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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7일 금요일, 날씨 맑음, 순례 35일째.
바르바델로스에서 포르토마린까지, 16km.
오전 7시 15분 출발, 오후 12시 40분 도착.

밤새 쿵짝쿵짝 노랫소리에 온 몸을 두들겨 맞은 듯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창가에 널어놓았던 빨랫감을 만져보니 채 마르지 않았다. 속옷은 쑤셔 넣고 겉옷과 양말은 집게에 물려 배낭에 치렁치렁 널었다. 징그럽다며 등지고 떠난 카스티야 레온의 숙소마다 차고 넘치던 빨랫줄, 단시간 속성 건조의 위력을 자랑하던 햇빛이 그리워졌다.

길가에 짙게 내려앉은 안개의 숲을 헤치고 걷는 기분이 자못 신비롭다. 몽롱함에 내가 걷는지 길이 움직이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멀리 또가닥또가닥 말발굽소리가 들린다. 안개를 뚫고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아한 걸음을 옮기는 갈색 말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말 위에는 지긋한 나이의 순례자가 앉아 있었다. 곧 날카로운 허기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한 발짝 떼어내는 것이 꼭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을 떼어내는 듯이 버겁다. 바를 찾으면 무조건 아침식사시간이라고 이를 갈며 걸었다.

손바닥 만한 상점의 테이블에는 이미 순례자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아침을 먹고 있었다. 콜라 카오에 비닐에 든 빵 하나, 바나나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생각보다 비싼 값을 치렀다. 노천에 나와 햇빛에 안개가 잦아드는 지평선을 쳐다보며 뜨끈한 우유에 빵을 적셔 먹었다. 오고가는 순례자들과 “안녕”, 인사 정도만 나누고 ‘오늘의 루트는, 오늘 점심은, 산티아고는, 순례가 끝나면, 한국에 가선…?’ 생각이 꼬리를 물고 걱정으로 탈바꿈하려는 찰나였다.

“자리가 마땅치 않네…. 여기 좀 앉아도 되니?”

짧은 은빛 삭발머리가 시원스러운 중년의 여성 순례자였다. “그러세요”, 대꾸를 하고 다시 생각의 늪으로 뽀르르 달음질치려는 때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길은 정말 사람들이 많아 힘들군. 어제 숙소에 갔더니 모두 만원이었어. 재워줄 수가 없다기에 풀밭에 텐트를 치고 잤지. 그것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옷이며 모두 젖어서 좀 불편하네.”
“맞아요, 제가 묵었던 곳도 네 시가 채 못 되어서 만석을 내걸었어요. 사리아를 지나고 나서 갑자기 붐비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텐트까지 가지고 다니려면 무겁지 않아요?”
“전혀. 1킬로가 조금 넘을까? 가방 아래에 하나 넣어 다니면 어디든 내 집이 되니까.”

스위스에서 온 가브리엘라는 첫 눈에도 특이한 데가 많았다. 어머니뻘로 보이는 나이에 텐트와 다른 순례자로부터 얻은 양말을 짐가방에 넣고 걷는, 세상 장애물에 걸릴 것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걷는’ 순례자?

“20대에 요리사로서 명성을 얻었어. 큰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높은 사람들의 음식을 만들면서 바쁘게, 정말 바쁘게 살았지. 문득, 전부 팔아버리고 배낭 하나만 남겨 두었어. 그리고 스위스의 알프스며 방방곡곡을 내 발로 걸어 다녔지.”

강한 영적 힘이 존재하는 길 위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오늘 카페 콘 레체 한 잔에 담배연기를 허공에 흩뿌리는 이 순례자, 그들에 만만치 않게 색다른 친구가 될 것 같다. 그녀는 내 출발지점 이야기를 들으며 기가 차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다들 약속한 듯이 그 곳에서 걸음을 시작하는 구나? 대체 네게 ‘생장피드포르부터 시작해’라고 생각을 넣어준 사람은 누구니? 걷는 것이야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또 어디서 마무리지어도 상관없는 것인데, 너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글들을 보고 그곳을 출발점으로 정한 거야?”

