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수양대군, 정조.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왕들이다.
왕자 시절에 정안군으로 불린 이방원은 죽은 뒤에 태종이 되었다. 이유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수양대군은 사망한 뒤에 세조가 되었다. 이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정조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손(元孫)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군호(예컨대, 정안군이나 수양대군 등)를 따로 받지는 않았다.
여기서 이방원·이유·이산은 휘(諱), 정안군·수양대군은 군호(君號), 태종·세조·정조는 시호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위 3인을 부를 때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주로 휘로 부르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주로 군호로 부르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주로 시호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이방원의 경우에는, 태종이라고도 부르지만 그보다는 주로 이방원이라고 부른다. 한편, 정안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양대군의 경우에는, 세조라고도 부르지만 그보다는 주로 수양대군이라고 부른다. 그를 이유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조의 경우에는, 이제까지 이산이라고 부른 경우는 없었고 그냥 정조로만 불러왔다. 드라마 <이산>에서 성송연이 꼬마 세손에게 “산아”라고 불러주자, 이산은 “할바마마와 아바마마 외에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며 신기해 한다. 청나라 사행단에 합류하기 전날의 ‘심야 데이트’ 때에도 성송연은 또 한 번 “산아”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정조가 '정조'로만 알려진 이유는?태어나면서부터 원손에 봉해진 이산에게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정말로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드라마 <이산>이 아니었다면, 정조의 본명이 이처럼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이 있다. 왜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은 태종이나 정안군이란 칭호보다도 이방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가? 왜 조선 제7대 임금 세조는 세조나 이유보다도 수양대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가? 왜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이산보다는 정조로 더 잘 알려져 있는가? 이러한 차이를 파악하면, 드라마 <이산> 제41회에 방영된 전투 장면이 얼마나 엉뚱한 것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 인물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는 그 인물이 전체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대중이나 역사가의 주목을 받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방원의 경우에는 조선왕조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활약을 펼쳤으므로 이방원이란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는 정안군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역사무대에 명함을 내민 인물이다.
수양대군의 경우에는 대군 시절부터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대군 시절에 한명회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수양대군이란 이름이 역사 속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이 국왕 등극 이전에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장자로서 무난하게 왕위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태종이나 세조로만 불렸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특별히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휘나 군호를 따로 살펴보겠지만, 일반 대중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역시 그가 장자로서 무난하게 왕위에 올랐다면 결코 충녕이란 이름이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대군이었을 때에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그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대중이나 역사가들은 충녕대군 시점부터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정조의 왕위 등극도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 영조의 신임 덕분에 무사히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정조가 이방원과 수양대군과 다른 점그가 이산보다는 정조로 잘 알려진 것은 국왕 등극 이전의 그의 생애에는 아버지를 잃은 것 외에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일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원손이나 세손 시절에 그가 역사적으로 인상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정조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정조로만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중이나 역사가들이 국왕 등극 이후의 정조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의 국왕 등극 이전에는 인상적인 사건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점을 감안하면, 드라마 <이산> 제41회에서 방영된 궁중 쿠데타 장면은 좀 난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세손 이산이 군사 쿠데타를 막아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다면, 대중이나 역사가들은 분명히 정조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도 그를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들은 국왕 정조 못지않게 세손 이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렇게 한 역사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도 마찬가지다. 한국 대중의 기억 속에는 그는 오로지 정조일 뿐이다. 이는 세손 시기의 이산에게 쿠데타 같은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의 흥행을 위해 쿠데타 장면을 삽입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대중의 역사지식을 왜곡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역사 드라마는 일반 드라마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드라마, 역사를 왜곡하면 안돼<태왕사신기>처럼 픽션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라면 모르지만, <이산>처럼 진짜인 것처럼 방영되는 드라마는 적어도 한동안만이라도 대중의 역사지식을 왜곡할 수 있다. 정조를 소재로 한 또 다른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산은 궁중 쿠데타를 극복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오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산의 등극 과정을 보면, 굳이 쿠데타 신(scene)을 넣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드라마를 구성할 수 있는 사실관계들이 많다. 홍인한과 세손의 대결, 정후겸과 세손의 대결, 각종 투서와 음해, 자객설 등등. 드라마 작가가 정조의 생애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쏟았더라면, 굳이 쿠데타 같은 허구적 요소를 삽입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제41회 방영분처럼 흥행을 위해 ‘좀 더 진한 것’으로써 시청자들을 자극하려고 할 경우, 앞으로는 ‘보다 더 진한 것’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산>은 개혁군주 정조의 생애를 소개하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자극적인 액션 드라마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경우 정조는 <다모>의 ‘좌포청 종사관’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방원은 정안군이나 태종으로서보다는 이방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점, 수양대군은 이유나 세조로서보다는 수양대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점. 이들에 비해 정조는 오로지 정조로만 알려져 있다는 점.
이것은 정조의 생애가 국왕 등극 이전보다는 국왕 등극 이후에 더 인상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는 발생하지도 않은 쿠데타 신까지 집어넣으면서 국왕 등극 이전의 생애를 보다 더 인상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정조의 생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조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수구보수세력에 맞서 개혁 드라이브를 펼친 개혁군주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생애에서 강조점이 들어가야 할 곳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정조를 좌포청 종사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