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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오후 5시 서울역. 역사 안 마련된 TV 앞에 모인 사람들이 총선결과 예측방송을 주시하고 있다.
9일 오후 5시 서울역. 역사 안 마련된 TV 앞에 모인 사람들이 총선결과 예측방송을 주시하고 있다. ⓒ 이경태
 
[현장 ⑥] "정치판 10여년 전으로... 마음 편치 않다"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오후 6시가 다가올수록 서울역 안쪽의 TV 모니터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방송사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몸도 모니터 쪽으로 점점 기울여졌다.
 
결국 한나라당의 '안정론'이 통합민주당의 '견제론'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출구조사 결과로 볼 때 한나라당은 최저 154석을 얻어 민주당은 개헌저지선인 100석을 얻는데 실패했다. 모니터를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대전의 초상집을 간다는 이재덕(37)씨는 "대세가 한나라당이었으니 그 결과가 그대로 보여준 것 같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씨와 함께 온 김홍진(37)씨는 "투표는 했지만 의미가 없다, 누가 뽑힌다고 달라지겠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만 투표 해달라고, 한 표 한 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 밥그릇 싸움만 할 뿐"이라며 "당선되면 지역구나 이런 것은 상관 없다"고 일갈했다. 또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라도 국민들의 몇 %가 동의한다면 끌어내릴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원에 사는 이혜숙(37)씨는 "노회찬씨한테 투표했는데 출구조사에서 진다고 나왔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씨는 "일부러 아이 아빠까지 설득해서 투표하고 왔는데 노 의원이 떨어진다면 정말 화날 것 같다"며 "한나라당 후보가 우리 서민들 진짜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서울역 갤러리아 백화점에 들렀다가 개표방송을 지켜본 이 아무개(25)씨는 "이 정도까지 쏠릴 줄은 몰랐다"며 "그동안 (한나라당이) 욕도 많이 먹지 않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은평구 갈현동에 사는 이씨는 "문국현 후보를 찍었는데 경합이라고 나온다"며 "결과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올라온 심지훈(56)씨는 "한나라당이 과반을 잡았으니 이제 경제만 살리면 된다"며 출구조사 결과에 만족했다. 심씨는 "물론 한 정당에 쏠리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만큼 민주당이 민심을 잃었다는 뜻 아니겠냐"며 "한번쯤 이렇게 바뀌는 것이 정치 발전"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임헌찬(41)씨는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된 만큼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충 결과를 보니깐 지역색이 강해졌다. 충청도는 자유선진당이 들어가고 영남에는 한나라당, 호남에는 민주당 아닌가. 친박연대는 외면당한 것 같고... 한나라당이 풀어야 할 게 많아진 거다. 정치판이 1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치는 않다."
 
 
[현장 ⑤] 서울역에서 만난 '견제론' '안정론' '무당파'
 
결국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투표마감까지 2시간 남은 시간. 이제 비가 온다고 해도 투표율이 오를 것 같지는 않다.
 
오후 4시 20분 서울역. 역사 안에 마련돼 있는 TV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는 투표마감 시간인 오후 6시까지 남은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다. 각 방송사들은 낮은 투표율을 논하고 여당의 압승을 이야기하고 있다.
 
투표 마감까지 1시간 30분. 그들의 속마음을 물어봤다.
 
[견제론] 서울 종로구에 사는 박찬문(42)씨는 "원래 한나라당을 좋아하지만 너무 압승하면 좋지 않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박씨는 오전 일찍 투표를 하고 사업상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 왔다.
 
"여당만 너무 많으면 문제가 있죠. 민주당이든 친박이든 골고루 표를 얻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독주하는 것을 차단해야 하는데 다들 압승한다고 하네요."
 
직장이 있는 평택으로 내려가는 김성협(36)씨도 "아무래도 저는 '견제론'이었다"며 박씨와 비슷한 말을 내놓았다. 김씨는 "주변의 동료들이나 가족들한테도 투표는 꼭 하자고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투표율이 낮을 줄은 몰랐다"고 한탄했다.
 
김씨는 "투표율이 이렇게까지 낮다는 것은 국민들이 정치적 실망감이나 불신감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민이 원하는 정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안정론] 강옥자(45)씨는 '안정론'을 주장했다. 강씨는 "대통령을 밀어주려면 확실하게 밀어줘야 하지 않겠냐"며 "그래서 여당에다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당들은 모두 정체성이 없다"며 "친박이니 자유선진당이니 민주당이니 모두 총선 전에는 다른 당이었다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만든 당 아니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사업 차 부산에서 올라왔던 유진헌(54)씨도 "경제를 살리려면 한나라당이 돼야 한다"고 단정지었다. 유씨는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나 투표를 한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사업 경기가 얼마나 나빠졌는지 아나? 지금도 원자재 가격이 올라서 난리다. 부산은 진짜 힘들다. 내가 먹고 살려면 한나라당이 힘이 세져야 한다."
 
