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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6일 목요일, 날씨 구름 후 맑음, 순례 34일째.
사모스에서 바르바델로스까지, 16km.
오전 7시 출발, 오후 2시 반 도착.


새벽같이 일어나 어두컴컴한 숙소에서 짐을 꾸리다 어제 수국을 담아둔 물병을 바닥에 엎지르고 말았다. 아침부터 걸레를 들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내가 할 테니까 짐부터 싸렴” 하는 오스피탈레로 아저씨가 고맙고 더 미안하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나니 청소라도 한 것 같다. 숙소를 나서는데 “잘 걸어!” 하며 꼭 안아주시는 아저씨가 어제는 ‘왜 자꾸 만지작거리지?’ 하며 시큰둥하기만 했는데…, 아저씨,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사모스를 따라 ‘사리아(Sarria)'로 이어지는 길은 왼편으로 강을 끼고 캠핑장이며 유원지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고기라도 한 근 사와서 바비큐를 하며 냇가에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겠다. 그러나 이른 아침 ‘추워~’를 연발하는 내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토마토 물고 올브랜을 사료 먹듯 우적우적 씹으며 새가 울고 강이 재잘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방이 조금 무서웠다.

그렇게 한 두 시간쯤 걸었을까, 눈앞에 파라솔을 내 건 작은 바가 보였다. 카페 콘 레체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마음을 다잡고 조금 있다가 사리아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만끽하기로 했다. 몇 십 발자국 앞에서 한 떼의 순례자가 바에서 내쫓기듯 후다닥 뛰어나와 길 위에 올랐다. 고개를 갸우뚱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낯익다. 발걸음을 조금 서둘러 다가갔다. 혹시? “너, 산티니?” 하고 큰 소리로 불렀더니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녀석들이다.

“오래간만이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갑작스러운 볼 인사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것이 여전하다. 베가 데 발카르세에서 ‘행복한 담배’의 유혹에 화들짝 놀라고 도망치듯 그들을 떠나 걸은 지 딱 사흘만이다. ‘다시는 못 만나겠지, 재미있지만 위험한 녀석들!’ 하고 이름표를 탁 붙이고 기억 속에 접어둔 것이 엊그제인데…, 반갑다며 같이 걷자고 하는 그들이 조금 어색하면서도 많이 고마웠다. 한 시간쯤을 그들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왔다.

“우린 바로 사리아쪽 길로 걸었어. 오르막이 심해서 어제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사리아까지는 못가고 방금 나왔던 바의 숙소에서 쉬었어. 나도 발을 좀 다쳤고, 산티도 다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야.”

“나는 사모스에서 하루 지내고 왔어.”
“그래? 가고 싶긴 했지만 좀 돌아가는 길이라…, 어땠니?”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저 좋았다고 말했다. “좋았다니 나도 좋아!” 하며 웃어주는 그의 걸음이 심상치 않았다. “많이 힘들어 보여” 했더니, “우리 주치의 세바스가 테이핑을 해 주어서 괜찮아. 그런데 많이는 못 걷겠다. 우린 사리아에서 쉴 거야” 한다.

“사리아, 재미있을 것 같아. 숙소도 많은 것 보면 꽤 큰 곳인 것 같던데….”
“그렇진 않을 거야. 작은 동네야. 100킬로미터 이상 걸으면 콤포스텔라를 받을 수 있는 것 알지? 사리아는 산티아고로부터 111킬로미터 떨어진 순례길 마지막 도시이기도 하고 그곳에서부터 걸으면 증서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많은 순례자들이 시작하는 곳이야. 그래서 그 작은 곳에 숙소가 몇 개나 붙어 있지.”

“그래? 내가 시작한 생장피드포르가 대표적인 순례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다르네.”

앞으로 111킬로미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거리
▲ 앞으로 111킬로미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거리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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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현듯 레온에서 만난 일본인 미도리씨가 발렌시아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말을 건넸더니,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도 세 번째로 큰 도시야. 특히 아시아 이민자들이 많아. 중국 사람들도 많고, 일본 사람들도 많지. 나도 우리 동네에서 중국음식점을 자주 가는 걸.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겠네” 하고 짧은 동네홍보를 전한다.