글쎄요, 누구일까요? 생각해보면 남들이 ‘거기가 대체로 출발점’이라고 하기에, 자료들을 훑어보니 적당한 것 같아서 그랬나보다. 그녀의 말은 ‘타인의 의견에 맹목적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인 듯 싶지만, ‘그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가 있나요?’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되었다. 굳이 싫다고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집을 버리고 나자 세상이 모두 내 집이 되었어. 알프스 산골짜기를 걸으며 자유를 느껴.”
“가족들은 걱정하지 않아요?”
“딸이 있어. 네 나이쯤 되었을까? 그 애는 나를 잘 이해해. 무엇보다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해가 안 된다’, ‘가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과, ‘이해한다’고 말하는 가족, 마음을 전하는 모양은 정반대지만 어쩜 하루하루 떠난 이들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모습만큼은 같은 것이 아닐지 몰라. 조용조용 생각을 이어나가는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우유 안 마시니?”
“네? 방금도 저 우유 마셨는데요. 저는 잘 마셔요. 대체로 많이들 마시고요.”
“스위스에서 작은 집을 여행객들에게 세 주고 있는데, 아시아 사람들이 정말 많아. 한국 사람들도 많았는데 아침이 되면 우리가 식탁에 내어놓은 우유는 먹지 않더라고. 그래서 궁금했지, 한국 사람들은 우유를 안 마시나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밥통을 갖고 다니면서 밥을 하기도 하고, 신기해.”
“잘은 모르겠지만…, 어쩜 다른 나라에 와서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없으면 더 갖고 싶고, 있으면 물리잖아요. 그 사람들 한국에 가서 아줌마가 차려주었던 아침식사 찾아서 해 먹었을 지도 모르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도심 한가운데 커피집에서 카페 솔로에 우유를 붓고 크로와상을 시켜놓고 한숨을 쉬었던 자신의 모습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이야기는 음식과 요리로 이어졌다. 그런데…, 가진 것 다 팔아치우셨다는 분이 펜션을 하시네?

“걸으면서 음식 먹는 것이 참 힘들어. 나는 요리사니까 음식이 몸에 들어가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영양학적인 부분을 알기 때문에, 밖에서 내놓는 음식 먹는 것이 석연치 않아. 그래서 웬만하면 음식도 항상 직접 해먹어, 근데 이곳은 마땅한 요리재료 구하기가 참 어려워서 계속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어.”

그녀의 이야기에 극성스러운 식생활의 노예가 되었던 언젠가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함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30분 쯤 되었을까, 뭔가 허전했다. 두고 온 것이 있는 것 같았다. 40일 가까이 걸어오며 잃어버린 것이라고는 카리온에 널어두고 온 반팔 티셔츠 뿐이었는데, 지팡이를 바의 담벼락에 기대어놓고 휘적휘적 걸어온 것이다. 마르첼리노 아저씨에게 받아 길에서 주운 수국과 호르케가 꽂아준 왕관꽃을 사모스의 오스피탈레로 아저씨에게 얻은 빨래집개에 물린 것, 머리가 복잡하다.

“지팡이를 놓고 왔어요” 했더니 “그래? 어쩔 거니?” 그리곤 내 상황에 괘념치 않고 ‘가톨릭은 믿지 않지만 내 안의 영적 부분에 대해서는 느낄 수 있다, 지금 내 삶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자기 이야기만 한 보따리 쏟아놓는 그녀가 매정하기만 하다.

걸음을 채 멈추지 못하고 끌려가듯 걷는다. 다시 걸어갔다 오려면 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이제 네 두 발로 걸으렴’ 하고 지팡이를 거두어 가신 것일지 모른다. 누군가 그 애가 필요한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만을 바라며 집착을 거두었다. 다만 지팡이를 통해 마음을 주고받았던 소중한 이들만큼은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하자.

“누구에게 들은 것, 누가 그렇다더라 한 것들 나는 믿지 않아. 내 몸으로 부딪히고 두 눈으로 본 것들, 그렇게 내가 경험한 것들을 믿으려고 하지. 이게 내 철칙이야. 지금의 걸음도 바로 그런 것이지.”

그녀는 단호한 한 마디를 던지고 한 잔의 카페 콘 레체를 위해 바에 짐을 풀고, 나는 길을 이어갔다.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고 했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가브리엘라와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녀는 마치 잘 닦인 거울처럼 내 안의 한 부분을 비춰주었다.

