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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이산>.
드라마 <이산>. ⓒ MBC

MBC드라마 <이산> 53회에서 느닷없이 노비해방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하, 왜 저를 만나주지 않으십니까?”라며 홍국영이 따지러 온 그날 밤. “그건 자네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네”라는 뜻밖의 말로 신하를 감동시킨 정조 임금.

너무 황송해서 무릎까지 꿇은 홍국영에게 정조는 선물 하나를 더 얹어준다. 조만간 윤대에서 발표할 노비제도 혁파안을 그에게만 살짝 보여준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산>에서 언급된 노비 제도란 것은 공노비 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부터 계속해서 공노비 제도가 조정에서 논의되었고 또 정조 사망 이듬해인 1801년에 공노비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망 직후에 단행된 공노비 해방은, 비록 그것이 순조 때의 성과라 할지라도, 일정 정도는 정조 시대에 계속된 사회적 변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드라마 <이산>에서 공노비 혁파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공노비 해방의 ‘수훈갑’은 누구일까? 드라마 <이산>은 바로 이 점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정조 이산을 잔뜩 띄워주고 있는 이 드라마가 자칫하면 공노비 해방마저 정조의 작품인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배경 지식도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노비해방 문제를 제기한다면, 시청자들 중에는 은연중에 ‘공노비 해방은 정조 임금의 은혜’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조선 정부가 노비 숫자를 줄이려 한 이유는?

첫째, 노비문제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끊임없이 논의된 사안이었다. 조선 정부는 노비 숫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어떤 때에는 종부법(從父法)을, 또 어떤 때에는 종모법(從母法)을 선택했다. 여자 노비가 많으면 종부법을, 남자 노비가 많으면 종모법을 택함으로써 노비의 전체 숫자를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의 정책 변화를 거친 후인 영조 7년(1731)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결국 종모법을 택하게 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시피,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종모법이었다.

남자 노비가 여자 노비보다 많은 경우에는 남자 노비의 상당수가 양인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종모법을 택하는 것이 노비 숫자를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영조 7년의 종모법은 그런 성비율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정부가 노비 숫자를 줄이려 한 것은 조세수입과 병력충원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공노비 제도 혁파는 궁극적으로 노비제 소멸로 가는 과정 중 일부였다. 그 같은 노력의 원초적 양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8세기 후반 들어 크게 격감한 공노비 숫자

둘째, 1801년의 공노비 해방은 이미 공노비의 숫자가 크게 격감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하다. 공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노비의 숫자가 이미 크게 격감한 상태였다는 점일 것이다.  

관청이나 향교에 소속된 공노비들의 숫자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크게 격감하는 추세를 보였다는 것이 한국사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 시기에 노비의 격감을 초래한 주요 요인들로는 노비의 도망이나 양인과의 혼인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이미 공노비의 숫자가 크게 격감한 상태에서 19세기 초엽에 공노비 해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노비 폐지라는 제도적 조치 자체는 큰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호주제도가 이미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호주제의 법적 폐지에 대해 한국인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어느 역사학자가 2008년 1월 1일의 호주제 폐지를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적 업적’이라고 평가한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좀 웃긴 일이 되지 않을까?

호주제 폐지를 낳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간과한 채 어느 대통령의 집권기에 호주제가 폐지되었는가에 집중하는 것은, 공노비 제도 폐지를 낳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간과한 채 어느 군주가 죽은 직후에 공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는가에 집중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될 것이다. 

공노비 해방, 노비계층의 사회·경제적 성장 결과물

셋째, 공노비 해방은 조선왕조의 은혜로운 조치가 아니라 노비계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의 결과물이었다. 18세기 내내 끊임없이 계속된 공노비들의 사회·경제적 성장이 1801년의 제도적 변화를 가져온 핵심적 원동력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노비 자신들의 노력 때문인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경상대학교 인문학부 김상환 교수의 ‘조선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이라는 논문이다. 경북대학교 사학과가 1989년에 발행한 <경북사학> 제12호에 실린 글이다.

경상도 단성현의 17, 18세기 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을 고찰한 김상환은, 공노비들의 지위 상승이 양천교혼(양인과 노비의 혼인)의 증가를 불러왔고 이것이 공노비제도 해체의 주요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7세기까지 30% 내외였던 양천교혼이 18세기에는 약 60%로 격증했다고 한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는 거의 모든 노비들이 양천교혼을 했다는 것이 단성현 호적대장에 근거한 그의 설명이다.

양인과 결혼하는 노비가 많아졌다는 사실. 그 원동력은 노비계층의 경제적 성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 성장이었든지 상대적 성장이었든지 간에, 전체 사회에서 노비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지위의 성장이 사회적 지위의 성장을 가져오고 또 그것이 양천교혼의 확산으로 연결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노비들의 경제적 성장이 있었기에 1801년 공노비 해방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군주의 은혜로운 조치로 설명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드라마 <이산>에서처럼 자애로운 군주가 한밤중의 ‘깜짝 예고’로 측근을 놀라게 할 만한 전격적 조치가 아니었다.

역사발전 1차적 주체는 '일반백성'

 <이산> 홈페이지 메인화면의 문구.
<이산> 홈페이지 메인화면의 문구. ⓒ MBC

공노비 해방은 사회적 천대 속에서도 꾸준히 경제적 성장을 거듭한 공노비들이 스스로 획득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제 공노비 제도는 폐지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자리 잡은 상태에서 1801년 공노비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역사발전의 1차적 주체는 역사현장의 주인인 일반 백성들이다. 오랜 기간 동안에 그들이 점차적으로 이룩한 경제적·사회적 성과가 결국에는 제도적·법적 변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지도자가 그런 제도적·법적 개혁을 완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이루어진 현실의 확인’에 불과할 뿐이다. 지도자는 역사발전의 2차적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정조 임금의 통치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게 될 <이산>의 이후 방영분에서는 역사발전의 두 주체가 균형 있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대중과 지도자의 상호 조화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산> 홈페이지에 있는 “조선이 왕을 원할 때, 왕은 역사를 만들었다”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이 변화를 원할 때, 왕은 백성과 함께 역사를 만들려 했다!"


#이산#정조#공노비 해방#역사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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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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