“내가 4가지 말을 할 수 있다고 했지?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그리고 발렌시안. 스페인어는 하나가 아니야. ‘카스티야노(Castillano)'라고 해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가 있지만, 그 밖에도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딸루냐 지역에서는 ‘카딸란(Catalan)’ 이라는 언어를 쓰고, 내가 사는 발렌시아에서도 ‘발렌시안(Valencian)’이라고 하는 말을 써. 카딸란과 발렌시안은 거의 같다고 봐도 되지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갈리시아에서는 ‘가예고(Galego)'라고 하는 말을 써. 좀 복잡하지? 또 있어. 북동쪽의 바스크에선 ’바스크(Basque)' 말을 하고!”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같이 와인을 마셨던 그날 밤(재미있었지!), 세바스가 화냈던 것 기억해? 그 때 우리 옆에 있었던 여자들은 카딸루냐에서 온 사람들이었어. 발렌시안을 할 수 있는 내가 있어서 그 사람들이 카딸란으로 말했거든. 그래서 안달루시아에서 온 세바스와 마드리드에서 온 산티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거야. 카스티야노로 말할 수 있는데도 굳이 카딸란을 써서 알아듣지 못하게 했던 게 화가 났던 거지. 별 이야기는 없었지만.”

후두둑 쏟아지는 스페인 지역사정을 멍하니 듣고만 있어도, ‘투우와 플라멩코의 나라’ 라고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에 이 나라는 너무나 광활하고 다양한 색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북부를 걷고 있는 내게 스페인은 머릿속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과는 너무 다른 곳이었다. 스페인에서 한 달 정도를 걷다 보니 조금씩 느껴지던 것들이 그의 설명을 통해 밝아지기 시작한다.

“네가 우리 동네에 오면 재미있을 텐데, 꽤 재미있는 곳이 많거든. 나도 몇 년만에 돌아온 셈이라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 말야. 만약 기회가 되면 꼭 들러봐! 내가 안내할게.”

설령 외국인 접대용 빈 말이라 하더라도 권하는 제안이 썩 나쁘지 않다. “응, 나도 계획이 다 바뀌어서 산티아고에서 생각을 좀 해 볼 참이라서 만약 그렇게 되면 연락할게” 대꾸하고 길을 걸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주고받다 무심코 “저 왕관꽃! 여기서 처음 봤어. 색이 참 예쁜 것 같아” 하고 길을 걷는데 어느새 함께 걷던 이가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들판 앞에서 멈춘 채 풀섶을 이리저리 살피다 연분홍빛이 소담스러운 꽃 한 송이를 꺾어 걸어온다. 고개를 갸우뚱 하고 쳐다보니 내 지팡이에 꽂아주고는 “이게 너한테 어울리겠어, 선물” 하고 웃고 만다. 산티와 세바스도 함께 웃으며 부지런히 길을 걷는다.

사모스의 오스피탈레로 아저씨가 들려준 연두색 빨랫집게에 길바닥에서 주운 탐스러운 수국과 친구가 꺾어준 꽃을 물려 품에 안고 걷는 길…. 고개를 드니 어느새 ‘사리아(Sarria)'였다.

‘이 곳은 순례의 마지막 도시니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겠어. 카드 긁어 여비도 넉넉히 뽑고, 멋진 식당을 골라 노천에 앉아 점심을 즐길 거야. 비노는 반 병만 마셔야지! 도서관에 가서 인터넷으로 오래간만에 소식도 좀 전하고. 그리고 도시를 빠져 나와 한 시간을 걷고 작은 마을에 짐을 풀어야지. 대도시를 즐기는 데에도 이제는 요령이 생겼다고.’

어젯밤부터 사리아에서의 반나절을 멋지게 계획해 두었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따라 앞으로의 동선을 그려본다. 그런데, 이 애들과 좀 더 있고 싶은데…. 사리아 초입의 정보센터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대안에 대한 손익계산을 아무리 때려 봐도 답이 잘 안 나온다. 어물쩡거리며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호르케가 말했다.