포르토마린 마을 입구에서
▲ 포르토마린 마을 입구에서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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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생각으로 마음이 따끔거리고, 햇빛에 살갗이 따끔거리기 시작할 즈음, 산 아래로 펼쳐지는 절경에 넋을 일었다. 흐르는 강을 끼고 잿빛 지붕을 얹은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포르토마린(Portomarin)'의 초입이었다. 길게 이어진 다리를 건너며 강 아래로 유유히 떠가는 요트와 강가에 몸을 누이고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어제 숙소는 너무 심했어. 오늘은 펜션이라도 들어가야지’ 하며 안내 센터에서 “숙소 정보 좀 주세요” 하고 리스트를 받아뒀다. 30유로까지는 봐 줄게, 속으로 혼자 방값 협상을 하며 걸어가는 길은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사설 숙소 광고를 반짝이는 건물을 하나 둘 스쳐가며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공립 숙소로 향한다. 우선 어떤 모양새인지 상태를 좀 보고 결정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을 중심가의 성당을 지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순례자 숙소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것 같다. 뭐에 끌리듯 줄의 맨 뒤로 달려가 우선 한 자리 맡았다. 한 시가 채 되지 못한 시각, 곧 숙소 문이 열리고 대기 줄을 따라 걸어가는데 내 앞의 여성 순례자가 낯익다. 베이지색 챙모자를 쓰고 날렵해 보이는 가방을 둘러맨 그녀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더니 반갑게도 한국인이었다.

“전 오늘 어디서 묵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언니도 계시니 여기에 짐을 풀어야겠어요!”

윤소 언니는 나보다 며칠 후에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내 일정이 점점 권장하는 진행을 벗어나던 가운데 언니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붙은 1층 침대에 짐을 풀고 샤워며 빨래를 마친 후 고개를 맞대고 식사를 궁리했다.

100명을 넘게 수용하는 이 숙소의 부엌시설은 그럴싸했지만 냄비가 단 하나 뿐이다. 식사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지만 왠지 오늘 점심은 언니와 함께 노천에 앉아 여유롭게 호사(?)를 부리고 싶다. “숙소에 들어오는 길가에 괜찮은 노천식당들을 몇 개 봐 뒀어요” 그리고 언니와 함께 마을로 나섰다.

식사를 주문하고 의자에 앉았다. 언니는 생장에서부터 함께 걷기 시작한 한국 순례자들과 지금까지 같이 걸어왔다고 했다. 며칠 전 산티아고 축일, 그곳에서 있었던 한국 순례자들의 모임에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하셨단다. “저도 이야기는 들었는데” 하며 반가워했다. 약 20여 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축일의 성대한 축제를 함께했다고 한다.

“어떤 젊은 순례자는 순례 가운데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도장을 전부 받았어. 대성당 광장에서 그 태극기를 펄럭이는데 기분이 참 뭉클하더라.”

그리고 오늘 헤어졌던 나머지 두 일행들도 이곳으로 와서 다시 만나 같이 걷기로 했다며, 내일부터 우리와 같이 걸어도 좋겠다고 하신다. 곧 윤소 언니가 길 저편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방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은아 언니와 미정 언니였다. ‘미정’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듯 낯설지 않았다. “언니 혹시 폴란드 순례자에게 이름 적어주시지 않으셨어요?”, “맞아, 그 아줌마 기억나지! 만났어?”, “그럼요! 글씨를 얼마나 정성껏 써 주셨는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라요”, 길 위의 인연이 신비하기만 하다.

“우리 팜플로나에도 갔었어. 산 페르민 축제 때. 진짜 전 세계적인 축제긴 하더라. 좋기도 했지만 그때 무슨 일 나는 건 아닌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 다들 술이 취해가지고 남자들은 추근거리고…, 같이 갔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난장판도 아니었어.”
“저도 전에 만난 일본 순례자 아저씨가 팜플로나 산 페르민 갔다가 지갑 잃어버리고 돌아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도 볼만 하긴 하더라. 너무 순식간에 끝나긴 했어. 하하하!”

세 언니는 순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길을 함께 걸어왔던 것이다. 멈추고 꾸물거리고 자유를 발악(?)하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던 나와는 또 다른 순례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뭇 대단해보였다. 끝없는 이야기보따리를 풀던 가운데 은아 언니 손에 들려진 묵주와 9일기도서가 눈에 들어왔다.

