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밤에 방영될 <이산> 제45회에서는 이산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즉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막판까지 이산을 암살하려는 정후겸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동궁 측의 대결이 극의 긴장감을 더하게 될 것이다.
서기 1776년 4월 27일 ‘눈물의 즉위식’을 치른 정조 임금은 행사 후에 전국적으로 즉위교서를 반포한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 취임사’를 대신하는 문서를 반포한 것이다. ‘연설문’을 실제로 작성한 사람은 대제학 이휘지였다.
그럼, 정조의 즉위교서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었을까?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3월 10일자 기사에 그의 즉위교서 전문이 실려 있다. “왕은 말하노라”라고 시작하는 이 교서는 서두에서 즉위의 불가피성부터 지적한다.
“힘써 여론을 따르고 공손히 법도를 따르려 한 것일 뿐, 어찌 임금의 자리를 편히 여겨서이겠는가?”
이와 같이 백성들의 여망과 왕조의 법도에 따른 것일 뿐 결코 임금의 자리를 가벼이 여겨서 이 자리에 오른 게 아님을 강조한 다음에, 그는 선왕인 영조의 치적을 칭송하고 그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한다.
정조, 즉위교서에서 영조에 대한 그리움 절절하게 표현조서에 언급된 선왕의 치적으로는 이런 것들을 들 수 있다. 얇은 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국정을 운영한 점, 가난한 서민들의 곤궁을 풀어주는 일에 전념한 점, 왕실 재정을 검소하게 하고 효제(孝悌)를 널리 퍼지게 한 점 등이다.
정조가 선왕의 치적 몇 가지를 언급한 것은, 이후 정조 자신이 그것들을 모범으로 삼을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국정 운영, 기득권층보다 서민을 먼저 생각하는 경제정책. 자신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특히 그 점들을 강조한 것이다.
선왕의 치적을 칭송한 다음에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사모의 정을 애절하게 표현한다. 자신의 치세가 선왕의 치세를 계승하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자기 권력의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등(金縢)에 글을 넣어 이 몸으로 (죽음을) 대신하기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옥궤(玉几)에서 명령이 내리며 영원히 수염을 움켜쥐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 ‘금등에 글을 넣어 이 몸으로 대신하기를 빌었다’는 것은 <서경>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표현이다.
주나라 무왕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아우인 주공이 무왕 대신 자기를 죽게 해달라는 내용의 글을 궤짝에 넣어 쇠줄(금등)로 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무왕의 병이 기적처럼 나았다고 한다. 선왕을 살리려고 그렇게 빌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정조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주나라 때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영원히 수염을 움켜쥐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는 말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의 고사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움켜쥐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는 붙들지 못하고 그냥 용의 수염만 뽑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염을 움켜쥔다’는 것은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죽음에 임박한 영조를 붙들어두려고 저승사자의 수염을 잡아보았으나 결국 수염만 움켜쥐게 된 정조의 허탈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정조의 즉위교서에서는 영조 임금에 관한 내용이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영조의 비중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선왕의 권위를 빌려야 할 만큼 정조의 권력이 아직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즉위는 했으나 권력은 불안정한 상태영조의 치적을 칭송하고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뒤에, 정조는 정순왕후 김씨를 왕대비로 올리고 빈(효의왕후) 김씨를 왕비로 올렸음을 선포한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번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 마음가짐을 되새긴다. “크고 힘든 왕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며 “(선왕으로부터) 부탁받은 것을 혹시라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즉위 기념 사면을 선포한다. “오늘 새벽 이전에 사형죄 이하의 죄를 지은 잡범은 모두 용서한다”고 했다. 52년간의 영조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사법적 조치였다.
군왕이 백성들의 죄를 사면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깨끗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된 군왕이 대대적 사면을 시행한다면, 그것은 사면을 받는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겠지만 국가적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깨끗한 선지자의 손이 닿아야만 병자의 몸도 나을 수 있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스물다섯 살의 청년군주인 정조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조의 즉위교서에는 이른 바 ‘나’가 없었다. 선왕인 영조의 치적을 칭송하고 백성들을 사면하는 내용과, 정조 자신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내용뿐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밝게 빛내려는 겸손한 군주의 마음자세가 드러난 즉위교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높이고 스스로를 낮추는 즉위교서의 내용처럼, 이후 정조는 개혁적 계몽군주로서 죽기까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불태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