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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순환도로에서 바라본 가리봉동
남부순환도로에서 바라본 가리봉동 ⓒ 김대홍
 가리봉동엔 오래된 이발소, 식당, 여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어느 곳에나 바뀌지 않아 분통을 터트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너무 바뀌어 아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리봉동엔 오래된 이발소, 식당, 여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어느 곳에나 바뀌지 않아 분통을 터트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너무 바뀌어 아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 김대홍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500개 가까운 서울의 동 가운데 가리봉동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도 흔치는 않을 듯 싶다. 동네에 가기 전 경남 마산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가리봉동에 간다'고 했더니 "가리봉동 잘 알지"라고 하신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구로공단이 있었고 지금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있는 이 동네는 많은 예술인들이 사랑한 곳이다.

 

1977년 작품인 <불타는 소녀>를 비롯,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을 때까지>(1987), <구로아리랑>(1989), <장미빛 인생>(1994), <박하사탕>(1999), <눈물>(2000), <가리베가스>(2005) 등 숱한 영화가 가리봉동과 구로공단을 소재로 다뤘다.

 

그 뿐인가. 작가 황석영은 1970년대 초반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해 지금의 통합민주당 대표인 손학규와 가리봉동 벌집(작은 쪽방)에서 살았다. 작가 신경숙 또한 1978년 고향 정읍을 떠나 구로공단에서 여공 생활을 하며 가리봉동 생활을 했다. 그 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러 작가들이 가리봉동에서 창작열을 불태웠다.

 

구로공단은 산업단지로, 여공들의 거리엔 조선동포들이

 

 영화 <바람불어좋은날>. 오른족이 구로공단 노돌자로 나온 임예진이다.
영화 <바람불어좋은날>. 오른족이 구로공단 노돌자로 나온 임예진이다. ⓒ 동아수출공사

이런 작가들의 체험은 고스란히 작품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박노해는 세상을 놀라게 한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가리봉시장'이란 시를 읊었고, 양귀자와 신경숙은 각각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1995>)와 <외딴방(1996)>을 통해 가리봉동을 그렸다.

 

그렇게 본다면 가리봉동은 영화의 거리, 문학의 거리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듯 싶다.

 

다양한 작품에 나왔지만 공통점이 있다. 대규모 공단 지역, 저소득층 밀집지역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반복해서 남겨진 이미지는 강렬하다.

 

허나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 가리봉동 또한 조금씩 바뀌어왔고, 최근 이미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구로공단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뀐 것은 매우 큰 변화다. 굴뚝공장들이 들어서 있던 자리엔 아파트형 공장들이 하늘을 찌른다. 여공들이 누볐던 거리 또한 이젠 조선동포들이 채우고 있다.

 

최근에는 동명을 바꾸는 일이 추진되기도 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도시는 흥망과 성쇠가 반복된다. 가리봉동은 그 부침을 가장 극적으로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곳이다.

 

지난 3월 이 동네서 태어나 몇십년 동안 살다 지금은 인근 동네로 이사한 나영준 시민기자와 함께 가리봉동과 인근 구로동 일대를 걸었다.

 

<박하사탕> 영호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 1979년 가리봉동

 

1980년 이장호 감독이 연출한 <바람 불어 좋은 날>에는 중국집에서 일하는 덕배(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덕배는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한 여자는 상류사회 여성인 명희(유지인)이고 그와 대비되는 인물로 구로공단 여직공 춘순(임예진)이 나온다.

 

1989년 이세룡 감독이 연출한 <내친구 제제>에서 주인공 제제의 아버지가 일하던 곳은 구로공단이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실직을 하면서 제제 집안의 비극이 시작된다. 1994년 작품인 <장밋빛 인생>과 2000년 작품인 <눈물>에선 오갈 데 없는 인생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가리봉동이 묘사된다.

 

이창동 감독 작품인 <박하사탕>(1999)에서 가리봉동은 주인공이 너무나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로 나온다. 영화는 1999년 봄 영호(설경구)가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 장소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20년 전 같이 소풍을 갔던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만든 친목회다. 영호는 1979년 소풍에서 첫사랑 순임(문소리)을 만났다.

 

 영화 <초록물고기> 촬영지 중 한 곳인 고물상 건물
영화 <초록물고기> 촬영지 중 한 곳인 고물상 건물 ⓒ 김대홍

 쪽방집. 오른쪽이 공동화장실이다.
쪽방집. 오른쪽이 공동화장실이다. ⓒ 김대홍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나영준 기자가 능숙한 가이드처럼 설명을 한다.

 

"저기 고물상 건물 보이죠. 저기는 영화 <초록물고기>를 찍은 곳이에요. 저기 굴다리는 영화 <구로아리랑>에 나온 곳이에요. 옥소리와 이경영이 굴다리에서 뭘 했는데, 뭘 했더라? 가리봉동 모습이 제일 잘 나온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장밋빛 인생>이죠. <장밋빛 인생> 봤죠?"

