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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새벽빛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저절로 눈이 떠진다. 어젯밤 늦게 도착해 온통 검은빛 뿐이었던 창 밖 풍경이 한꺼번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습기를 머금은 열대 새벽 공기의 푸른빛에 수영장 바닥의 파란색이 더욱 또렷하다. 중정에서 쌀국수를 말아 주는 사람들, 수영장 가장자리 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먹는 사람들의 두런거림이, 집을 떠나왔음을 더욱 실감케 한다.

수영장을 내려다 보자니 문득, 친구한테서 빌려온 가방 속의 수영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아이들은, 사람이 태어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걸음마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누구나 다 물 위에 뜰 줄 알았다.

나 또한 둠벙 이 끝에서 저끝까지 물 위를 헤엄쳐 다녔었다. 몸의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몸이 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어느 날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은 순간 내가 느낀 공포감이라니. 물에 대한 공포감은 그 이후로도 극복하지 못했다. 여행지 호텔 어디에나 있는 수영장에서 그 공포감을 극복해 볼까 하고 일부러 챙겨 온 수영복이었다.

 씨엠립에서 처음 만난 풍경. 사람도 의자도 나무도 친절한 곳
씨엠립에서 처음 만난 풍경. 사람도 의자도 나무도 친절한 곳 ⓒ 이승열


내려놓고, 비우기로 작정하고 떠난 길, 한 발자국 떨어져 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다시 찾은 여행지에서, 눈뜨자마자 처음 든 생각이 수영이라니. 반드시 무엇인가를 꼭 해야한다는 습관적인 강박관념의 드러남이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내가 내게 속삭인다. 나를 향한 연민이 잠깐 스친다.

씨엠립에서의 아침은 당연히 쌀국수, 앙코르의 유적들도 그리웠지만 가장 많이 그리웠던 것이 바로 아침마다 먹던 쌀국수였다. 뜨거운 육수에 살짝 꺼냈다 건져, 그대로 숨이 살아있는 푸성귀와 어우러지는 가는 국숫발은 매력적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식탁에 내려앉은 그림자의 농담, 나뭇잎 색깔, 공기 냄새까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느긋하게 대하는 아침 밥상이 얼마 만인가? 초침까지 재가며 허겁지겁 밥알을 우겨 넣던 서울에서의 아침 식사, 밥상이라 이름 붙이는 것조차 미안했던 식탁 모습이 떠오른다.

호텔 로비로 나오니 씨엠립에 머무는 동안 우리들과 함께 할 삼 소반(Sam Sovann)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르고 골격이 작은 대부분의 캄보디아 사람들에 비해, 여유 있는 몸매에 눈부터 웃음을 짓는 선한 얼굴이다. 영어가 서툰 소반, 소반보다 영어가 더 서툰 우리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은들 무에 그리 대수랴. 말이란 것이 본디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본질과 더욱 멀어지고, 설명하려 애쓸수록 더 진창으로 빠지며 헝클어지는 것을 그 동안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유적지 관람 입장권을 끊으려 준비해 온 사진을 내미니 도로 돌려준다. 매표소 앞에 설치된 화상 카메라에 찍힌 내 얼굴이 입장권에 바로 인쇄 되어 나온다. 일껏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아 준비해 왔건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술 장비 탓에 입장권의 나는 강한 햇빛으로 좀 찡그린 얼굴을 달고 다니게 생겼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화상 카메라가 등장한 것만큼 앙코르와트가 지난번과는 많이 달라져 있어도 절대 실망하지 말자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세상에, 이젠 적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속도 속에서 살면서 앙코르와트만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있길 바라는 것은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이기심인가.

세상에 이런 속도가 존재했었나 싶을 만큼 소반은 편안하고 느리게 차를 몬다. 앞에 뚝뚝이 가고 있으면, ‘너 비켜. 왜 앞에서 얼쩡거려. 빵!빵!빵! 안 비켜, 휘익’ 하는 금속성의 신경질적인 경적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가고 있으니 앞의 뚝뚝 기사 양반 조심 혀. 빠-아-앙-’ 하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속도방지턱이라도 등장하면, ‘쿵, 덜커덩’ 하고 넘는 것이 아니라 요동도 없이 ‘사알짝’ 넘는다.

이내 앙코르와트 앞 해자가 나타나고, 그 해자 뒤로 아스라이 앙코르와트 천상계 메루산에 솟은 연꽃 다섯 송이가 보인다. 앙코르와트와의 재회를 뒤로 미루고, 먼저 앙코르 톰으로 향한다.

