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계간 시전문지 <시와 시학> 봄호(3월 1일자)에서 미당 서정주(당시 77세)는 "친일 문학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했던 것에 대해선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친일문학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청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 혐의를 받고 있던 노 시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고백은 곧장 여러 신문에 소개됐다. 사람들은 곤혹스러워했다.
'아무 말이나 놀리면 시가 된다'는 찬사를 받던 대시인과 '친일 부역자'라는 두 개 가치는 함께 있기 어려운 단어였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죄와 사람을 어떻게 떼어놓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미당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74일 뒤인 2000년 12월 24일 85세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시인이 떠났지만 그가 남긴 '대시인'과 '친일'이란 발자취는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서울시는 2001년 미당이 31년 동안 살았던 봉산산방(蓬蒜山房)을 미당 기념관으로 조성해 보존하겠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서울시는 은근슬쩍 입을 다물었다. 집은 방치된 상태로 점차 흉물이 돼 갔다.
2003년 11월 집은 한 건설업자에게 매각됐다.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엔 다세대주택이 들어설 것이라고 알려졌다. 2004년 1월 서울시는 건축업자로부터 집을 사들였다. 당시 이명박 시장의 의지였다. 철거는 면했지만 집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다.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전 31년 동안 살았던 동네가 관악구 남현동. 사당역에서 서남쪽으로 나오면 바로 남현동이다.
술 마시기 좋은 유흥가와 빌라촌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남현동엔 의외로 문화유적지가 많다. 1905년에 지어진 당시 벨기에 영사관이 있고, 서울에서 유일한 백제 가마터가 있다.
그 뿐인가. 지금껏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오빠생각'의 작사자 최순애가 줄곧 살았던 동네기도 하다. 최순애의 남편이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다. 조선시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묘에 가기 위해 넘었던 남태령이 곧 남현이니, 정조의 자취가 배어있는 동네기도 하다.
'지옥철'로 유명, 곳곳이 문화유적
남현동에 가려면 사당역에서 내려야 한다. 2005년 10월 21일 최초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사당역은 지하철 혼잡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2005년 YTN 보도에 따르면 사당-방배 구간은 가장 혼잡한 구간으로 표준혼잡도를 100%로 잡았을 때 224%에 달했다.
이 혼잡도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11월 22일자 <한겨레21>은 사당역-강남역 구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혼잡한 '지옥철'이라고 보도했다.
사당역 혼잡에 관해선 몇년 동안 몸으로 겪어서 잘 알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3년 동안 사당역 바로 옆 지하철역인 낙성대역 근처에 살았다. 당시 직장은 사당역을 지나 다섯 구간을 더 가야 하는 역삼역 근처였다. 종이가방에 도시락을 넣어다녔는데, 찌그러지지 않도록 매일같이 노심초사해야 했다.
어느 날 닭죽을 싼 날이 있었다. 비싼 음식을 준비한 터라 잔뜩 긴장을 하고 도시락에 관심을 기울였다. 짐짝 같은 지하철에서 빠져나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한숨은 탄식이 되고 말았다. 종이가방 몸통은 온데간데없고, 손잡이만 달랑 들려 있었던 것이다. 혼잡도가 극심했던 사당-강남 구간은 그렇게 닭죽 먹을 행복(?)을 앗아갔다.
사당역 주변은 유흥지로 유명하다. 술집과 식당이 많아 단골 회식 장소다.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고, 안양·수원 방면으로 가는 광역버스가 서는 교통요지라서 자연스레 발달했을 것이다.
사당역 주변은 러브호텔이 대거 들어서면서 지역문제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 말부터 2년 동안 10개가 넘는 러브호텔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반대시위에 나서며 뜨거운 관심사가 됐다. 이후 러브호텔이 골목길이나 주택가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지구단위계획이 바뀌었다.
