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흑석동. 왼쪽 저 멀리 솟은게 63빌딩이고, 앞이 한강이다.
 흑석동. 왼쪽 저 멀리 솟은게 63빌딩이고, 앞이 한강이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누구 작품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림이 무척 재미있다.
 누구 작품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림이 무척 재미있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지세를 예부터 최고 명당 자리로 평가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이 대표적인 배산임수다. 앞은 한강이고 뒤는 달마산이다. 옆엔 동 전체 크기와 맞먹는 국립현충원, 또 다른 한 쪽은 중앙대학교다. 동은 산으로 완벽하게 둘러싸여 있다.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땅. 이런 땅이 오랫동안 개발 바람에서 비껴나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흑석동에서 20년 이상 된 주택은 50%가 넘는다. 기와집을 쉽게 볼 수 있고, 슬레이트 지붕집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산길을 따라 난 골목길 또한 변화무쌍하다. 게다가 곳곳에 박혀 있는 나무전봇대들. 1970~80년대 드라마 세트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3만 명이 넘게 모여 사는 동네였지만 이 곳을 지나치는 지하철은 없었다. 상도역과 동작역에선 1㎞ 가량을 걷거나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어쩌면 불편한 교통이 개발 바람으로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유독 이 곳을 조용하게 놔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2005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서울시는 2005년 8월 흑석동 27만여평을 뉴타운으로 지정했다. 마침내 거센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말엔 흑석동에 지하철역까지 생긴다. 찾아가기 힘든 곳 그래서 조용했던 동네 흑석동은 이제 곧 과거가 된다.

흑석동이라는 이름은 흑석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검은 돌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흑석동 나루터였던 동재기나루터도 돌과 관계가 있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넘어가는 강변 일대에 구리빛 돌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검은 돌과 구리빛 돌…. 색깔있는 돌들이 동네에 많았다는 게 이채롭다.

흑석동에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산길을 통해 갈 수도 있고, 중앙대를 지나 갈 수도 있다. 평지쪽 길은 상도터널을 지나는 것이다.
 흑석동에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산길을 통해 갈 수도 있고, 중앙대를 지나 갈 수도 있다. 평지쪽 길은 상도터널을 지나는 것이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한강 북쪽에 살고 있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흑석동에 가려면 1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 몇 가지 방법으로 흑석동을 찾았다. ①안양천-한강북쪽-양화대교-여의도-노량진역-찻길-흑석동 ②홍제역에서 찻길을 따라 서대문구청-홍대입구역-합정역-양화대교-여의도-신길역-신풍역-보라매역-신대방삼거리역-장승배기역-상도역-중앙대-흑석동 ③지하철에 자전거를 싣고 상도역 하차-중앙대-흑석동 등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상도역에 도착해선 상도터널을 통과해서 가기도 하고, 찻길과 한강자전거길을 섞어서 가기도 했다. 그 곳을 그냥 스쳐가기만 한 적이 있는가 하면, 입구만 살짝 구경하고 간 적도 있다. 이 곳은 본 곳이다 싶어 기대감 없이 살짝 발을 들여놓았다가 전혀 다른 동네를 만나기도 한다.

높은 데서 바라본 흑석동은 무척 아름다웠다. 밤에 본 흑석동은 또 달랐다. 2007년 12월과 2008년 1월 세 차례 걸쳐 사진기를 갖고 그 곳을 찾았다.

집과 집이 모이면 길이 생기고...

자세히 보면 기와집구조가 다 다르다.
 자세히 보면 기와집구조가 다 다르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메주를 처마 밑에 매단 집. 아직도 서울엔 장을 담그는 집이 있다.
 메주를 처마 밑에 매단 집. 아직도 서울엔 장을 담그는 집이 있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흑석동은 1-3동 등 세 개 동이다. 흑석1동이 제일 서쪽, 흑석2동이 가장 동쪽이다. 더 나아가면 동작동이다.

흑석동은 교통편이 애매하다. 상도역에서 내려 800m 정도 걸어야 중앙대에 도착하고, 여기서 학교를 건너가야 흑석동에 이른다.

