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에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어린이 가운데 짝꿍이 없는 '나홀로 입학생'은 전국적으로 130여 명에 이른다(잠정 집계). 이들이 다니게 될 대다수의 학교는 농·어촌 학교다.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를 아프게 대변하는 '나홀로 입학생'은 농·어촌의 '마지막 잎새'다. 지난 2000년 창간돼 올해로 만 여덟살이 된 <오마이뉴스>는 올 한 해 동안 여덟살의 '나홀로 입학생'의 벗이 되고자 한다. 시민기자, 독자와 함께 그들이 어떻게 '더불어 함께'의 기쁨을 찾을 수 있을지 모색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 기획을 통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함께 하는 마을' '더불어 함께'의 소중함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
전북 군산에는 네 곳의 학교에 나홀로 입학생이 있었다. 학교 주소를 보니 모두 섬이었다. 그 중에 차로 갈 수 있는 학교가 두 곳이었다. 첫 번째 학교는 취재 내용을 다 말하기도 전에 퇴짜를 놓았다. '대략난감'이었다. 두 번째로 전화한 해성초등학교 내초도 분교장 선생님은 흔쾌하게 허락하셨다.
"그런데 선생님, 내초도 분교를 어떻게 찾아가야 해요?""…글쎄요.""그럼, 네비게이션 찍고 갈게요.""거기에 잘 나와 있을지 모르겠네요."과연, 그랬다. 군산시 내초도동 60번지는 네비게이션에 뜨지 않았다. 다행히도 전화번호를 넣으니까 위치가 나왔다. 새만금 공사하는 곳에 조금 못 미쳐 있었다. 군장국가산업공단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갔다. 덤프트럭에 포위되어서 갔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걸렸다.
내비게이션에도 없는 학교, 올해도 문은 열었다약속 시간보다 일찍 간 바람에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서성였다. 동네는 학교와 붙어있었다. 학교 담장에는 축구공을 찰 때, 이웃 주민들의 지붕이 파손되는 일이 잦다며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1999년에 써 붙인 거였다. 떼어지지 않은 채 경고문의 위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운동장에는 아직도 축구하는 아이들이 들고 나는가 보다.
학교 건물 한 동과 농구골대·축구골대와 철봉이 오밀조밀하게 있는 운동장이 걸어서 모두 몇 걸음인가 가로로 세어보고, 세로로도 세어보고 있었다. 그 때, 검은색 세단 자동차가 멈추어 섰다. 분교장 선생님인가 싶어서 인사를 했다. 내초도 분교 1회 졸업생 최창봉(63·군산 금동)씨였다.
"이 동네 사세요?""난 시내 살아요. 학교가 올해도 문 여나 안 여나 궁금해서 와 봤지.""괜찮대요. 올해 신입생 한 명 있어요.""잘 됐네…. 작년에도 한 명 있었다는데…. 잘 됐어요."최창봉씨는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학교짓는 공사도 거들었다. 그렇게 해서 졸업한 1회 졸업생은 14명이었다.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내초도는 섬이었다. 군산에 나가려면 풍선(돛단배)을 타고 서너 시간을 갔다. 또는 물때를 기다렸다가 갯벌이 드러나면 3시간쯤 걸어서 도착한 미면 파출소 앞에서 발을 씻었다. 그제야 신발을 신고,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에 갔다.
학교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한테 여쭈어서 동네 이장님도 만났다. 내초도가 섬을 면한 지는 40년쯤 됐다. 개간한 다음부터 조개가 많아져서 인구가 늘어났다. 밑천 없는 사람들도 하루에 4~5만원은 벌 수 있는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동네에 아직 학교가 있는 게 자존심이지"라고 말씀하는 이장님도 토박이가 아니다. 30여 년 전에 내초도로 이사 오셨다.
방과후학습까지 책임지는 선생님.. 이런 공교육도 있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땅바닥에 바짝 붙어서 날렵하게 다니는 자동차를 봤다. 그 안에 탄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 시골 마을에 어인 '날라리' 행차인가 싶어서 '쌩깠다'. 학교에 가 봤더니 그가 내초도 분교장 진명식 선생님이었다.
작년에 내초도 분교는 재학생 3명에 입학생 1명, 모두 4명이었다. 2학기 때 황태준 황한솔 남매가 전학 와서 6명이 됐다. 올해 입학생 박현아까지 더하면 총 7명이다. 그러나 2년 전에는 12명이었다. 그 때 진명식 선생님은 <분교 수기 공모>에 '기필코' 당선되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2박 3일 동안 에버랜드와 서울 구경을 다녀오기도 했다.
진명식 선생님은 내초도 분교에서 5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올해 입학하는 현아가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전에는 ㄱ ㄴ부터 가르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도 시내의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지 않는다. 선생님들(진명식·하정훈) 퇴근 시간까지 컴퓨터와 글쓰기를 배운다. 책도 읽고, 한자 급수 공부도 한다.
나는 우리 아이 학교 보내고 공교육에 대한 마음이 비뚤어졌다. 선생님은 붙박이 가구처럼 있었다. 다리를 깁스한 우리 아이가 급식실에 오고 가도록, 아이 고모나 이모, 때로는 '알바생'을 보내야 했다. 한글 공부를 따로 안 하고 학교에 간 아이는 "받아쓰기 때문에 살 수가 없어"하면서 울었다. 나는 왜 미리 한글 떼는 학습지를 시키지 않았을까 괴로워했다.