[무당파] 이름을 밝히는 것을 거부한 신 아무개(52)씨는 '무당파'였다. "어떻게 결과가 나올 것 같냐"는 질문에 "내가 좋아하는 후보 찍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답했다. 신씨는 "누가 되더라도 그게 내 인생에 무슨 큰 상관이 있겠냐"며 "어차피 내 일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냉소했다.
 
대전이 고향인 최현우(24)씨는 "총선은 아무래도 대선보다 관심이 없다"며 "투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씨는 "솔직히 정책이 바뀌고 그에 따라 경제가 어떤 흐름으로 흐르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이번 선거는 비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며 "앞으로 어떤 이가 되던지 변하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9일 오후 2시 45분 청계천에 봄 나들이 나선 시민들. 투표율이 사상최저라는 소식에 이들은 입을 모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9일 오후 2시 45분 청계천에 봄 나들이 나선 시민들. 투표율이 사상최저라는 소식에 이들은 입을 모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 이경태
[현장④] 청계천에서 만난 사람들 "사상 최악의 투표율? 당연한 일" 
 
9일 오후 2시 45분 청계천. 청계천 둑에 자리 잡은 나무들은 이미 새 잎을 틔운 지 한참 지났다. 봄나들이 나선 이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둑 옆 돌바닥에 지친 다리를 쉬어가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빗발이 살짝 비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두가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어가고 있는 연인 틈에 끼어들었다. 김한영(27)씨와 윤진애(25)씨. 사귄 지 1년이 약간 넘었단다. 학교 선후배라는 그들은 취직 준비 때문에 요새 마음이 고달팠는데 간만에 도서관에서 탈출해 나들이를 나왔단다.
 
"투표는 하셨냐"고 묻자 둘의 표정이 약간 달라진다. 윤씨는 "당연하죠"라고 말하는데 어째 김씨는 씩 웃고 만다. 윤씨는 그런 김씨를 향해 "오빠는 찍을 사람이 없어서 안 찍었다고 말하더라"며 고자질하듯 내게 말했다.
 
김씨는 "나 하나 투표한다고 정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귀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투표율이 사상 최저로 50%도 못 넘을 것 같다"고 알려주니 표정이 좀 달라졌다. 그리고 "적어도 4년 전 총선은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마음이 정말 안 동했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 반쪽 민심 선거에 대해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당연하다"고 말했다.
 
안양 평촌에서 가족들과 나들이 나선 이아무개씨(34)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씨는 "백화점도 들리고 청계천에도 나오려고 오전 8시 반쯤 투표를 했는데 오는 길에 들으니 투표율이 낮다고 하더라"며 "내가 알기로는 낮에 가장 투표를 많이 할 텐데 결국 정말 50% 미만의 투표율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나도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어떤 정당이 더 나은지 결국 투표소에 들어서서야 한 표 던지고 나왔다."
 
경기도 파주에서 직장 동료들과 서울나들이 나온 김아무개(52)씨도 "말만 잘하지 국회 들어가면 싸움만 하는데 누가 찍어주고 싶겠냐"며 혀를 찼다. 김씨는 "그래도 새 사람이 새 살림을 잘 하지 않겠냐"며 "그런 마음으로 투표하고 나왔다"고 덧붙였다. 
 
 
 9일 오후 1시 탑골공원.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정치토론'을 하고 있다.
9일 오후 1시 탑골공원.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정치토론'을 하고 있다. ⓒ 이경태
[현장 ③]
종로 탑골공원의 '정치토론'
 
오후 1시 종로 2가 탑골공원. 공원 밖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들과 달리 이 곳의 공기는 한적했다. 공원 곳곳에 앉아있는 이들 대다수가 나이가 지긋이 드신 노인들이었다. 일부 몇몇 젊은 연인들이 보였지만 이들은 10여분 간 공원을 둘러본 뒤 다시 걸음을 공원 밖으로 돌렸다.
 
노인들은 벤치나 돌 위에 삼삼오오 모여 정치토론 중이었다. 한 분이 "정치가 안정돼야 경제도 편하다"며 주변의 동의를 구하자 주변 노인들도 맞장구치며 "젊은 놈들이 생각이 없어"라고 큰 소리로 거들었다.
 
젊은 놈들이 생각이 없다고 한 노인에게 슬쩍 다가가 '기자'라고 밝혔다. 대뜸 "기자양반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묻는다.
 
"글쎄요. '안정'이라 하지만 한나라당이 과반이 된다고 해서 경제가 바로 나아지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자양반이 아직 잘 모르는가본데 여기서 이놈, 저기서 저놈이 반대하고 나서면 되는 것이 없어. 진득하게 밀어줘야 하는 거야."
 
