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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 물이 오르다
나무에 물이 오르다 ⓒ 김준

봄은 바다를 건너온다. 바다 속 깊은 이야기를 고래와 나누다 너울너울 파도를 넘어 섬에 머물러 봄을 피운다. 나비도 부르고, 벌도 부르고, 사람들도 갱번(바닷가)으로 불러낸다. 남녘 섬마을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항구미 작은 포구에는 대여섯 척의 목선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머지않아 통발도 놓고, 전복에게 줄 미역과 다시마를 얻기 위해 마을 앞 바다로 나갈 것이다. 여수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한 철부선은 한무리의 등산객을 쏟아내고 출발했다. 오는 길에 선실을 가득 메우고 준비해온 아침을 먹던 사람들이다. 울긋불긋 등산복에 배낭을 들쳐 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오른다.

 

섬 들판에 핀 봄

 

섬마을 봄은 바람과 파도를 타고 아지랑이가 되어 북상을 한다. 동백은 매화꽃에 자리를 내주고 고개를 떨구었다. 부지런한 나비 한 마리가 매화꽃에 앉았다. 찬바람 끝이 남아 있는 봄바람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30여분을 매화꽃에 앉아 날갯짓을 잊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맡긴 듯 하늘거린다. 꿀벌 무리는 윙윙거리며 부지런히 매화꽃을 오가며 꿀사냥에 정신이 없다.

 

 일찍 나온 나비 날갯짓을 잊었다.
일찍 나온 나비 날갯짓을 잊었다. ⓒ 김준
 벌이 꿀을 만나다.
벌이 꿀을 만나다. ⓒ 김준

날씨가 따뜻해지자 주민들은 언덕배기 비탈밭 봄갈이에 분주하다. 금오도에는 논이 없다. 밭에 의존해 살아간다. 몇 년 전부터 비탈진 밭에 예외 없이 단풍을 심었다. 처음 들어 본 이름이다. 섬마을 식당에서 먹은 쌉사름한 나물이 '단풍나물 무침'이었다.

 

날씨가 따뜻해 일 년 내내 수확하는 단풍은 금오도 주민들의 주 소득원이다. 인근 안도 처럼 어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멸치잡이를 하는 송고와 장지, 전복 양식과 미역, 다시마 양식을 하는 항구미 정도가 어장을 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마을들이 갱번이 있어 해초를 뜯어 반찬거리 정도를 하지만 소득원은 아니다.

 

장지에서 멸치잡이를 하는 최씨, 지난 가을 멸치잡이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해파리 때문이다.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해파리 개체가 증가해 멸치 낭장망(그물)을 바다에 넣을 수가 없었다. 한틀을 준비하려면 목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잘못했다간 멸치는커녕 그물을 모두 망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서 해파리의 성화도 잠잠해 멸치잡이에 나섰지만 그것도 시원찮았다. 그래도 다음 어기를 기다리며 낭장망을 손질하고 있다.

 

 물이 빠진 갱번에도 봄이 왔다.
물이 빠진 갱번에도 봄이 왔다. ⓒ 김준

바다에서 건지는 봄

 

햇볕이 따스한 우학리 갱번, 엄마와 아들이 나란히 해초를 뜯고 있다. 가끔 몽돌 틈에 손을 집어넣어 고둥을 줍기도 한다. 물이 넉넉히 빠진 갱번은 파래, 김, 미역, 고둥, 가사리, 청각 갖가지 해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바다 풀밭이다.

 

이곳은 10여 년 전 최대의 기름유출사고로 소리도와 함께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인간 부주의에서 비롯된 재해를 치료하는 것은 오롯이 자연의 힘이다.

 

"잡았다."

 

아들이 소리를 질렀다. 호수 같은 바다가 움찔한다. "잘했다"는 어머니의 칭찬이 이어진다. 어머니는 아들이 뭘 잡았는지 아는 모양이다. 아들이 돌 틈에서 꺼낸 것은 '군소'였다. 큼직한 녀석이 돌 틈에서 해초를 먹고 있었다.

 

군소는 봄철 조간대에서 많이 발견되는 연체동물이다. '군청색 색소를 뿜어내어 자신을 보호 한다'하여 '군소'라 했다고 전해진다. 머리에 한 쌍의 더듬이가 있어 마치 토끼와 같다고 해 외국에서는 '바다의 토끼(seahare)'라고 한다. 향이 독특해 여수를 비롯해 남해연안 사람들은 내장과 색소를 빼내고 삶아 초장을 곁들여 먹는다. 경상도 일부 해안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올리기도 한다.

 

 갱번의 봄맞이
갱번의 봄맞이 ⓒ 김준
 갱번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할머니
갱번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할머니 ⓒ 김준

금오도에는 망지포, 직포, 심포, 막포, 우실포, 두포, 미포, 안진개, 밭진개, 사발개, 큰머리개, 함구미 등 포구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 중 작은 갯돌해수욕장이 있는 직포는 옥녀봉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배를 짰다는 곳이다. 직포 갱번에도 주민들이 나와 해초를 뜯고 있고 돌담과 몽돌밭에는 파래 김을 말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노인네가 긴 낫을 들고 해초를 뜯는다. 아흔에서 두 살 모자란 나이에 부지런히 미역을 베어 바위에 올려놓으신다.

 

"할머니, 이것 파실 건가요?"

 

대답 대신 돌 틈에서 해삼을 한 움큼 집어 손에 쥐어 준다. 옆에서 가사리(?)를 뜯던 아주머니도 굵은 해삼을 몇 개 건져 주시며 "끝을 이빨로 뜯어 내장을 빼고 먹으라"고 알려준다. 꽁지를 뜯어내 흘러나온 내장을 잘 훑어내고 입 안에 쏙 넣었다. 짭짤하면서 향긋한 바다 내음이 입안에 가득하다.

 

숨이 찼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둥글 넙적한 돌에 앉아 휴식을 취하셨다. "말려서 자식들 주려고..."라며 그제야 늦은 답을 주셨다. 나이가 들어 병원 신세만 지다 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할머니. 봄볕에 해초를 뜯는 모습은 마치 인생을 갈무리하는 철학자의 모습이다.

 

봄맞이 산행으로 으뜸인 여수 금오도. 그곳 섬마을은 봄이 무르익었다. 잘 꾸며 놓은 곳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밭이랑, 길 섶, 갱번 몽돌 밭 틈에 웅크리고 해풍을 맞고 피운 꽃들이 더 아름답다. 금오도 섬마을에는 바다도 들도 사람도 봄에 빠져 있다.

 

 봄을 맞는 섬마을
봄을 맞는 섬마을 ⓒ 김준

덧붙이는 글 | 3월 8일 취재한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전라남도 신문 [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금오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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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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