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그 놈 참. 만날 엉덩이에 바지가 걸쳐 있어.” “허허허, 그러게 말여. 그것도 패션인가벼.” 시골 마을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 집 막내둥이 아들아이(9)가 골반 바지를 입고 동네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며 한마디 하신다. 패션의 첨단을 걷는 자들만이 입는다는 골반바지 있지 않은가. 엉덩이에 반쯤 걸쳐서 골반이 보일 듯 말 듯 감칠맛 나는 바지. 섹시의 대명사인 바로 그 바지 말이다. 이 바지를 우리 집 막내둥이 아들(9세)은 자주 입는다. 입었다 하면 대부분이 골반 바지다. 우리 아들이 유행을 선도한다고 자랑하려고 이 말 하나 싶겠지만 이유는 따로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막내둥이가 바지를 반쯤 걸쳐서 입는 것은 순전히 바지를 얻어 입기 때문이다. 주위로부터 물려받아 입는 거 말이다. 오래된 바지이다보니 허리 쪼임이 느슨해져 항상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못한 아내가 멜빵을 해주곤 했는데 막내둥이가 여간 불편해 하는 게 아니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화장실 출입 문제 때문에 멜빵 바지를 얼마나 귀찮아하는지 경험해본 부모들은 잘 알 게다. 그래서 첨단 패션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재량을 발휘한 것이다. 하도 그래서 가끔씩 아들아이에게 새 옷을 사주었는데, 웃기는 것은 새 바지를 입었는데도 엉덩이가 내려와 어설퍼 보이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다. 진짜로 골반 구조가 골반 바지만 입을 팔자인가 싶어 아내와 나는 웃을 수밖에. 사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동안 참 많이도 얻어 입혔다. 참 고마운 것은 큰 딸아이(중2)도 그런 대세(?)를 거스리지 않고 잘 따라 주었다는 거다. 유명 메이커 옷을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 틈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주면 주는 대로 입는 딸아이가 대견스럽다. 아내가 가끔씩 딸아이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옷을 사 주어도 불평하나 없이 잘 입는 것은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 큰 재산 중 하나다. 이런 것도 서로 맞지 않으면 곤란하고 속상할 텐데 말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어렸을 적에 예외가 아니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 태어난 나와 동생들(3형제)은 옷을 물려 입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살았다. 큰아이가 먼저 옷을 사면 동생들도 대대로 물려받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은 형제들이 청소년이 되면서부터는 동생들보다 내가 덩치가 작아서 거꾸로 동생에게 물려받는 일도 가끔 있었으니 웃긴 일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 시절 우리 집만 그랬을까. 서민들은 집집마다 형제들끼리 물려받는 것이 기본이었고, 자녀들보다 나이 많은 친척 아이나 이웃 아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여긴 시대가 있었지 않은가. 그나마 그것도 성별이 맞아야지 맞지 않으면 그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니 아쉬움으로 혀를 끌끌 찼다는 걸 요즘 아이들은 알기나 할까. 내 옷만 해도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는 옷이 지금도 상당수다. 체격이 왜소한 나는 주위의 남성들이 입다가 유행이 지나거나 작아져서 못 입으면 얻어 입는다. 그래도 괜찮은 옷이 많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옷 물려받는 전통(?)을 아이들에게 대물림 하면서 그것이 서럽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가치 있다는 아나바다 정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식이라는 것, 실용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패션의 첨단을 걷는 막내둥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글을 쓰는 여유가 있는, 삶의 여러 방식 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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