산길을 좋아한다면 중앙대 뒷산길을 통해 갈 수도 있다. 제법 산책할 만하다. 한 번은 자전거를 끌고 산을 넘었다. 산림욕도 하고 운동도 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평지길을 통해 흑석동으로 가고자 한다면 상도역에서 상도터널을 지난 뒤, 차도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길은 쉽겠지만 시끄럽다. 공기 또한 나쁘다. 길도 쉬우면서 조용하고 공기까지 좋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불가능에 가깝다.

흑석동에선 꼭 지붕 구경을 해볼 일이다. 중앙대 옆 담장 아래 기와집 마을이 많이 남아 있다. 1자형, ㄴ자형, ㄷ자형 등 기와집 모습이 참 다양하다. 기와 색깔도 다채롭다. 검은색, 파란색, 녹색 등 색깔은 다르지만 잘 어울린다.

기와지붕도 있지만 슬레이트 지붕도 많다. 어떤 지붕엔 물이 새지 않도록 널판지나 장판을 올려놓고 돌로 눌러 놓았다. 눈이 쌓인 지붕도 예쁘다. 기와지붕은 계절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편이다. 가을엔 낙엽이 떨어져 지붕을 덮는다. 겨울엔 눈이 덮는다.

담은 또 어떤가. 돌담이 있고 어떤 집 담은 목책이다. 나무로 얼기설기 벽을 쌓아 바람이 통하고 안이 슬쩍슬쩍 보이게 만들었다. 밖과 안을 막지만 숨통까지 막지는 않았다. 마당 안이 보인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 장독들이다.

어떤 집 처마엔 메주가 매달려 있다. 시골에서도 요즘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는 집을 보긴 힘들다. 거리가 있으니 메주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메주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처마에 달린 메주는 여섯 개. 저 메주로 만들 수 있는 장의 양은 얼마나 될까. 종로구 홍은동에서도 저 같은 메주를 본 적이 있다.

가지에서 계속 가지가 나는 것 같은 갈래길 골목. 오른쪽 밝은 불빛 쪽으로 가면 또 양갈래로 갈라진다.
 가지에서 계속 가지가 나는 것 같은 갈래길 골목. 오른쪽 밝은 불빛 쪽으로 가면 또 양갈래로 갈라진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골목골목, 만남과 헤어짐이 잇닿아 있구나

집과 집, 또 집과 집이 만나고, 반대편에 또 집과 집이 있다면 그 사이는 길이 된다. 시멘트로 매끈하게 바른 바닥이 있는가 하면 보도블럭을 깐 곳도 있다. 어떤 집은 대문에서 집 입구까지 길을 냈다. 담이 없는 그 집 길은 바깥길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바깥길은 계단이다. 계단마다 화분이 하나씩이다.

흑석동 골목길엔 화분이 많다. 빈 터마다 화분이다. 심지어 담 위에도 화분을 올려 놓았다. 화분에만 꽃이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배기구를 갖고 꽃 그림을 그렸다. 배기구 주변이 꽃잎이다. 그러고 보니 배기구가 해바라기꽃 같다.

어떤 집 담이 눈길을 끈다. 빨래가 널려 있는데, 자세히 보니 줄이 걸려 있는 곳이 기린 목이다. 재치있는 그림이 싱긋 웃게 만든다. 지붕은 슬레이트지만 처마 밑엔 근사한 등을 달았다. 이런 작은 꾸밈이 집을 훨씬 근사하게 만든다.

가끔씩 담엔 누굴 보라고 하는지 낙서가 있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을 꾸짖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 새로운 문구가 나온다. 흑석동에서 본 새로운 문구. '개똥 좀 치우고 가세요.'

재밌는 골목길 중에 계속 이어지는 갈래길이 있다. 한 갈래기를 지나면 또 갈래길이 나타난다. 이런 길은 굉장히 복잡하다. 한 갈래길을 지난 다음 다시 처음 갈래길로 돌아와 반대편 갈래길을 봐야 한다. 이렇게 길을 찾아야 하니 아무래도 많이 걷게 된다. 길은 복잡하지만 이곳저곳 트인 곳이 많아 '툭' 트인 느낌이다.