“언니, 신자세요?”
“응. 방금 저 앞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왔지. 그래도 순례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않을까 해서.”
“저도 그 책 가져왔어요! 생장에서 첫날부터 9일기도 했거든요. 이제 감사기도 하는 중인데… 너무 반가워요.”

오래간만의 믿는 분이셔서 참 반가웠다. 은아 언니는 순례를 마치고 8월 15일의 성모승천 대축일을 끼고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에 갈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내가 순례를 시작하며 성수에 온 몸을 뉘였던 바로 그 곳, “어땠니?” 하고 묻는 말에 그저 “정말 좋았어요”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4월 세례 이야기에 “이 사람 참 급하네, 곧 수녀원 가겠다고 하겠네” 하며 웃으시는 언니에게 마음 한 쪽에 숨겨두었던 비밀을 들킨 것 같아 “그렇긴 하죠?” 하고 웃고 말았다.

곧 이야기가 종교로 옮겨간다. 윤소 언니가 항상 가톨릭에 묘한 끌림을 느껴왔다고 하자 은아 언니는 “자, 한국가면 같이 예비자반 가자, 좋아~” 하며 농담처럼 건네신다. “명동에 가면 매월 교리반이 있어요. 저도 그 곳에서 교육 받았어요” 하고 곁다리 정보를 더했다.

그러나 내가 그러했듯 신앙, 혹은 믿음이란 떠밀려 될 것이 아님을 알기에, 길을 찾아 이곳에 온 언니 안의 진리를 찾는 아름다운 마음이 좋은 때와 자리를 만나 반짝일 수 있기만을 조용히 기도할 뿐이다. 그것이 천주교회 안이 되었든, 불교법당이 되었든, 혹은 자기 자신이 되었든 간에.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이 길 위의 모두에게도 이어지는 과정일 것이다.

한 달을 넘긴 순례 가운데 알게 모르게 우리도 스페인 사람들의 느긋함에 점점 물들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남은 순례계획, 그리고 순례 후의 여행계획 등을 열심히 주고받으며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의자에 기대 멍하게 있는데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호르케와 산티, 세바스 일행이 활기차게 걸어오고 있었다.

“너 여기 있었구나? 우리도 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야. 한국 친구들 만났네? 다들 반가워~. 그럼 이따가 숙소에서 봐.”

한바탕 폭풍을 일으키고는 샌들을 끌며 바람같이 사라진다. “누구니?” 하고 묻는 언니의 물음에 “그냥 길에서 어쩌다 만난 스페인 사람인데요. 오늘 또 만났네요. 좀…, 소란스럽죠?” 하고 둘러댔다. 은아언니와 미정언니는 강 근처의 사립숙소에 짐을 풀어 그 곳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며 괜찮으면 같이 먹자고 초대해주셨다.

사설숙소 위장진입 작전을 협의한 우리는 상점에 들러 베이컨 카레 재료와 비노 한 병을 쓸어 담았다. 카트를 끌다 파파할아버지(?)같은 사람들 속에서 재빠른 영어를 구사하며 물건을 고르고 있는 아시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홍콩인가 대만에서 온 여자라는데, 영어를 썩 잘해서 오스트리아 아저씨들이랑 같이 걷는다더라. 전에 인사해보니까 휙 지나치더라고. 아시아 사람들은 안 좋아하나봐”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의 말투가 왠지 쌀쌀맞게 느껴졌다.

미사에 가고 싶은 은아 언니와 나를 배려하여 윤소 언니와 미정 언니가 숙소에서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미사가 끝나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의 한국어 수다를 맘 놓고 늘어놓아 조금 에너지가 달린다. 침대 위에서 밍기적 거리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방 앞의 푹신한 의자에 무릎을 맞대고 노트에 이것저것 적고 있는데 옆방에서 불쑥 호르케가 나온다.

시간 괜찮으면 밖에서 놀자는 얘기에 ‘또 뭘 하려고?’, 불안한 마음을 거두고 우선 내려가 보기로 했다. 숙소의 풀밭 한쪽 낮은 담에 기대어 앉아 지팡이를 매만지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로 지팡이 한쪽에 문양을 새기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말을 걸어온다.

“한국어로 'Be yourself'는 뭐라고 해?”