사당역 주변은 유흥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역사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관악산 자락에 있어 녹지도 적지 않다. 길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문화재길' '백제길' '승방길' 등은 남현동이 단순 유흥지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당역(6번 출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역사 유적은 구 벨기에 영사관(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이다. 사적 254호로 지정된 곳이다. 1905년에 완공된 대한제국 시기 건물이다. 이 건물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1919년 영사관이 충무로로 옮겨간 뒤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이 됐다가 다시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가 됐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 소유가 됐다. 1970년 상업은행이 쓰다가 새 건물을 지으면서 1982년 회현동 건물을 지금 자리로 옮겼다. 그러니 벨기에 영사관은 1982년 이전까지 회현동(회현동 2가 78, 79)에 있었다는 말이다. 2004년 9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이 되면서 오랜 방황을 끝냈다.
<관악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에 보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자리 일부에 중국식 공동묘지가 있었다. 중국대사관이 관리하던 한강 이남의 유일한 중국식 묘지로 대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묘지 모양이었다. 1973년 남현동 구획정리를 하면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서울 유일 백제요지, 버려진 채 돌보는 이 없어
구 벨기에 영사관 옆길을 따라 관악산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야산이 나타난다. 여기가 사적247호인 백제요지다. 백제시대 토기 굽던 가마 자리로 서울 지역에선 유일하다. 1973년 질그릇 조각들이 불에 탄 흙과 재에 섞여 발견됐다. 가마터가 많이 파괴돼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
서울지역 유일한 백제시대 토기 가마터지만 이곳이 문화유적지라는 것을 알 만한 것은 담 한쪽에 있는 안내판이 유일하다. 안내판 위치도 그렇거니와 주변 풍경이 도무지 문화유적지로 보이지 않았다. 이 곳에서 몇년 동안 산 여동생이나 매제도 이 곳이 백제요지란 것은 몰랐다.
관악구청장은 선거에 나올 때마다 백제요지 보존을 이야기했지만, 이 곳 풍경은 몇 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백제요지 바로 옆엔 공영주차장 건설이 추진 중이다.(백제요지 주소는 538-1, 공영주차장은 538-2) 큰 건물이 들어서고 나면 이 한적한 곳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백제요지 옆길로 올라가면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다. 일부러 잘 다듬은 계단을 놓거나 운동기구 등 인위적 시설물이 없어 시골 야산 같은 느낌이다. 이 야산은 관악산 자락이다. 곳곳에 텃밭을 가꾼 흔적이 보인다.
산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남쪽 끝 쪽으로 나오니 빌라촌이다. 빌라촌 입구에 샌드백이 걸려 있다. 길가는 사람 누구나 한 대씩 치고 갈 수 있는 위치다. 샌드백엔 "신발바닥으로 차면 안 되죠, 발등 손 괜찮습니다"라고 글을 붙여 놓았다. 신발바닥으로 차면 흙이 묻어 더러워지니 다음에 쓸 사람을 배려해달라는 뜻일 게다.
최은희 이기동 서정주 살던 예술인 마을
남현동은 한 때 예술인 마을이었다. 한국예술인총연합회와 서울시가 1972년 남현동 일대에 예술인아파트 3동을 지으면서 예술인 마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은평구 진관외동에 기자들이 모여 사는 기자촌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예술인 아파트엔 영화배우 최은희를 비롯해 '땅딸이'와 '뚱뚱이'란 예명으로 각각 유명했던 이기동과 양훈, 황정순과 함께 현모양처 어머니상을 주로 연기한 주중녀, 조각가 이영일, 탱화전문가 김영진 등 90여 세대가 살았다.
'오빠생각'을 쓴 최순애도 이 곳에서 살다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가 1998년이다. '오빠생각'은 방정환이 만든 잡지 <어린이>에 1925년 11월에 실렸다. 이 노래를 고인이 13세에 지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고인의 오빠는 <개벽>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운영했고, 동생에게 이원수와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니 하니 최순애와 이원수를 이어준 사람이 오빠인 셈이다.