골목길은 만남과 헤어짐을 잘 보여준다. 양갈래길은 아래서 올라갈 때는 헤어짐이다. 허나 반대로 내려갈 때는 만남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동전의 양면이란 것을 갈래 골목길을 보면서 생각했다.

메주 달린 처마, 옹기종기 장독들, 곳곳이 나무전봇대

달빛길 쪽에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달빛길 쪽에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조정래

관련사진보기


나무전봇대. 흑석동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무전봇대. 흑석동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조정래

관련사진보기


"스무 살 시절, 내가 흑석동 산꼭대기집에 살 때에도 큰 물난리가 있었다. 비는 억수로 왔고 간혹 그쳤다가 또 억수로 퍼붓기를 1주일이었다. 창가에 서면 빗발 사이로 성난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텔레비전에서는 한강다리가 넘친다고 걱정들이었고 가재도구며 소 돼지까지 떠내려오는 판이었다. 그렇지만 산꼭대기집은 안전했다. 서울이 다 떠내려가기 전에는 끄떡없을 거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떠내려가는 거라면 그거야 억울할 것도 없었다. 산꼭대기에 살아서 좋은 게 이런 거지 뭐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김한길. <동아일보> 1995년 8월 30일

1964년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통일사회당을 만들어 위원장을 지낸 김철. 자본주의도 비판했지만 공산주의 계급독재도 비판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치인이었다. 당시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다.

1970년 통일사회당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야당 연합을 하면서 후보를 사퇴했다. 유신헌법 반대 투쟁을 펼치며 정부와 계속 대립각을 세웠으나 1980년 신군부의 입법회의에 참여해 오점을 남겼다. 80년대에는 사회주의민중협의회를 만들었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주의 흐름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흑석동 중앙대 뒤 산꼭대기집에 살았던 김철의 아들이 소설가이자 정치인인 김한길이다.

중앙대 뒷산 언덕길 쪽엔 오래된 집이 여러 곳 남아 있다. 여기서 길을 건너 달빛길 쪽으로 가면 오래된 집들이 꽤 많다. 꼭대기쪽엔 대부분 빈 집이다.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주인이 집을 팔고 떠난 집들이다. 동네서 보이는 전봇대가 대부분 나무다. 오랫동안 개발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다는 것을 나무전봇대가 증명한다. 종로구 충신동에도 나무전봇대가 많은 편이다.

이 곳 집엔 대부분 딱지를 붙여 놓았다. '위험시설, 접근·출입 금지'라는 표시다. 집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설명이다. '벽에 금이 있으니 기대지 마시오'라는 표시도 있다.

꼬꼬댁꼬꼬꼬~ "내년엔 없어지니 열심히 사진 찍으세요"

이 곳에서 보는 흑석동은 무척 아름답다. 저 멀리 보이는 집들이 한강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왼쪽 멀리 우뚝 서 있는 63빌딩은 키큰 학생이 담 너머로 우두커니 보는 것 같다.

아직까지 한강 주변에 큰 빌딩이 없어 시선이 탁 트여 있다. 이렇게 주변 경치를 다 같이 볼 수 있는 것 또한 또 다른 공평함일 것이다.

흑석동 꼭대기 마을에서 닭을 산에 풀어놓고 키운다.
 흑석동 꼭대기 마을에서 닭을 산에 풀어놓고 키운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더욱 놀라웠던 장면은 어디서 닭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가봤다니 야산에서 닭이 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닭집은 있었지만 방목 상태였다.

시골에 있는 아는 사람 집이나 친척 집에 가봐도 닭장에 넣어서 키운다. 그런데 방목이라니. 닭들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눈 앞에서 '푸드득' 거리며 날기도 했다.