노인은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투표율이 사상 최저일 것 같다"고 넌지시 알려드리니 혀를 차면서 일갈했다.
 
"투표도 안 하면서 뭐 그리 욕을 하나. 자기 밥그릇도 못 챙겨먹는 거야."
 
'격정적인 논객들' 사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노인은 조금 달랐다. 구로에 사는 전석표(74)씨는 "나라가 투표율 높이려면 선거 홍보를 더 해야지"라고 점잖게 말했다.
 
전씨는 오전 6시 50분에 투표를 했다고 한다. 빙그레 웃으면서 "젊은 사람들은 낮 이후에나 하지 않겠냐"며 "나이 든 사람들이야 아침 일찍 하지"라고 덧붙인다.
 
"투표하고 나니까 할인권인가 주던데 그것 갖고 젊은이들한테 먹혀들겠어? 나도 솔직히 써먹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젊은이들은 우리랑 달리 별로 정치에 신경 안 쓰는 것 같아. 투표하는 데 대한 프라이드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전씨는 "아들 녀석은 제 어미랑 낮에 한다고 했는데 했는지 모르겠다"며 꾸물꾸물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라도 좋으면 투표하고 손주 놈들이랑 청계천이라도 나올 텐데 말이야."
 
 
 18대 총선 투표일인 9일 오전 10시 롯데월드 매표소 앞.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길게 줄 서 있다.
18대 총선 투표일인 9일 오전 10시 롯데월드 매표소 앞.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길게 줄 서 있다. ⓒ 이경태
[현장 ②] 북적이는 잠실역 만남의 광장
 
오전 10시 잠실역 만남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북적댔다.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부모들부터 친구들과 웃음을 터뜨리는 젊은이들까지 모두의 표정에서 휴일의 즐거움이 배어 나왔다. 잠실역 지하의 상점가도 이미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 '롯데월드 어드벤처'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이미 많은 이들이 그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만남의 광장에 마련된 벤치에는 책을 읽는 사람, 전화를 하는 사람,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약속한 이들을 찾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남자 셋 여자 둘. 너무나 쾌활한 웃음소리다. 뒤에서 슬쩍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학생들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투표에 관심 없다고 하는데 그들도 투표 대신 놀이공원을 택한 것일까? "투표하셨어요"라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웬 걸? 웃는다. 여학생 두명은 손을 훼훼 내저으며 "저희는 투표권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신입생이란다. 남학생 한명은 손을 들고 자랑스레 "저는 했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스레 나머지 두명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투표를 '못' 했다는 04학번 한상돈(24)씨에게 물었다.
 
"제가 강원도가 고향이에요. 그래서 부재자 투표를 신청했는데 제가 처음 신청하는 거라 주소지를 그렇게 자세하게 적어야 하는지 몰랐어요."
 
한씨는 "편지에 쓰는 것처럼 간단히 써도 부재자 투표용지를 받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한씨가 쓴 부재자신고서는 한씨의 주민등록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투표를 하지 못한 한씨는 이날 동아리 후배들과 놀이공원에 오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귀찮기도 하고, 지금 사는 곳이랑 주소지가 다르니까 그쪽에 후보로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공약이 뭔지 아는 것도 없어요. 아버지가 투표하라고 일부러 알려주셨지만, 저는..."
 
학교나 총학생회에서 지방학생들을 위해 부재자 투표소를 설치하려는 노력이 하나도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물어보니 한씨와 다른 학생들이 입을 모아 "그런 것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된 대학교는 카이스트, 대구대, 익산 원광대 단 세 곳뿐이란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각 학교마다 부재자 투표소 설치에 대한 공문을 보냈다는데 신청 또는 답변이 없었다고 한다.
 
씁쓸한 마음으로 그들과 인사하고 찾아간 롯데월드 매표소 입구는 인산인해였다. 중앙분수대를 경계로 한 편에서는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한 편에는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분수대에 걸터 앉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김 아무개(39)씨는 그곳에 앉아 10살 난 아들과 3살 난 딸의 입에 번갈아 청포도를 넣어주고 있었다. 빨간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은 딸아이는 연신 까르르 웃으며 아빠에게 장난을 걸었다.
 
