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짜인 여행은 답답한 법, 히치하이킹으로 가자 "투어 신청할래요?" 끄레엘 숙소의 아침은 이런저런 투어를 권유받는 소리를 가려내기에 바쁘다. 보통 쿠퍼 캐년(cooper canyon), 인디오 보호 구역 관광 등이 메인이고 더 비싼 요금을 지불하면 까사라레 폭포(Casada Cusarare)와 아라레꼬 호(Lago Arareco), 산 이그나시오 교회까지 가는 당일 코스의 투어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조금 더 욕심을 내 여행을 해보자면 길이 245m의 멕시코 최대 폭포인 바사세악식(Basaseachic)과 은 광산으로 번성한 계곡도시 바또삘라스(Batopilas)에서 쿠퍼 캐년 트레킹의 진수를 맛보아도 좋다. 하지만 이 몸은 휴식을 취하러 온 와중에도 어디 그 성격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틀에 짜여진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뜬금없이 히치하이킹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늦게 일어나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쿠퍼 캐년으로 향하는 메인 도로로 나왔다. 차량이 지나칠 때마다 피어오르는 먼지바람에 고개를 돌려보지만 매캐한 자극에 표정은 찡그려진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핀 채 무덤덤하게 때론 애타게 잡아보지만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좀처럼 쿠퍼 캐년으로 가는 차가 없다. 한 시간 동안 손을 흔들어 보낸 차량만 수십 대. 철퍼덕 마음이 내려앉은 채 영 활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히치하이킹 사상 최악의 실적이다. 하지만 기다리면 때는 오게 되어 있노라고 고진감래의 낙이 끝내 내게 찾아왔다. 운 좋게도 아예 쿠퍼 캐년에 산다는 현지인 소형 트럭에 탑승을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광대함으로 치면 그랜드 캐년 저리가라는 쿠퍼 캐년의 풍경을 느긋이 감상하겠다는 내 기대마저 씻겨나갔다. 아무래도 전망 보기는 틀린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먹고 보자 변죽 울리는 하늘을 원망하며 쿠퍼 캐년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다는 디비사데로(Divisadero) 역에 도착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전망대를 향해 걷던 나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세찬 비가 내린 까닭에 풍경 감상은 이미 체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놀부 같은 심통으로 애꿎은 돌만 차보지만 돌아오는 건 의미없는 충격 뿐.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어슴푸레 운무에 둘러싸인 산들이 보이자 내 발걸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지 먹고 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이따가 절경을 감상할 때 온 정신의 집중을 다하기 위해 일단 배부터 채울 필요가 있었다. 전망대 뒤쪽에 위치한 철길 바로 옆에는 여러 노점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따끈한 먹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꽃달임도 아닌 것이 눈으로만 봐도 이미 감격에 겨워버릴만큼 요기가 된다. 음식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해도 냄새가 눈으로 잡히고, 맛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무엇을 먹든 나는 이미 황홀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드라운 치즈가 혀 끝에서 살살 녹고... "15페소야." 관광지임을 고려해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다. 한 입 거리에 무려 15페소라니. 과연 귤 3kg(시골은 귤 1kg에 2페소까지 한다)만한 가치가 함의되어 있는지 내가 생경스런 이 음식에 감응하여 온 몸을 파르르 떨만한 맛의 르네상스가 펼쳐질는지 잠시 의심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 문장 하나로 결론은 미리 정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여기 와서 이걸 먹어?' 우선 칠레 레요에노(chile relleno)과 고르디타스(gorditas)를 집었다. 칠레 레요에노는 쉽게 말해 고추치즈튀김이다. 고추 안에 잘 볶은 고기에 치즈를 듬뿍 넣은 것이다. 고르디타스는 고소한 맛이 배가된 타코의 튀김버전이라고 보면 얼추 비슷할 것 같다. 여하튼 처음으로 마주한 두 가지 음식을 조심스레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음식을 먹을 때 눈을 감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맛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도저히 속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그 맛에 감읍하여 감정까지 밀어넣지 않으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경우다. 나는 지금 후자의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입 안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나라에 압도되어 있는 중이다. 칠레 레요에노의 보드라운 치즈가 혀 끝에서 살살 녹고 고르디타스의 바삭바삭한 느낌이 미각세포를 흔들어 깨우는 순간 내 정체성이 식신으로 바뀌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난 이미 맛의 환상을 경험한 채 무언가에 홀려 있는 상태였다. "아주머니, 두 개 더 주세요."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매콤한 고추치즈 튀김. 으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하나 먹고, 맛을 보고는 당연히 다시 하나 더 먹고, 비싸서 여기까지만 해 놓고 또 하나 더 먹고 배가 찼다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하나 더 먹고. 주머니 사정만 아니었음 자리를 전세내고 싶을 정도였다. 불운하게도 비는 계속 내렸고 안개가 자욱해 처음 예감 그대로 쿠퍼 캐년의 웅장함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여행의 궁극적 깨달음은 식도락에서 얻는다는데 맛에서 감정의 밑바닥이 세차게 요동칠 정도면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과장이 없을 성 싶다.