방목해서 키운 닭의 알은 값을 더 쳐주기도 한다는데, 이 곳에서 난 달걀을 판다면 아주 톡톡히 받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닭이 제 멋대로 뛰어놀 수 있는 곳도 이 곳이 담 낮고 층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들어오면 이런 풍경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염없이 풍경들을 쳐다보니 있으니 동네 주민 한 분이 말을 건넨다.

"내년이면 다 없어질 곳이니 열심히 사진 찍으세요."

34년 터줏대감의 걱정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디 간대요?"

흑석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은 심훈이다.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의 저자로 유명한 심훈은 1910년 흑석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영화인이었던 심훈은 삶이 영화였던 사람이다.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된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퇴학, 1920년 중국 망명, 1923년 귀국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 연극부 활동, 1924년 부인과 이혼, 1925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탈퇴, 1926년 동아일보사에서 해직, 1927년 영화 <먼동이 틀 때> 연출 단성사 개봉, 1928년 <조선일보> 입사, 1930년 안정옥과 재혼,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 당선….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고 했던가. 심훈의 삶은 길지 못했다. 1936년 9월 16일 3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도중 함께 다니던 정래가 목이 마르다고 한다. 그래 근처 이름없는 가게에 들어갔다. 우연찮게 들어간 가게는 조용했다. 주인에게 말을 붙였더니 흑석동 역사가 줄줄줄 나온다.

여기에 산 지 딱 34년째란다. 올해 나이 61세. 충북 청양에 살다가 올라왔으니 서울이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주인 이름은 최연자씨. 이 곳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벌써 보상을 받고 집과 땅을 넘겼다. 적지 않은 돈이다. 헌데 두 가지가 걱정이다.

"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살아요. 그 분들은 어디 간대요? 집을 거저 준다고 해도, 아파트라면 한 달에 30만원씩 관리비를 내야 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내요. 젊은 사람은 좋겠죠.(젊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파트를 짓고, 나이 드신 분들 사는 곳엔 주택 개량 정도 해서 살게 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죠. 그게 좋죠. 아파트가 들어와서 동네가 번잡스러워지면 그 분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저도 걱정이에요. 보세요. 뒤에는 산이고 앞엔 한강이 이렇게 잘 보이는 땅…. 서울에 또 있어요?(한남동 정도가 해당되겠죠.) 요즘 양수리 쪽(한강 상류 쪽)을 알아보고 왔는데, 우리 남편이 떠나기 싫다고 하네요."

최연자씨는 동네 소식을 다 꿰고 있었다. 김한길씨네 집은 어디 가면 볼 수 있고, 또 조선일보 사주인 방우영씨 집은 어디 있으며, 국립현충으로 넘어가는 산길 입구가 어디인지 등등 흥미로운 정보를 줄줄 꿰었다. 전 프로권투 챔피언 박종팔씨가 살았던 이야기 등 마을 사랑방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아마 탤런트 송일국이 사는 곳을 물었어도 알려주었으리라.

배산임수의 명품경치는 모두다 나눠갖자

동재기나루터. 한강자전거길을 달리다 보면 만난다.
 동재기나루터. 한강자전거길을 달리다 보면 만난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조선시대 흑석동은 교통의 요지였다. 동네 앞 동재기 나루터는 수원 이남 삼남(충청 영남 호남) 지방과 서울을 이어주던 나루터였다.

1917년 한강대교가 놓이면서 동재기나루터는 그 기능을 다리에 넘겨주었다. 여름 피서지로 인기를 얻었던 한강대교는 자살터로 유명했다.

1950년 서울을 침공한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이승만 정부가 이 다리를 파괴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수장된 비극의 다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뒤 지하철이 다니지 않고,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사실상 육지 속 섬이 됐다. 역사는 항상 바뀌는 것이니 한강수상택시가 물길을 잇고, 올해 말 흑석동역(역명 미확정)이 뚫린 뒤에는 흑석동이 또다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순 없겠지만, 배산임수의 명품경치를 몇 사람만 독점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태그:#골목, #흑석동, #자전거, #미니벨로, #심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