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고 분한 마음을 삭이다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은 나주 사람으로 본관이 경주다. 형 김태원의 본명은 준(準)이요, 자는 태원(泰元)이며, 호는 죽봉(竹峰)이다. 아우 김율의 호는 청봉(靑峰)이다. 이들 형제는 전남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에서 형 태원은 1870년, 아우 율은 1881년에 태어났다. 형 태원은 벼슬이 참봉에 이르러 사람들이 ‘김참봉’이라 불렀다. 그는 얼굴이 빼어났으며 글과 글씨를 잘 썼다. 아우 율(聿)은 성균관 박사처럼 박학다식하다고 하여 ‘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1905년 오적들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이들이 일본의 힘을 빌려 나라를 그르치고 있다는 사정을 듣자, 김태원은 갈마지 집에서 문을 닫고 분한 마음을 삭이며 지내다가 하루는 마을 뒷산 국사봉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토적(討賊)의 길에 나설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태원은 그날 밤 아우를 찾았다. 두 사람은 불을 밝히지도 않고 마주 앉아 시국을 얘기하였다. “너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만, 나라 형편이 이제는 이대로 볼 수가 없구나.” “형님, 저도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무엇이 바르고 그른 줄을 압니다.” 의로운 형이요, 아우였다. 그 자리에서 형제는 이 땅에 몰려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왜적을 토벌하기로 맹세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김태원은 집안어른 김돈(金燉)을 찾아갔다. “제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어르신의 조언을 들려주십시오.” “내가 자네 같은 의로운 선비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 듣자하니 장성에서 성재(省齋)가 의병을 규합한다 하고, 창평에서 녹천(鹿川)이 군사를 모집하여 의로운 기세를 널리 떨치고 있다고 하네.”
군사와 백성은 바로 물고기와 물이다 “저도 성재 선생과 녹천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군사는 언제나 주위의 호응을 얻어야 하네. 물 없는 물고기가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군사와 백성은 바로 물고기와 물 사이와 같은 것이네.”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세력이 고립되면 적을 부수기도 어렵고, 힘이 합하여지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법일세. 내가 들은즉 장성의 성재는 인물이 걸출하고 충성되며 신의가 있어 믿을 만하다고 하네.” 김돈은 김태원에게 독자적인 거병보다는 성재 의병부대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김태원이 왜적을 무찌르고자 거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유림을 통해 함평, 나주, 광주 지방에 알려지자 조경환, 강길환, 조덕관, 유병기, 양상기, 오수찬, 김찬문, 김해도 등의 선비가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가 의로운 선비들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모인 것이다. 김태원은 자기를 따르는 의병을 규합하여 장성의 기삼연 의병진을 찾아갔다. “저희는 함평에 사는 백면서생입니다. 거두어 주신다면 온 힘을 다해 왜적을 치겠습니다.” “참으로 장하구려. 우리 백성 모두가 구국토적(救國討賊)에 나선다면 꼭 이길 수 있으리다.” 이로써 김태원은 기삼연 부대의 선봉장이 되었다. 당시 성재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는 이 고장 우국선비가 거의 모두 참가하고 있었다. 통령(統領)에는 김용구, 참모(參謀)에 김엽중, 김봉수, 종사(從事)에 김익중, 서석구, 전해산, 이석용, 선봉(先鋒)에 김태원, 중군(中軍)에 이철형, 후군(後軍)에 이남규, 운량(運糧)에 김태수, 총독(摠督)에 백효인, 감기(監器)에 이영화, 좌익(左翼)에 김창복, 우익(右翼)에 허경화, 포대(炮隊)에 김기순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전라북도의 진안, 임실, 순창, 고창에서부터 남도의 장성, 남평, 나주, 함평에 이르는 각 고을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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