 붉은 박세이 참끄롱 사원의 단아하고 옹골진 모습. 세월이 흐를수록 견고해지는 라테라이트를 처음 사용해 건축사에 한획을 긋는 중요한 사원
붉은 박세이 참끄롱 사원의 단아하고 옹골진 모습. 세월이 흐를수록 견고해지는 라테라이트를 처음 사용해 건축사에 한획을 긋는 중요한 사원 ⓒ fen

앙코르 톰 남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왼쪽 라테라이트로 지은 붉은빛 박세이 참끄롱 사원과의 만남으로 앙코르 유적과의 조우를 시작한다. 앙코르 제국이 침략을 받아 왕이 적에게 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커다란 날개로 왕을 덮어 보호했다는 박세이 참끄롱새, 바로 이 전설의 새 이름을 딴 작은 사원이다. 단아하고 옹골진 모습이 마치 빈틈없이 온몸으로 왕을 감싸 보호했다는 전설 속의 박세이 참끄롱새처럼이나 듬직해 보인다.

박세이 참끄롱의 전체 모습은 참으로 단아하다. 어디든 안 그러랴 만은, 앙코르의 사원답게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맨 아래층 충분히 넓은 길이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하는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보면 볼수록 황금비율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이 이 사원을 자꾸자꾸 쳐다보게 할까? 이젠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 역시 수학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박세이 참끄롱의 전체 비율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까우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날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보고 또 보아도,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듯하면서도 단아하면서도 안정감 있고 당당하다. 너무도 당당해서 찾아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당초에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하다.  - fen의 박세이 참끄롱 사원에 대한 기억

 박세이 참끄롱 서쪽 출입문. 동문만 실제 출입할 수 있을뿐 나머지는 장식 가짜문
박세이 참끄롱 서쪽 출입문. 동문만 실제 출입할 수 있을뿐 나머지는 장식 가짜문 ⓒ fen

 박세이 참끄롱 꼭대기 하늘길. 저 곳으로 쏟아지는 달빛과의 조우를 기약하며
박세이 참끄롱 꼭대기 하늘길. 저 곳으로 쏟아지는 달빛과의 조우를 기약하며 ⓒ fen

사원의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은 앙코르와트 3층 천상계를 오르는 신의 계단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가파르다. 소화제와 지사제로 겨우 진정시켜 놓은 몸이 계단을 오르는 내내 후들거린다. 두 손과 두 발, 온몸의 근육을 총동원해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는 것은 산들바람이었다. 이곳이 30℃가 넘는 열대의 씨엠립이 맞나 싶을만큼 소슬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새 소리와 적막, 침묵만이 존재하는 사원 벽에 기대앉아 있던 S가 중얼거린다. "애고, 미주알이 졸밋거려 혼났네. 근데 행복해서 미치겠다. 날 이렇게 잘 키워줘서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주다니. 정말 고맙고 행복해." 쉰이 넘은 S가 완전한 평화 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두 아이도, 남편도 아닌 엄마였다. 나도 우리 엄마를 떠올린다. 겨우내내 전화 한 번 넣지 않고 무심했던 게 생각난다.

펜을 꺼내 '박세이 참끄롱에서 시작한 하루'라고 쓰며, 지치지도 않고 일고 스러지는 상념들을 억지로 끊어버린다. 끊어버린다고 어디 만만히 물러설 잡념과 집착이던가. 이내 포기하고 제멋대로 흐르게 놓아둔다. 그리고 벽에 새겨진 여신처럼 사원 벽에 등을 기대고 오랜 시간 무심히 밀림을 바라본다.

긴 세월 사원 입구에 정물처럼 서 있는 사자 석상처럼, 마치 나 자신이 사원을 짓던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양 조금씩 편안하고 익숙해진다. 시간은 박동을 멈추려는 시계처럼 더디게 흐른다. 이름을 알 수 없어 혼자 이 사원의 이름을 붙여준 박세이 참끄롱새의 지저귐이 계속된다. 조금씩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저 하나의 숲이었던 밀림의 나무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내 눈에 든다. 줄기 하얀 자작나무를 닮은 열대의 나무 끝, 사원의 돌 끝에 내가, 돌이 되어 앉아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인듯 사원을 지키는 석상이 되어버린 JE
본래부터 그 자리인듯 사원을 지키는 석상이 되어버린 JE ⓒ fen

 그저 숲이었던 밀림의 품은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다
그저 숲이었던 밀림의 품은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다 ⓒ fen

덧붙이는 글 | 2008년 1월에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씨엠립#박세이 참끄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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