“우린 공립숙소에서 지낼 거니까, 혹시 마음 바뀌면 그쪽으로 와. 기다릴게.”

알았다고 하고 서로 메일주소를 주고받았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들이 길을 떠난 후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지도를 펼쳐놓고 ‘사리아 완벽 시나리오’를 그리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시작부터 남을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순례였고, 내가 걷기로 정한 것이야. 나의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맞아. 아무리 마음에 드는 길벗을 만났다고 해도 그 관계에 집착하면 그 때부터 번뇌의 시작이 되고 말아.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서로 안녕을 이야기하고 또 각자의 길에 충실하는 것이 옳아’. 그렇게 나를 이해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많았다. 어쩌면 ‘남’에게 집착하지 말자며 ‘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곧 다시 걷기 시작하고 높은 계단을 따라 길을 오르며 가방이 버거워질 때, 노천 테이블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앉은 세 사람이 손짓한다. 차가운 생맥주를 앞에 두고 한바탕 웃는 그들을 쳐다보며 “왜 여기에 있니? 숙소는?” “열두 시부터래. 그래서 쉬고 있지. 너도 잠깐 쉬어” 하기에 “너희 또 바 순례 시작했구나? 난 주변 더 둘러보려고” 하고 넘겼다.

“우린 오늘 계속 이 근처에 있을 거니까, 언제든지 환영이야”하는 그들의 여유로움을 한 폭의 사진으로 남기고 길을 이어갔다. 너희들의 느긋함을 조금 닮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을을 한 번 돌아보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시립도서관, 양해를 구하고 컴퓨터 한 자리를 얻어 소식을 열심히 적고 ‘송신’을 누르려던 차에 화면이 확 바뀌어 차단되고 말았다. 30여분을 작성하던 것이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이건 시나리오와 다른데? 스페인어로 가타부타할 재간이 없어 짐을 둘러메고 은행을 찾아갔다.

한낮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변의 비좁은 ATM기를 서성이며 혹시 내 뒤를 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을 확인하고 또 경계하며 카드를 긁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기계를 떠났다. 이것도 시나리오랑 딴판이지만 그럭저럭 성공이다. 이제 근사한 식당 하나만 발견하면 되는데, 이상한 거리에 떨어져서 보이는 족족 옛 가구를 파는 공방뿐 밥집이 없다. 지친다. 우선 길로 돌아가자고 결정하고 마을을 뱅그르르 돌아 순례자들로 붐비는 길 위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탓에 피곤해져 무엇을 고르고 자시고 할 여지도 없이 작은 바에 짐을 풀고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려 크로와상과 카페 콘 레체를 받았다. 구름이 끼어 걷기 수월할 줄 알았던 날씨는 돌연 미친 듯한 맑음이 되어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빨리 걷고 말아야지, 크로와상을 얇게 눌러 구겨 넣듯이 입에 물고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 카페 콘 레체를 들이붓다 입천장이 데었는지 따끔거렸다.

문득 오전 중에 사리아를 둘러보다 마주친 한국 순례자가 떠올랐다. 멋진 밀리터리 얼룩모자를 눌러쓴 진우씨의 오늘 목적지는 나와 같은 곳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한국말로 수다를 떨 수 있을 친구가 그 곳에 있으니 한 번 가 볼까, 힘을 내고 걷기 시작했다.

바르바델로스 가는 길 옥수수밭과 노란 화살표
▲ 바르바델로스 가는 길 옥수수밭과 노란 화살표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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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게 타오르는 태양에 맞서 이글거리는 철길을 건너고 끝없는 옥수수 밭에 진절머리를 칠 무렵 ‘펑’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내 몸을 들썩이게 했다. ‘전쟁이야?’ 마을 쪽에서 몽글몽글한 흰 연기가 올라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천둥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지나가는 이에게 “혹시 여기 무슨 일 났어요?” 했더니 “폭죽소리 같아. 오늘 축제하나 본데?” 어이가 없었다. 축제 폭죽이 전쟁 폭탄마냥 펑펑 소리만 요란하다.

