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왠지. 이유 같은 건 없다. 바람에 이끌려, 꽃에 이끌려 한 동이 항아리를 안고 표연히 걸어가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 일이 용납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일 관계의 약속이 몇 건인가 있고, 여기저기에 빚도 있다. 집에는 이런저런 도구니 뭐니 하는 것들이 놓여 있고, 통신판매로 자기복대와 고구마 칩을 주문해 버렸다. 냉장고에는 먹다 남긴 닭고기가 들어 있다.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표연히,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인으로서. 그러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제 마흔 하나가 된 작가 마치다 코우는 일본 내에서는 록 음악가로, 수필가이자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경 산책>이 처음으로 소개되지만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독특한 문체와 화법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독자에게는 아직 그 이름이 낯선 편이나 <동경 산책>은 그만의 문체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 작가는 자신의 나이를 ‘액년을 맞이한 완연한 아저씨, 여행을 떠나기에는 아슬아슬한 연령’이라고 표현한다. 먼 여행을 떠나기엔 나이도 너무 많고 수입도 필요하고 발목을 붙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결국 근교 당일치기 여행을 생각하는 저자는 오전에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덕분에 오후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정오를 지나 항아리 하나를 안고 표현하게 여행을 떠난 후 오후 내내 여행을 하고 저녁, 늦어도 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목표다. 한 마디로 ‘격렬하게 짧은 여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동경 오후 여행은 온갖 우여곡절과 에피소드를 남긴다. 엉뚱한 가게 점원을 만나서 당황하는 일을 겪기도 하고 사쿠라 우동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우동을 주문하지만 맛은 별로 그럴싸하지 못하다. 성질이 나서 밖으로 나가니 진흙탕에 발이 질퍽질퍽하다. 찻집에 가니 커피와 케이크만으로 1250엔이나 받아 챙긴다. 찻집 앞에서 차를 주워 타며 저자는 ‘내 표연 여행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꺾이지 않고 계속된다. 첫 번째 표연 여행의 실패에 질려서 두 번 다시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도 금세 표연해지고 싶다는 기분으로 다시 떠나는 여행. 첫 여행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고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저자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동반자 케이세이 군을 찾는다. 케이세이 군이 두 번째 표연 여행의 목적지로 선택한 곳은 가마쿠라라는 옛 도시다. 저자는 이곳이 좀 평범하고 미리 갈 장소를 정한다는 게 표연 여행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정색을 하지만 케이세이 군은 현지에서 원하는 만큼 표연하면 된다고 강경하게 말한다. 예상 밖으로 가마쿠라 군이 운전을 하고 1박까지 감행하기로 한 두 사람. 저자는 갑자기 1박을 하게 되는 바람에 일을 미리 처리해 두어야 했고 고양이를 돌볼 사람도 찾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불편함에 짜증이 밀려오지만 금세 여행의 즐거움으로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바로 표연 여행의 묘미다. 표연과 만연의 차이가 뭐냐는 케이세이 군의 질문에 저자는 오징어와 문어만큼 다르다고 답한다. 이런 엉뚱한 저자의 입담은 그 다음의 표연 여행에도 이어진다. 케이세이 군이 강하게 추천한 에노시마에 어슬렁어슬렁 가보지만 힘든 언덕과 가파른 고갯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등산의 고통을 맛보면서 저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마음 깊이 반성한다.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케이세이 군 따위와 터덜거리고 있으니까 이런 꼴이 되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정상에 오르지 않고 기슭으로 돌아가는 것도 뭐하다. 이렇게 나는 지금 인생을 대충대충 사는 내 태도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는데, 조금 전에 나는 정상에 오르자고 결정했다. 일단 결정한 것을 괴롭고 힘들다고 도중에 포기하는 건 인생을 대충대충 사는 태도임에 틀림없다. 물론 에스컬레이터처럼 비겁한 것에 타지 않는다. 즉,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정상에 올랐건만 허무하고 적막한 느낌에 자신이 더더욱 한심하게 생각된다. 내려오는 길은 더더욱 한심하다.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부히히, 내리막이다. 편하다’라고 돼지처럼 만족하고 기뻐하더라도, 그 길은 한편으로는 오르막이자 내리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표연 여행을 거듭하다 보니 저자는 도에 통달한 사람처럼 여유롭다. 얻은 건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는 작가. 그는 그저 표연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짓을 하는 작가와 친구의 행동이 세상의 눈에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딱히 자신들의 행동이 카메라 따위에 촬영되어 그 영상이 전국에 방송되는 것도 아니기에 이 멍청한 여행은 계속된다. 여행의 중간 중간에 꼬치가스 개수가 남보다 덜 나와서 맘 상하는 일도 생기고 그로 인해 꼬치가스 가게에 집착하는 묘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여행은 여전히 자신이 추구하는 ‘표연함’에 근접해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유명하다는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일본 민족들의 독특한 사고에 놀라게 된다.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은 보다 미세한 일들에 집착하고 보다 꼼꼼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제 3자적 입장을 많이 취하는 것 같다. 그들의 이런 사고는 글에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면 <동경 산책>도 읽을 만하다. 동경 주변을 유유자적하면서 작고 황당한 일에 집착하는 저자의 독특한 문체를 따라가 보자. 그러면 일본인과 일본,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사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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