올해 1월 4일 문을 연 이원수 문학관 홈페이지(
www.leewonsu.co.kr)에 가면 최순애가 쓴 작품과 관련 글을 볼 수 있다.
2000년 세상을 떠난 시인 서정주 또한 이 곳에서 31년 동안 살았다. 봉산산방(蓬蒜山房)이란 이름이 붙은 2층 양옥집은 사당초등학교 뒤에 있는데,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2003년 서울시가 매입을 해 철거는 피했지만 개조 비용이 없어 내버려둔 상태다.
봉산산방은 겉보기에도 버려진 집 같다. 비틀린 대문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있다. 담은 허름하고 담 위로 낙엽이 잔뜩 쌓여 있다. 담을 덮었던 기와는 군데군데 벗겨진 상태다.
담 너머로 보니 안은 더 처참하다. 곳곳이 무너진 가운데, 쓰레기장마냥 낙엽이 쌓여 있다. 돌기둥 위는 탄 흔적까지 있다. 적어도 몇 해는 방치된 모양이다. 대문엔 여전히 '서정주' 명패가 걸려 있다.
집이 방치된 이유는 개조 비용 때문. 7억 원에 이르는 비용을 시와 구가 미루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시는 '매입 비용을 댔으니 끝'이라는 입장이고, 구는 '재정상태가 어려우니 서울시가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술인 마을은 2000년 서정주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2003년 예술인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역사가 됐다. 하지만 마을엔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촌길' '예촌마트' '예술인미용실' '예촌어린이공원' 등이 그것이다.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던가.
여동생네가 살아 자주 찾았던 동네
남현동은 여동생이 결혼 전·후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라 자주 찾던 동네다. 한적한 동네라는 게 갈 때마다 느꼈던 기분이다. 관악산 자락에 만들어진 동네라 여동생 집에 갈 때는 산을 타야 했다.
가끔씩 여동생네와 관악산 쪽에 있는 관음사에 가기도 했다. 관음사를 향해 산을 올라가다 계곡에 이르면 슬레이트집 몇 채가 모인 곳이 있다. 000기도원이다. 집은 바람과 비만 간신히 피할 정도로 소박하게 지었다. 다 땐 연탄을 쌓은 곳도 보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큰 욕심을 갖고 있을 것 같진 않다. 슬레이트집 너머로 아파트가 보였다. 삶과 욕망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계곡 옆엔 '산골집'이라는 식당이 있다. 오리나 닭을 파는 곳이다. 오랫동안 바람과 비를 맞아 색이 바랜 간판이 한적한 동네 풍경과 잘 어울린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으니 주인이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묻는다. 여기 뭐 찍을 게 있나 싶은 눈치다.
여기서 산 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관음사다. 사당역에서 700m 정도 떨어진 이 절은 신라 진성여왕 9년(895년) 도선국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역사가 1000년이 넘는다. 역사는 오래 됐지만 건물은 요즘 것이다. 1924년 전석주 스님이 요사채 1동을 신축하면서 다시금 관음사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이후부터다. 박종하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 2005년까지 28년간 이어진 불사에 따라 지금 모습이 됐다. 절에서 오래된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건 수령 300년을 헤아리는 입구 나무 뿐이지만 주변은 고즈넉하다.
남현동은 빌라촌이다. 길은 자동차가 쉽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곧고 넓다. 집은 훈련병들 머리처럼 비슷비슷하다. 바쁘게 사는 직장인들이 몸만 눕히는 이 동네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어디 동네라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스러운 것일 리 없다. 남현동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개혁군주' 정조의 흔적이 서린 곳이고, 백제가 한강을 다스리던 시절 토기터가 있던 곳이다. 게다가 몇 십 년 전엔 유명 예술인들이 대거 살았던 예술인 마을이었다.
술 마시기 좋은 동네가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골목과 골목, 관악산 자락을 따라 남현동을 누비다 보면 무뚝뚝할 것만 같은 빌라촌에서도 농익은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