‘바르바델로스(Barbadelos)', 자그마한 마을 공터에는 검은 천막으로 무대를 세우고 그 옆에 각종 술과 음료를 파는 간이 바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주변 동네 사람들도 차를 끌고, 택시를 불러 타고 잔뜩 밀어닥쳐서 귀를 찢는 음악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짐도 다 던져놓고 난장판에 뛰어들어 춤을 추고 싶지만, 우선 침대부터 맡아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숙소는 공터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갈리시아 지역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립숙소 첫 날, 기부제의 통 속에 지폐를 넣고 안으로 들어서자 식기가 없는 부엌과 굳게 잠긴 식당, 축축하고 얼룩덜룩한 자욱이 께름칙한 비좁은 침대 위로 삐그덕 소리를 내며 기어 올라가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샤워를 하고 뒤편 공터 개수대에서 파리들과 싸우며 빨래를 마치고, 마땅히 널 곳을 찾을 수 없어 난처해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침대 주변에 빨랫감을 척척 널어놓고 한 숨 돌릴 때 즈음, 시끌벅적했던 축제도 시에스타의 열기 속에서 잠시 쉬어 가는지 금세 공터는 텅 빈 채다. ‘벌써 끝났어? 아쉽네…’ 곧 가방을 둘러매고 동네를 활보했다. 내가 묵은 숙소에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언덕 위에 숙소 하나가 더 있다고 하는데, 진우씨가 그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찾아가서 놀래 줘야지.

도착한 곳은 사설 숙소로 저녁시간 식당을 겸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꾸밈새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도 한국인은 없다고 한다. 아마도 일정이 바뀌어 다음 마을에 짐을 풀었을 지도 모르지.

인연이 닿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곳 공터에 멋지게 꾸며놓은 바에서 1유로를 주고 생맥주 한 잔을 받았다. 입 주변에 맥주거품을 잔뜩 묻히고 나무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꿈만 같다. 노트를 펴 들어 글을 적어나갔다. 가벼운 취기에 펜은 미끄러지듯 종이 위를 달린다.

아프리카 두더지인지 뭔지, 온 몸이 가시로 뒤덮인 동물, 추워서 서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상대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멀어지지만, 여전히 춥거나 외롭거나 하는 이유로 또 다시 서로를 찾고, 그렇게 가까워져 상처 입히고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삶일까?

사람들도 결국 혼자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찾고 그렇게 기쁨을 얻다가도 서로의 가시에 찔려 화를 내고 눈물 흘리며 멀어지고, 그럼에도 또 다시 상처를 감싸 안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 생각했어.

나는 상처입고 싶지 않아서, 행복해질 수 있을 어떤 만남들을 모두 피하면서 살아온 걸까? 그리고 혼자만의 우상을 섬기며, 안전하게, 공상하면서 살아온 걸까? 이 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스쳐지나간 인연들과도…, 내가, 정말 온전하게 관계 ‘안’에 놓인 순간이 있었던가?

적어도 이 길을 걷는 매 순간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 길과, 땅과 온전하게 맞닿아서, 지금까지 평생을 괴롭혀왔던 ‘부유하는 느낌’으로부터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해. 내딛는 걸음마다 은총이라는 표현은 여기를 위하여 준비된 것 같아(물론 여기서도 무서워지고 싫은 순간도 많아, 그렇지만).

호르케를 만나 많은 생각을 해.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하고 또 남을 너무나 궁금해 하고, 어떻게든 도와줄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나서고, 밝고 즐겁고 좋기만한 햇빛 같은 사람,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그렇지만 그 밝음이 내겐 힘겨워서, 쭉 같이는 못 있겠더라만).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군가와 관계의 새로운 국면에 닿는 것을 두려워하고, 나에 대해서 자신 없어하는 것이 강해. 그건 비단 그 애뿐만이 아니라 내가 이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과 계속되었어. 멋지게만 보이고 싶고 싫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겉돌게 되어버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또 경계를 맴돌며 그만큼 내게 필요한 휴식을 얻었어. 그리고 다시 만나고….