언제나 질문공세를 멈추지 않는 그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머리를 좀 굴려보았다. 여러 가지 번역을 할 수 있을 텐데, 의역과 오역을 이어가다 간단하게 “너 자신이 되렴”이라고 한국어로 말해주었다. 그는 벙 찐 얼굴이 되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거 뭐야? 어떻게 발음한다고? 다시 한 번 해 줘” 하며 닦달한다. 몇 번을 그렇게 ‘너 자신이 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에게 하는 얘기인지 내게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어도 알파벳처럼 기록할 수 있지? 종이에다가 써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잘 봐.”

그리고 노트 뒷면을 펼쳐 적어 보여줬더니 놀랍다는 듯 “말도 안 돼….” 하며,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곰곰 생각을 하다, 곧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하자. 이 문구를 내 지팡이에 새기는 거야.”
“뭐? 그거야말로 말도 안 돼. 이걸 어떻게 새기니? 나도 내 이름을 한국어로 못 새겨서 영어로 적어 넣었는데. 안 돼, 안 돼.”
“왜 안 돼? 넌 내가 카미노에서 만난 가장 놀라운 애야. 그러니까 기념해서 너희 나라의 말을 지팡이에 새기고 싶어. 못할 것 같지? 두고 봐.”

나는 “정말!” 하고 한국어로 말했고, 그는 다 알아들었다는 듯 웃기만 한다. 곧 “네 이름은 어떻게 써?” 하기에 이름을 적어 보여주었다. 나 역시도 “네 전체 이름은 어떻게 돼?” 하고 물어보았고, 세 개의 이름을 적고는 설명을 해 주었다.

“스페인은 이름이 전부 세 개야.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성을 하나씩 받아. 보통 마지막 성은 생략할 때가 많아. 그리고 다른 서구권과 다르게 여성들이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아. 한국은 어때?”
“한국도 여성이 결혼해도 성은 그대로야. 하지만 성은 아버지의 것만 물려받아. 남자들의 혈통을 잇는다는 의미가 강해. 스페인은 다른 나라랑 좀 다르네? 몰랐어.”

그리고 한국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묻기에,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사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스페인도 그래. 예전엔 남자들이 바깥일, 그리고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했지. 결혼하고 나면 스페인 남자들은 무책임해 지는 것 같기도 해. 그렇지만 우리처럼 젊은 세대들은 많이 바뀌고 있어.”

그리고 열심히 지팡이에 무언가를 새기던 칼을 놓고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제 사리아 가는 길, 그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동안 내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내가 전부 메일로 보내줄게” 하는데 대체 난 이 애의 사진을 한 장이나 찍었나, 하고 돌아보았다. 나는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찍었나, 대체 무엇에 내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었나, 그는 이렇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나를 바라보고, 그 모습을 사진에 남겨두었다.

“이제 알겠어, 네가 바로 내 순례의 천사님인 걸.”
“천사는 무슨, 난 그저 네 카미노 보좌관일 뿐이야.”

그리고 웃으며 넘기고 만다. 그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많은 것을 묻고, 조용히 귀 기울여 준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니,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비밀의 밤에 겁쟁이가 되었던 내 모습에 대해서 솔직해지고 싶었다.

“있지, 베가 데 발카르세 기억해? 오 세브레이로 전에 우리가 만났던 곳, 그때 비노 함께 마셨잖아.”
“당연하지, 재미있었어. 비노도 괜찮았고.”
“사실 그때, 너희가 ‘행복한 담배’ 피울 거라고 했을 때, 나 갑자기 무서워서, 인사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러고 나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걸었어. 그래서 너를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뻔히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내 여자친구도 너랑 똑같았어. 그 애에게 나에 대한 조금 더 무시무시한 얘기를 했을 땐 어땠는지 알아? 한 며칠을 나랑 말도 안 하고 ‘워어’ 이러면서 나를 피했어. 나를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곧 다시 화해(?)하긴 했어. 그래서 너도 이해할 수 있어. 사실 조금 재미있었어. 반응이 너무 똑같아서. 물론 내게도 지켜야 할 규칙들이 엄연히 존재해. 바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그렇지만 그 법칙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내가 인정한 선 안에서 자유롭달까?”