그러고 보니 중복 여행이네 한 점 지나지 않는 먹거리지만 함께 먹으면 만찬이 되고 무리지어 수다를 떨면 파티가 되는 것을. 기찻길 옆 노점은 짧은 시간동안 냄새에 이끌리고 맛에 중독된 각국의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자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소화도 시킬 겸 장엄한 쿠퍼 캐년의 장관을 보기 위해 전망대로 내려갔다. 삽시간에 퍼지는 안개에 경치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지만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만의 위엄함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트레킹을 해볼까 했지만 무등산 등반도 헉헉거리는 내 참담한 체력과 산에 대한 무관심을 잘 알기에 이쯤해서 맛만 보고 그만 두기로 했다. 조용히 어둠이 깔리고 멀리서 기적 소리를 내던 기차가 안개를 헤치며 기찻길에 빨려왔다. 크레엘로 다시 갈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디비사데로 역은 굳이 내가 히치하이킹으로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열차를 이용하면 자연스레 경유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15분간 정차해서 승객들이 충분히 관람할 수 있게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인데 혼자 히치하이킹으로 온다고 촐싹댔더니 그만 중복 관람을 한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보게 될 것을. 차라리 아침에 가이드 권유대로 인디언 마을 투어를 할 걸 그랬다. 아직도 초보여행자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듯하다.
고민을 거듭하다, '그래 결심했어' 기차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이 노점들로 가 한 봉다리씩 음식을 산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쿠퍼 캐년 경치를 구경하는 일부 여행자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마지막에는 급히 먹거리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안단테의 리듬으로 연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손과 음식들을 곁눈질하던 눈이었는데 기차 출발 시간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는 이젠 마음까지도 라르고 템포로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옆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또 미처 맛보지 못한 것들은 기차 안에서 먹을 요량으로 재차 구입하는 것을 보고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그 밑바탕엔 물론 식욕에 대한 본능이 심하게 자극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우리 만남이 빙글빙글 돌아 다시 재회할 가능성은 바다로부터 갈매기들이 자신의 부리로 스스로 깃털을 뽑고 숯불로 날아 들어와 장렬하게 산화하여 해안가 어느 저녁 식탁에 올려져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 줄 확률만큼이나 낮아 보이는데. 승객들이 거의 다 타고 마지막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때 맛과 가격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심해야했다. 아주머니는 뭔가를 이미 감지하기라도 한 듯 심각해진 내 모습과는 다르게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나 같은 손님을 어디 한두 번 경험해 본 것도 아니었을 터. 이미 예상을 했던 것일까. 아주머니의 마지막 손님들을 위한 손놀림은 플래시맨의 21세기적 환영을 보는 듯했다. 나는 머리보다 앞서는 주책바가지 입술을 내밀고 혀를 좌우상하로 놀려가며 2배속 재생으로 칠레 레요에노과 고르디타스를 각각 두 개씩 주문했다. 그러고는 전광석화와 같은 액션으로 달려가 기차의 마지막 탑승자가 되었다.
맛에 매료되어 아이처럼 마냥 기뻤던 하루 기차가 출발하고 아득히 멀어지는 노점상의 먹거리들이 작은 점이 되어갈 때 나는 벌써부터 주체하지 못할 만큼 그리움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도 혼자 보면 슬프지만 너무 맛있는 것도 혼자만 먹으려니 목이 멘다. 내 손에 들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먹거리를 들고 식당칸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나처럼 디비사데로 역 노점음식에 환장한 동지들이 있어 함께 먹으면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칸에 들어서니 우아한 매너 대신 왁자지껄한 생동감에 입맛이 더욱 살아난다. 청춘의 가슴은 숨만 쉬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라고 있는 것이다. 인디오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칠레 레요에노와 고르디타스에 아이처럼 마냥 기뻤던 하루. 오늘 이 가슴에 벅찬 환희가 또 하나 새겨졌다. 그리고 그 맛에 매료되어버린 이 환희를 또 누군가와 나눠야 할 책임있는 몫이 지금 나에게 남겨졌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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