괴롭고 외로운 길 위에 홀로 서서 나는 살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며 느끼지.


그저 이래야지 더 잘해야지, 괴롭히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나가자,
그럼 나머지는 모두 채워주실 거야.


감사합니다. 모든 것에.

한 잔의 카냐(Caña, 생맥주)와 함께 길 위의 친구들을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마음에 비누를 묻혀 거품을 내고 맑은 물에 헹궈 꼭 짜낸 것처럼, 이 작은 잡초 공터의 나무책상이 내게는 마음 빨래터가 되었다.

일곱 시에 미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네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싼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난간에 콕 박혀 책을 읽다 시간을 확인하며 햇빛을 쬐었다. 볕 잘 드는 성당 담벼락에서 잘 빨아 넌 마음이 뽀송뽀송 말라간다.

시계는 미사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성당의 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할아버지부터 10대로 보이는 소녀에 이르기까지 십수 명의 순례자들은 쭈뼛거리며 기다리다가 사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서로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간 작은 성당의 조금 늦은 저녁 미사의 참가자는 순례자뿐, 스페인 순례자 한 명이 복사를 맡아 사제를 돕기로 했다. 이것 정말 순례자 미사구나! 오랜 걸음으로 발을 절뚝거리며 걷다 제대를 향해 무릎을 바닥에 쿵 하고 찧는 그의 인사가 마음을 울린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에 대한 신부님의 설명을 들었다. 다행스럽게 미사를 도왔던 순례자가 중간에서 영어로 통역을 해 준다. ‘보통 성당의 종탑은 바깥에 있기 마련인데 이 성당은 종탑이 내부에 있어. 특별한 양식이지.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의 창의 형태가 다른 것 보이지? 벽 한 쪽이 무너져서 고치느라 달라졌대. 제대 뒤의 조각들 역시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공존하는 복합체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밖으로 나와 성당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작은 마을 성당 하나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언덕을 올라 식당으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라우라와 세리나와 같은 식탁에 앉았다. 어제 산티아고에서 축일을 맞고 오늘 버스를 타고 사리아에 와서 쉬지도 않고 걷기 시작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어제 산티아고는 어땠니?” 물으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었어.” 아직 내게는 닿지 못한 곳이다. 어릴 적 가톨릭 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이 길을 함께 걷는다.

“유럽에서 가톨릭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 들고 있어. 부모들이 아이에게 세례를 하는 것도 자유가 되었지. 하지만 세례만큼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기본이야.”

종교보다는 더 재미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이 보였던 명랑한 모습의 라우라가 예상외로 꽤 강경한 입장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으며, 걸쭉한 렌테하 수프와 로스트치킨을 얼마 넘기지 못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놓았다. 식당 바닥에 산처럼 쌓여 발에 채이고 짓눌리는 파리 떼들의 시체가 가릴 것 하나 없는 내 식욕마저 떨어뜨렸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순례자들의 주문을 혼자 처리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아저씨가 안타까워 보이다가도 갑자기 흰 손수건을 휙 내둘러 파리를 처리하는 모습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통금 시간에 쫓기듯 식당을 나와 숙소로 들어오니 창 밖으로 보이는 공터의 풍경이 심상치 않다.

“축제? 이제부터가 진짜야. 자정쯤 시작해서 밤새도록 놀아 젖힐 걸? 오늘 자는 건 포기해야 해. 귀마개는 있어?”

말도 안 돼, 공터와 숙소는 맞붙어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자정이 채 못 되어 난장을 벌이기 시작한 ‘오케스트라 파니아 블랑코 쇼’의 무대는 한 시, 두 시, 세 시가 되어도 끝날 줄 모르고 귀마개가 무색하게 귀청을 찢는다. 고개를 창문 반대쪽으로 뉘여도 대책이 없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 함께 어울릴 수나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정문은 이미 폐쇄된 채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다.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 꼼짝없이 고문을 당했다. 아직 내게는 과하기만 한 스페인의 정열과 시에스타의 위력을 온몸으로 확인한 밤이었다.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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