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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사는 촌놈치고 서울을 많이 다녔다. 서울대 병원에 가기 위해서다. 가장 최근의 병은 위종양이었다. 내가 서울대 병원을 찾는 이유는 거의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유아기에 유리창에서 떨어졌을 때 깨진 유리조각에 신경이 절단됐지만, 동네의사가 신경이 끊어진 채로 그냥 봉합해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병이 났을 때는 무조건 서울로 향했다. 다행히 종양을 제거했고 정기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문제는 비행기 값과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다. 당시 돈으로 십여 만원 쓰고 수 시간 걸려 찾아가면 검진은 30초 만에 끝난다. 뭘 물어보려고 해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올라온 촌놈에게 배려할 건더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아도 병원만의 분위기가 있다. 접수를 하고 진료 대기실 앞으로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입구에 A4로 대충 붙여놓은 목록에 내 이름을 확인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의사방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으면 긴장이 된다. 지금 떠올려보면 당시 의사들은 눈앞의 환자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의사들은 '다음 환자'를 보고 있었고, '남은 숫자'를 세고 있었다. 다음 환자가 들어오면 또 다음 환자를 본다. 눈앞의 환자를 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스칼의 한숨이 떠오른다.

 

"사람은 과거에 항상 집착한다. 그리고 미래만을 바라며 행동한다. 그리하여 영원히 '현재'와 만나지 못한다."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의 저자는 일종의 내부고발자다. 의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학을 따로 전공한 전문의가 현장 경험을 회고하며 병원 시스템의 모순을 고발한다.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의사가 환자에게 살갑게 대할수록 자기 자리가 위협받고, 환자를 코 닦은 티슈처럼 팽개칠수록 승진의 확률이 올라가는 처지를 보여줌으로써 정신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의사들이 반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병원 시스템과 의사들의 잠재의식이 사회적 의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 감수성이 괴로울 것이다. 슬프고 화나고 읽는 사람 스스로가 치욕을 느끼게 만드는 실존인물인 의사들과 피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여과 없이 회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알마(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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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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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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