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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산 전적지로 가는 길

 

오용진씨는 석문산 전적지로 가는 길, 한 마을 앞에다 차를 세웠다. 그 마을은 할아버지 부하 오상렬 의병이 태어난 ‘가마마을’로, 마을 어귀에 순절기념비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곧장 순절기념비에 다가가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드렸다.

 

곧 이어 지난날 의병들의 무기제작소였다는 대명동산(大明洞山) 들머리 ‘석문동천(石門洞天)’ 표지석 일대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석문산 전적지로 달려갔다.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둔 탓으로 그 흔적은 지워지고 말로만 전할 뿐이라고 하였다.

 

석문산(石門山)은 지난날 치열했던 전적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야트막하고 예쁜 두 산봉우리가 호수에 잠겼다. 나는 호수 둑에서 석문산 전적지를 향해 깊이 묵념을 드렸다. 이 산에서 일군 총칼에 죽어간 이름 없는 의병 혼령에게 머리 숙였다. 

 

마지막 답사 전적지는 오성술 의병장이 일군에게 체포된 용문산이었다. 용문산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기에 먼 곳에서도 빤히 잘 보였다. 오후에는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씨를 만나기로 하였기에, 굳이 용문사 가까이 가지 않고, 광주로 가는 길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답사를 마쳤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오용진씨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38선은 먼저 왜놈들이 만든 바, 그놈들이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38선 이북은 만주국으로, 그 이남은 일본 본토로, 분할 편입하려던 계획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만일 일본이 망하지 않았더라도 조선 국토가 두 쪽 나는 그런 불행도 왔을 건데, 엉뚱하게도 정작 미소 양국이 이를 분단시켰다고 역사의 뒷이야기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의 하나는, 당신 가계를 이어온 이야기였다. 그 당시 의병에 투신한 대부분 전사들은 대가 끊어져서 출계로 사자(嗣子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드는 아들)를 이어가는 집안이 많은데, 다행히 오성술 의병장은 외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대낮의 방사(房事)

 

오성술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오 의병장은 외아들이었다.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어머니(오용진씨 증조할머니)는 부대로 찾아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아들은 차마 어머니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옷 갈아입고자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 오 의병장 부인)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치마로 방문을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이 고맙습니다.”

 

오용진씨는 고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에도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는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였다. 마침 나도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 길에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도 단 한 차례 대낮의 방사로 득남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관련기사: 혁명가의 성생활은 어땠을까?). 

 

영산강 포구의 슬픈 노래

 

오성술 의병장은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오성술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케 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구로 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거기서 대구로 갔던 모양이다. 오 의병장이 일본 순사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자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서 포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산강 포구 뱃전에서 첫 상봉이자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 아마도 이들 부자는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임을 떠나보내는 남포나루에는 슬픈 노래가 흐른다”는 고려 정지상의 <송인(送人)> 한 구절을 연상케 했다. 갓난아이를 사이에 둔 젊은 부부의 영산강 나루터 이별은 아마도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이었으리라.

 

“여보, 잘 가시오.”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 잘 부탁하오.”

“염려 마시오.”

“………”

 

부인 나씨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들을 누가 볼세라 시집을 떠나 몰래 길렀다. 일제 군경과 밀정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나주군 문평면 쌍정마을 친정 남동생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 아들은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자라면서도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악몽 같은 일제강점기를 넘겼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오용진씨 이야기를 웃으며 들었는데 곧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그 무렵 이런 비극이 이 집안뿐이었겠는가? 왜 우리나라에는 해방 후 이런 애국자 집안들이 빛을 못 볼까? 잘못 낀 첫 단추는 그 언제 바로 잡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안 이야기를 듣는 새 승용차는 송정리역을 지나고 있었다. 송정리역은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다. 1969년 3월 1일 새벽, 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하고자 용산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와 이곳에 내렸던 곳이 아닌가. 밤잠을 설친 데다 여기서부터 보병학교까지 구보로 뛰어갔던, 힘들었던 보병학교 생활 첫 출발지였다. 하지만 이곳 일대도 그때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오용진씨는 당신 집안사람이 한다는 역전 한 밥집으로 안내하고는 비빔밥을 시켰다. 쇠고기 육회에, 갈비탕 국물에 그 비빔밥 맛이 일품이었다. 한 그릇에 오천 원이었다. 이 돈 받고 수지 타산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시작 때는 남의 집 가게를 얻어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 가게에서 영업한다고 자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전적지를 쏘다녔는데도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씨와 약속시간을 조금 넘겼다. 전남 도청 앞 황금다방에서 목을 뽑고 기다린다는 전화였다.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의 투쟁사가 자못 궁금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회는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이야기입니다.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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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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