 

가리봉동 여행을 위해 남구로역에서 나왔더니 영화 <눈물>에서 봤던 집과 길들이 보인다.
 
공동화장실과 좁은 방들. 나영준 기자가 '벌집'이라고 설명한다. 2~3평짜리 작은 방들로, 한 건물에 20~30개씩 방이 있다. 1970~80년대 여공들이 주로 살았던 이 좁은 방엔 지금 조선동포들이 주로 산다.

 

값이 싸 주머니 가벼운 이들의 안식처였던 쪽방은 지금도 여전히 싸다. 100만원 이하 보증금에 10만원대 월세인 방이 눈에 많이 띈다. '보증금 30만원, 월세 12만원'인 광고를 보고 "무척 싸다"고 했더니, 나영준 기자는 "보증금이 아예 없는 곳도 있다"고 말을 보탠다.

 

한 눈에 봐도 오래된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띈다. 30년 된 식당과 40년 된 목욕탕, 50년 이상 됐다고 알려진 여관과 여인숙. 가리봉시장과 구로시장도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다. 우리은행 구로동 지점도 오래돼 보인다. 나영준 기자가 "어릴 때부터 다녔던 곳들"이라고 말한다. 부동산 간판이 붙은 한 건물을 찍고 있으니, 한 아주머니가 "거긴 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하며 웃으며 지나간다.

 

가리봉2동에 있는 높이 10m짜리 측백나무는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수령이 약 500년이니 조선시대 초창기부터 이 동네서 살고 있는 셈이다. 원래 두 그루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으나 8·15 해방을 전후해 한 그루가 사라졌다.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민이 뽑은 서울명소 600선'에 수록돼 있다.

 

명소로 지정돼 있지만, 집과 집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한국 수출 비중 10%의 구로공단, 한 때 노동자 11여만명

 

 과거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구로공단은 이제 없다. 아파트형공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산업단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과거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구로공단은 이제 없다. 아파트형공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산업단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김대홍

가리봉동이 쇠락한 동네의 표본처럼 회자되지만 그것은 1990년대 10년간 기억일 뿐 1970~80년대 가리봉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네였다. 구로공단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고, 노동운동의 역사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꽃피었다.

 

가리봉동을 상징한 구로공단의 공식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단이다. 1964년 발족한 구로공단은 구로구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 198만2천㎡에 만들어졌다. 1964년부터 88년까지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이 동네에서 열리면서 한국 경제 전초기지가 될 것임을 널리 알렸다.

 

전성기였던 1986~88년엔 전체 고용규모가 11만여명이 넘었고,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0% 가량 됐다. 1988년 수출액이 56억3600여만달러였으니 지금 돈으로 따지면 5조가 넘는다. 1985년 6월 24일엔 최초의 노동자 연대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번성했던 시기에 대해서 묻자, 나영준 기자가 바로 눈 앞 풍경인 것처럼 설명한다.

 

"여기 중국동포 거리 보이죠? 그 당시에 평일 밤이나 주말이 되면 지나가질 못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요. 거의 명동 수준이었죠. 당시 극장이 네 개가 있었는데, 명절 때 영화라도 볼라치면 자리가 없었어요. 여기하고 저기가 다 극장이 있던 자리예요."

 

구로공단은 1989년 처음으로 전년도보다 수출액이 줄어든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이어간다. 95년엔 고용규모가 전성기의 1/3 수준인 4만명대, 98년엔 2만명대로 줄어들었다. 90년대 내내 내리막길을 걷던 가리봉동이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디지털산업단지로 성격을 바꾼 것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1997년 442개에 불과하던 총입주회사는 2000년 12월 712개로 늘었고, 지난해엔 7200개로 10년 사이 10배 이상 늘었다. 고용규모도 9만5000명에 이르러 전성기 시절에 다가섰다. 관리업체인 한국산업단지측은 올해 말 입주기업 8500개, 고용규모 11만명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에도 반영돼 이영은 감독의 2005년 작품 <이대로, 죽을 순 없다>엔 구로디지털단지가 배경으로 나왔다.

 

이렇게 보면 가리봉동의 역사를 25년의 영광과 10년의 쇠락, 10년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5년의 영광과 10년의 쇠락, 그리고 10년의 변화

 

 가산디지털단지역은 2003년 '가리봉역'에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은 2003년 '가리봉역'에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 김대홍
 우리나라가 이미 다국적 사회라는 것을 가리봉동에 가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이미 다국적 사회라는 것을 가리봉동에 가면 쉽게 알 수 있다. ⓒ 김대홍

경제 성장과 함께 가리봉동 노동자들의 몸값이 올라갔고 땅값 또한 올라갔다. 인력집중형 산업은 동남아 국가들의 저임금 공세에 서서히 잡아먹히고 있었다. 서울을 주거지 및 상업지역화하려는 정부 정책 또한 구로공단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한국 노동자들이 떠난 구로공단엔 조선동포들이 새로 들어왔다. 지금 가리봉동은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 독산동, 경기 안산 원곡동 등과 함께 조선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 중 하나다.