김씨는 "원래 서울랜드를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실내 놀이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그는 "아이 엄마는 표를 사기 위해 저 인파 속에 있다"며 "오전 일찍부터 이렇게 붐빌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나 아빠나 간만의 가족나들이에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살짝 '정치'이야기를 꺼내봤다. 김씨는 "지난 2002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을 찍고 엄청 욕을 먹고 어른들의 말도 한 번 들어보자는 생각에 이번 대선 때는 이명박을 찍었는데"라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정말 힘을 실어줄 건지 아니면 견제가 정말 필요한지. 차라리 우리 지역구에 뛰어난 인물이라도 있으면 고민이 적을 텐데 힘들었습니다. 제가 투표한 시간이 아침 8시 30분인가? 그런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이번 총선은 '이슈 없음'이 이슈라고 했던가. 전 국민적 논란이 됐던 대운하 공약도, 재탕 삼탕의 정책 공약도 다 묻혀버리고 오직 안정론이냐 견제론이냐만 남은 선거. 김씨의 고민도 비슷했다. 투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쉽게 투표하기도 힘들고, 투표를 하려고 해도 정작 표를 줄 사람이 안 보이는 '마땅찮은' 총선이다.
 
 서초갑 투표소가 설치된 방배1동 사무소. 9일 오전 8시 30분 아직까지 투표소는 한산하다.
서초갑 투표소가 설치된 방배1동 사무소. 9일 오전 8시 30분 아직까지 투표소는 한산하다. ⓒ 이경태

 

[현장 ①] 서초갑 방배1동 사무소

 

2008 선택의 날 4월 9일 오전 8시. 아침 일찍 투표하러 나온 사람들은 걸음걸이부터 바빴다. 하지만 바쁘게 걷는 사람들에 비해 서초갑 투표소가 설치된 방배1동 사무소는 전체적으로 한가했다.

 

선거관리관은 "아무래도 다들 띄엄띄엄 나오다 보니 지금은 투표율이 10%나 될까"라며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다. 집을 나서기 전 오전 7시 전국 투표율은 2.4%였다.

 

바삐 투표소를 빠져나가는 이들을 기다리다 붙잡기 시작했다. 투표날인 오늘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어디로 나가실 계획인지 물었다.

 

무색하게도 안소윤(31)씨는 "일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기 때문에 투표일이라고 무조건 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지난 대선은 쉬면서 투표했다고 한다.

 

정치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보니 "잘 모른다"며 손을 내젓는다. 그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표를 행사하는 것이 내 권리니깐 행사한 것"이라며 걸음을 더 재촉하기 시작했다.

 

권정자(66)씨도 "일하러 가야지"라고 내게 면박을 줬다. 권씨는 가정집의 파출부로 1주일에 3번 나간다고 했다. 권씨와 함께 투표를 끝내고 나온 '동생'은 부동산중개업을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투표일은 '노는 날'이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일찍 나오셔서 투표하세요?"

"아 그럼. 안 그럼 투표할 시간이 없으니깐... 그래도 국민의 권리인 만큼 당연히 한 표 행사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지금도 이불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껄?"

 

권씨의 표정에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당당함만큼이나 새로 뽑힐 국회의원들에게 쓴 소리를 했다.

 

"매번 찍어놓으니 그 놈이 그 놈이다는 말이 나와. 국민들 혈세로 월급 받으면서 싸우는 모습. 싫증나고 짜증나. 싸우는 꼴을 안 봤으면 좋겠어. 일을 잘 했으면 좋겠고. 내 까짓게 이 거대한 세상에 무슨 힘이 되겠나 싶지만 우리 자식들 힘 덜 드는 것 보고 가는 것이 내 소원이여. 지금은 수명이 길어지고 더 가난해지잖아. 복은 없어지고 명만 길어지는 거지. 그런 세상이 안 돼야 해."

 

윤민양(28)씨는 학교 도서관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취업준비는 애초부터 준비하지 않았고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경쟁률도 높고 아무래도 힘드니깐"이라며 멋쩍게 웃는 그에게 "그래도 아침 일찍 나와서 투표하는 것을 보니 마음으로 정한 후보가 있나보다"라며 넌지시 물어봤다.

 

하지만 윤씨는 "사실 지역구에 나온 후보자들을 잘 모른다"며 "단지 안 할 수는 없었다"고 답했다. 윤씨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는 단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은 적은 없다고 했다.

 

"관심이 없다고 해도 할 것은 해야죠.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바라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말한 대로만 해준다면 잘 풀리겠죠."

 

자못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밝힌 윤씨는 살짝 웃음 지으며 "사실 이번에 주는 할인권이 궁금하기도 했다"며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윤씨의 손에는 할인권 1장과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

 

하늘이 꾸물꾸물 흐리다. 아무래도 결국 비가 올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비가 내리면 20~30대의 투표율이 높아진다고 하던데 정말 투표율이 조금은 오르려나?

 

친구들과 오이도 나들이 계획을 세워 일찍 투표하러 나왔다는 노 아무개(62)씨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만큼 의사 표시도 확실히 하는 게 좋다"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어디 가더라도 많이 투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바쁘게 걸어갔다.

 


#총선#투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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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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