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런 분의 책을 그냥 맹숭맹숭 읽는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삶과 생각이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떠 오른 생각이 있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올 해 생활일지였고, 다른 하나는 전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보고 왔던 작은 상수리 나무였다.

 

새해 달력은 물론 일지도 못 구하고 있던 차에 아는 분께 회사에서 나오는 일지가 여분이 있으면 구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었는데, 가능하다고 했던 기억이 나면서 일지 하나라도 괜히 축내는 인간이 되지 말자 싶었던 것이다.

 

잘 보관하고 있던 1995년도의 생활일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만든 일지인데 굵은 쇠로 종이를 꿰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만 새로 끼우면 재활용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표지도 튼튼한 가죽으로 만들어 감촉도 좋고 해지지도 않았다.

 

생활일지 연이어 쓸 수 있는 생활일지에 종이를 끼워 넣고 있다.
생활일지연이어 쓸 수 있는 생활일지에 종이를 끼워 넣고 있다. ⓒ 전희식

그 중 제일 돋보이는 것은 안철환 이사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24 절기력>이었다. 1년을 24절기로 나누어 농사력을 만든 것이라 절기에 따른 농사요령이 잘 나와 있고 뒤에 실려 있는 각종 '유기농업 재배력'과 생명단체나 환경단체의 연락처는 여전히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일지들이 이처럼 뒤에는 필요정보들이 붙어 있는데 지도나 지하철 안내도 등은 여전히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다 버리고 새 일지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귀농운동본부의 일지 크기에 맞게 작년에 쓴 일지에서 종이 남을 것을 잘라내고 펀치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이 여섯 개나 되어서 정확한 위치를 자로 재서 뚫는데 한두 번 엇갈렸지만 곧 정확하게 구멍을 뚫어내는 재미가 있었다.

 

생활일지 지난 해의 연락처를 옮겨 적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생활일지지난 해의 연락처를 옮겨 적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 전희식

제일 편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1년 동안 적어 놓은 연락처들이었다. 매년 연락처를 옮겨 적느라 애를 먹었는데 구멍만 뚫어 끼워 넣으니 끝이었다. 연락처를 적는 난이 다 차면 종이를 필요한 만큼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몇 년이고 이어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는 올해 쓴 일지들은 빼 내고 종이만 새로 끼워 넣어 쓰면 될 것이고 빼 낸 일지들을 잘 보관해 두면 좋은 개인 역사책이 될 것도 같았다.

 

일지의 맨 앞에 있는 월별 기록장은 엑셀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크기에 맞게 만들었다.

 

월별일지 생활일지 맨 앞에 붙이는 월 별일지는 엑셀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월별일지생활일지 맨 앞에 붙이는 월 별일지는 엑셀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 전희식

접히는 부분에 여백을 충분히 주고 인쇄를 했더니 한 번에 성공이었다. 내 마음에 딱 맞는 모양새로 만들어 넣으니 크게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떠 오른 생각에 따라 산으로 갔다.

 

당시에도 누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었는데, 이유야 어쨌든 나무를 잘록하게 파고 들어간 나일론 끈을 잘라냈다. 아예 문구용 면도칼을 가지고 가서 의사가 수술하듯이 나무가 안 다치게 조심스레 한 올도 안 남기고 나일론 끈을 풀어 낼 수 있었다.

 

다시 나무가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졸린 나무 졸려 있는 나무. 나일론 끈이 나무 깊숙이 들어가 있다.
졸린 나무졸려 있는 나무. 나일론 끈이 나무 깊숙이 들어가 있다. ⓒ 전희식

이렇게라도 하고 나니 비로소 새 해를 맞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풀린 나무 나일론 끈을 풀었다. 최대한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풀어 낼 수 있었다.
풀린 나무나일론 끈을 풀었다. 최대한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풀어 낼 수 있었다. ⓒ 전희식

#일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