 

영화 <가리베가스>는 가리봉동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리봉동 쪽방에 살던 선화는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가리봉을 떠난다. 대신 그 자리에 외국인노동자가 들어온다는 설정을 통해 가리봉동의 주역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줬다. 영화를 만든 김선민 감독은 실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행정자치부가 파악한 외국인 등록현황에 따르면 2007년 5월 구로구 외국인은 2만1000명이다. 한 해 전 1만3499명에서 1년 사이 7000여명이나 늘었다. 그 중 상당수는 중국 국적이다. 2000년 586명이던 구로구의 중국 국적 외국인은 2002년 1158명, 2004년 6636명, 2005년 9410명으로 가파른 상승세다.

 

굳이 통계를 보지 않더라도 남구로역에서 나와 가리봉1동 일대를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포사랑교회, 서울중국인교회, 동포사랑치과, 중국노래방 등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한 단체나 가게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동사무소는 아예 중국동포나 중국 한족들을 위해 중국어 공지문을 써 붙였다.

 

길을 걷다 보니 말투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재미있는 가게는 다국적 노래방. 한국·중국·인도·베트남·몽고·러시아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돼 있다. 가리봉동에 얼마나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잘 보여준다.

 

 가리봉동 근처 구로동에서.
가리봉동 근처 구로동에서. ⓒ 김대홍

 

가리봉동의 새겨진 한국 현대사의 문신

 

가리봉동과 인근 구로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배곯던 보릿고개 시절 서울로 취직하러 온 젊은 여공들,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시골에 돈을 부치던 또순이들, 노동착취 현실에 저항하며 떨쳐 일어선 노동자들, 굴뚝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바뀐 산업구조조정, 저임금인력을 대신한 외국인노동자의 대량 유입 등이 가리봉동엔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부모님의 지난 역사를 지울 수 없고, 대한민국 근대사를 뺄 수 없는 것처럼 가리봉동의 역사도 고스란히 우리 것이다.

 

하지만 가리봉동의 지난 역사를 지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 듯하다. 지난해 구로구청은 '구로공단의 회색이미지와 낙후 영세한 가리봉동의 이미지를 바꾼다'는 취지로 새로운 법정동명을 모집했다. 그에 따라 도시브랜드명 우수작으로는 '이루시티'(ERU City)와 '지유시티'(GU City), 법정동명 우수작으로는 '첨단동'이 뽑혔다. 최우수작은 없었다.

 

구로구는 구로본동과 구로2동, 가리봉2동이 포함된 구로1지구를 뉴타운에 신청했지만 지난해 10월 3차 뉴타운 신청에서 떨어졌다.

 

시대가 흐르는 것처럼 가리봉동은 이미 변하고 있다. 단지 지나치게 빠른 변화와 조금 느린 변화가 있을 뿐이다. 가리봉동은 이미 지난 2003년 11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과 강북구 미아동, 동대문구 용두동, 서대문구 홍제동, 마포구 합정동과 함께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돼 개발이 진행 중이다.

 

2003년 4월 가리봉역 또한 가산역으로 바뀌면서 지하철역사명에서 사라졌다. 가리봉역 역사가 금천구 가산동에 있어 승객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금천구 개명 요청에 따라 이뤄진 조치다.

 

오르고 내리는 역사, 가난의 과거 지워야 할까

 

'개발'과 '보존'이라는 말장난 같은 대립보다는 가리봉동이 만들어낸 눈부신 역사를 안고 가는 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오름과 내림은 돌고 도는 법인데, 30년 뒤 디지털산업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 또 과거를 지울 순 없는 법 아닌가.

 

하루종일 가리봉동과 구로동 일대를 거닐면서 느낀 생각은 참 볕이 잘 드는 동네란 점이었다. 높은 산이나 언덕이 없어 걷기에도 편했다. 노동운동 역사유적지, 제1회 대한민국 무역박람회터, 대표기업이 있던 자리, 영화촬영지 표시를 적당한 지점에 해놓았다면 편하면서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거란 생각을 했다.

 

 모든 기차는 상행선이 있고 하행선이 있다. 사람의 역사나 동네 역사도 마찬가지다. 가리봉동은 그렇게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모든 기차는 상행선이 있고 하행선이 있다. 사람의 역사나 동네 역사도 마찬가지다. 가리봉동은 그렇게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 김대홍

#가리봉동#구로동#골목#자전거#미니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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