‘너 자신이 되렴’, 그것은 다름 아닌 네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구나. 더 이상 그는 ‘그저 어쩌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다. 불안과 두려움을 내어놓고 타인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것, 친구가 되는 법은 이런 걸지도 몰라, 나를 둘러싼 높고도 두꺼운 벽을 끊임없이 두드리던 그의 목소리에, 내 안에서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미사를 위해 길을 걷다 노천에서 ‘뿔뽀(Pulpo, 문어요리)’를 먹던 니콜라스와 하이카를 만났다. 어제 바르바델로스에서 순례자 복사단이자 스페인 통역자로서 활약하던 아저씨였다.

“어제 바르바델로스 미사에 있었지?”
“네. 저도 아저씨 기억해요. 어젯밤에 잘 주무셨어요? 저는 하나도 못 잤어요.”
“우리는 숙소 오스피탈레로에게 부탁해서 문 따고 숙소 나가서 신나게 즐기다가 왔어! 정말 재미있었는데.”
“저는 하나도 몰랐죠. 알았으면 아저씨랑 같이 노는 건데, 아쉬워요.”

같은 밤, 같은 공간에서 악몽을 꾼 사람과 축제를 즐긴 사람, 지난 체리마을의 꽁치잔치에서 고개를 가로젓던 세나와 인드라의 모습과 어젯밤의 내가 겹쳐졌다. 이쑤시개에 찍어 건네준 뿔뽀 한 조각을 우물거리며 이제 곧 미사라고 말했더니 우리도 곧 갈 참이라며 이따가 성당에서 보자고 한다. 인사를 하고 은아언니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지 않아 두 사람과 함께 자리에 앉고 나자 미사가 시작되었다.

사제의 스페인어 말씀에 니콜라스가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귓속말로 영어로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옆에 앉은 언니에게 또 조용히 한국말로 전했다. 화답송의 ‘주님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십니다’ 를 낮게 읊으며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하고 또 기쁠 뿐이었다. 성체를 모시고 미사를 마친 후, 니콜라스는 사제를 만나 고해를 하고, 나머지는 성당 밖으로 나왔다. 곧 그가 밝은 모습으로 나와 ‘마음이 훨씬 편하다’며 웃었다.

“아저씨, 어제 미사 할 때 복사 하시면서 계속 제대 앞에 무릎을 쿵, 하고 짓찧으셨잖아요. 다리도 안 좋으신데…,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마음이 움직였어요.”
“나름대로는 온 몸으로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래. 나 역시도 너와 친구가 고개를 숙여 이렇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는걸. 미사를 하면서도 팔짱을 끼거나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 너희는 정말 온 몸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나로서도 참 인상적이었단다.”

“오늘 말씀 영어로 풀어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하고 덩치가 산 만한 아저씨를 덥썩 안으며 내일의 좋은 순례를 기원했다. 언니와 함께 사설 숙소로 걸어가며 마을의 아기자기한 공원과 조형물이 늦은 오후의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사설숙소 입구의 관리자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 듯, 위장진입에 성공했다. 식탁 위에 카레 한 솥과 잘 지은 밥을 차리고 비노를 따라 나누었다. 그리고 ‘부엔 카미노’, 경쾌하게 잔을 부딪치며 외쳤다.

앞으로 100킬로미터 산티아고까지의 거리
▲ 앞으로 100킬로미터 산티아고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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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이 손수 해 주신 처음 먹어보는 베이컨 카레는 아주 맛있었다. “걸으면서 먹으려고 사 둔 건데 같이 먹자” 하시며 하나 둘 꺼내놓으시는 처음 보는 음식들에 식탁 위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언니들과 함께 마주보고 앉아 나누는 저녁식사 시간 속에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빈손으로 와서 잔뜩 받기만 하고 돌아가는 길이 감사하고 또 따뜻했다. “내일 이 숙소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옆자리의 윤소언니는 잠든 듯 침낭이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을 뒤척이다 방을 나와 창밖을 쳐다보았다.

등산화가 수북히 놓인 바닥을 비집고 테라스에 나와 마당을 바라보니 동네 고양이들이 하나 둘 밤산책을 나왔다. 하늘에는 드문드문 명멸하는 별빛,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그동안 숙소에서 새벽별을 바라볼 때와는 조금 달라. 이전 없던 들뜬 감각이 어색하기만 해 숙소 안을 몇 번을 맴돌다 빼꼼 고개를 빼고 옆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후다닥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침낭에 쏙 들어갔다. 이 두근거림은 내가 거의 다 마셔버린 비노의 탓일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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