가끔은 생각했다. 옛날, 우리들은 모두 천재였을까? 어떻게 한글도 안 배우고 학교에 가서도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글을 쓰게 된 걸까? 떠오르는 건 '나머지'였다. 아이들은 받아쓰기를 못하거나 구구단을 못 외우면, 남아야 했다. 학교 끝나면 야구나 축구, 냇가에서 목욕도 할 수 없었다. 그 날의 '나머지'들은 선생님에게 안 들키게 서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들은 오후 5시쯤 되면, 부모님한테 혼날 일을 생각하고는 질질 짰다. 들에 매어놓은 소도 데려와야 하고, 마당에 널어놓은 콩이랑 고추도 들여놔야 하는데…. 선생님은 좀처럼 "합격!"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반에 거의 날마다 '나머지'를 하던 친구는 어둑어둑 해진 뒤, 선생님 자전거에 타고 집에 오기도 했다.
교사 1인당 학생수 3~4명, 여기는 '신이 내린 학교'3월 3일 입학식 날, 본교인 해성초등학교 문원식 교장 선생님은 혼자 입학하는 현아 어머니와 경기도 하남에서 일부러 오신 현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 내초분교는 "신이 내린 학교"라고 하셨다.
선생님 한 명당 학생 수가 서너 명이어서 교육의 질은 높고, 마음껏 볼 수 있는 책도 많고(작년에 본교와 분교를 합쳐서 뽑은 독서왕은 분교의 고승환, 상품으로 자전거를 받았다), 방과 후에도 선생님들이 무보수로 공부를 봐 주니 특별한 학교라고.
'신이 내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스스럼이 없었다. 누군가의 시작으로 말싸움을 하고, 치고받게 되면, 교무실에 와서 고자질을 했다. 신입생인 현아도 동네에서 줄곧 봐왔을 언니 오빠들과 서로 싸울 만큼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입학 첫 날부터 누구한테인가 맞아서 울고 있는 중이라고, 한솔이가 선생님한테 '일르고' 갔다.
나는 이틀 뒤에 다시 학교에 갔다. 영어 시간이었다. 공부는 다 함께 했다. 지난해에 아이들은 영어로 동물 이름까지 말하는 것을 배웠지만 현아를 배려해서 ABC송을 공부했다. 2학년인 한솔이는 현아 공책에 A(에이), B(비)…. 알파벳을 써 주었다. 남자 아이들 다섯은 최선을 다해서 소리를 질러 노래를 불렀다.
여럿이 어울려야 재미난 게 분명해서 체육 시간도 모여서 한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있는 큰 돌을 두 개씩 치운 다음에 체조를 하고 이어달리기를 했다. 신입생인 현아도 '깍두기' 취급 받지 않고 제 몫을 했다.
그러고 나서 축구를 하는데 운동장에 동네 개가 왔다. 한솔이는 개한테 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축구하는 남자애들을 향해 소리쳤다.
"태준이 오빠, 오빠 여자친구 왔어!"손을 씻고 난 아이들은 각자의 교실로 갔다. 3·4학년 교실에서는 황태준·김강림·고승환·김진우가 하정훈 선생님과 공부한다. 1·2학년 교실에서는 황한솔과 박병현 박현아 남매가 진명식 선생님과 공부한다. 그날 현아는 학교 화장실·과학실·컴퓨터실·교무실 이용방법과 한자 급수 시험공부에 대해서 들었다.
초미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커간다점심 시간, 아이들은 다시 함께 모였다. 이 날부터 현아도 학교에서 밥을 먹었다. 아이들은 밥이 올 때까지 현아 식판을 현아 스스로 설거지해야 하는지, 누군가 해줘야 하는지를 가지고 입씨름을 했다. 밥은 군장공단에 오가는 트럭 운전수들을 상대로 포장마차를 하는, 진우 어머니가 보내주신다.
아이들은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현아는 맨 앞자리에 섰다. 진명식 선생님은 현아가 밥을 얼마만큼 먹는지 몰라서 한 주걱 풀 때마다 "현아야, 더?"하고 물었다. 현아는 자꾸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먹고 남기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현아 오빠한테 물었다.
"병현아, 현아 집에서 밥 이만큼 먹어?""예, 많이 먹어요. 더 줘도 돼요."모두가 각자 식판을 들고 제자리에 앉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틈에 아이 둘이 "저, 어쩌면 전학갈지도 몰라요" 했다. 진명식 선생님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이다. 선생님도 약점을 잡혔지만 아이들도 완전히 세지만은 않아서 그 속이 보인다. 괜한 전학 타령을 해서 선생님의 마음을 한 번씩 흔들고 싶은 거다.
뜨거운 음식 앞에서 헤어지는 게 낫다. 식는 걸 핑계로 쉽게 돌아설 수 있다. 하정훈 선생님은 아이들이랑 식사하고, 진명식 선생님이 배웅해 주었다. 선생님은 학습지를 따로 챙겨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처럼, 학교생활을 세세하게 공개해 주었다. 아이들에게 추억도 되고, 도서실에 책을 기증해주는 사람이 나오면 좋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기사에 예쁘게 나오면 좋겠다고.
조그마한 분교 운동장을 지나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곱 명의 아이들은 충분히 예뻤다. 나는 과거로 빨려 들어간 듯 했다. 어릴 때에 농번기 방학이면, 도시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서 며칠씩 묵었다. 동물원에 가고, 책방에도 가고, '모시매 꼬추'처럼 생긴 프랑크 햄도 먹어봤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세상을 보며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