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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자산 되는 기념사업을 해야

"의병이나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이 우리 후손들에게 부채가 되지 않고 자산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공훈자마다 거대한 사당을 지어 이를 관리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출케 함으로써 관리 주체인 지자체간 서로 떠넘기는 일이 되거나, 기념관에 전시할 유물도 그리 많지 않은데 건물 규모만 크게 하여 허술한 전시관으로 관람자들이 볼거리가 없다면 찾아오는 발길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와 같은 재원으로 공훈자 고장 학교나 지방자치단체에 기념도서관을 세워서 후손들이 이곳에서 면학에 힘쓰게 하여 그분의 거룩한 희생을 되새기게 하는 한편, 도서관 한편에 영정을 모시고 유품을 전시케 한다면 일석이조의 기념관이 될 것입니다."

 대천 조경환 의병장
 대천 조경환 의병장
ⓒ 조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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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민족정기선양 및 통일특별위원'이란 긴 직함을 가진 조세현씨는 여러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 바, 개혁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동안 광복회의 조직도 경직된 감이 없지 않았다고 하면서, 다음 회장부터는 대의원들의 직선으로 선출케 될 것 같다고, 당신이 광복회 민주화에 일조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필자가 10여 년 간 항일집안 문턱을 드나들고, 그 후손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방 후 친일파 세상이 와, 못 배우고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가난의 대물림'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들어왔다.

한 마디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친일파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심지어는 성(姓)까지 바꿔서 산 후손도 있고, 할아버지의 항일 행적을 묻고 살아온 후손도 없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타까운 점은 할아버지들은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켰는데, 왜 후손들은 친일파들에게 길들여진 채 살아왔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비쳤다.

"후손들이 못난 탓이지요. '비단 할아버지에 개똥 손자' 꼴인 점도 부정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친일파들이 자기네 죄과를 덮기 위해 별별 탄압을 다하였습니다. 왜 '목격자는 죽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일제 때 독립지사를 고문하던 경찰이, 광복 후 더 높은 계급장을 달고 독립운동가에게 수갑을 채우는 현실에, 여태 독립이 안 됐다고 울부짖는 지사도 있었습니다."

친일 득세...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저는 해방 후 17번의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독립운동을 한 분을 모시지 못한 점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그 책임은 독립지사 후손에게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후손들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할아버지들처럼 친일파를 몰아냈다면 어찌 그들이 활개를 쳤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분이나 그 후손들이 주역이 되는 사회가 바로 정의 사회이지요."

 조세현 광복회특별위원
 조세현 광복회특별위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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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셨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우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런 일에 앞장서야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민들이 의병이나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매우 무지합니다. 그래서 우선 의병 활동을 알리고자 올해 처음으로 <의병,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란 주제로 학술 토론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사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서울에서 4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왕산로의 유래도 몰랐거니와 왕산 허위 선생이 내 고향 출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다가 중국 하얼빈에 가서야 알고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광복회는 의(義)를 가장 우선하고, 다음 화(和)를 추구하며, 마지막으로 이(利)를 추구하여야지요. 그래 일각에서는 뒤늦었지만 '독립운동자 제자리 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못한다면 그럴 인재를 길러야지요. 그게 선열에 대한 후손의 책무라고, 선열 유족들은 깊이 명심해야겠습니다."

- 조경환 의병장 생가와 산소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세요.
"생가는 광산 서방면 신안리인데, 지금은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으로 아파트촌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뒤 일제가 시신을 훼손할까 첫 산소는 두엄자리에 평장으로 모셨답니다. 당시 일제는 효수(梟首)라 하여, 목을 잘라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묘 때도 일제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멀리서 아버지 형제분들은 지게를 지고 절을 했고, 고모는 나물바구니를 끼고서 절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화순군 북면 선산에 모셨다가 해방 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모셨습니다."

- 후손으로서 희망사항은?
"요즘 새로운 지번과 거리명을 부여하는 모양인데, 할아버지 생가마을 거리를 당신 호를 딴 '대천로(大川路)'로 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는 지자제에서도 별도 예산이 드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저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의병이나 애국지사 생가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어 시간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자 조세현씨는 나에게 기왕에 여의도까지 왔으니, 광복회와 국가보훈처에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권하기에, 옆방의 광복회 남만우 사무총장과 위층의 보훈처 김영준 공훈심사과장, 정관회 사무관을 만났다. 나는 그 자리를 빌려 후손들의 사는 모습과 애로사항을 전하자, 광복회로서, 국가보훈처로서, 후손들을 다 아우르지 못하는 처지를 말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회원들의 권익과 보훈업무에 억울한 분이 없도록 더욱 심기일전하여 보살피겠다는 말씀을 듣고서 광복회관을 벗어났다.

 대한매일신보(1908. 12. 24.)
 대한매일신보(1908. 12. 2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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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환 의병부대 200명이 일 수비대와 교전하였다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조경환 의병부대 200명이 일 수비대와 교전하였다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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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창의대장' 조경환 의병장의 행적

조경환(曺京煥) 의병장은 1876년 2월 14일, 전라남도 광산군 서방면 산안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에서 태어났다.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900년부터 전국 명산 대천을 순례하여 산세와 지리를 답사 기록하고 당신 호를 대천(大川)이라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1907년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조경환은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1907년 12월 초순 광주· 함평 등지에서 이원오(李元五)· 김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 뜻을 모아 12월 10일 함평으로 죽봉 김태원(竹峯 金泰元)을 찾아갔다. 그때부터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12월 14일 새벽, 함평 성내의 일군을 급습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 이후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1908년 1월 1일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창평 무동촌(舞童村)에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내습하는 일본헌병대를 맞아 싸워, 대장 요시다(吉田) 이하 수명을 사살하였다.

 의병 전적지 함평 석문산
 의병 전적지 함평 석문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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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 조경환은 의병진의 중의에 따라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조경환은 '호남창의대장'이라는 이름으로,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산 흑석리(黑石里)로 가서 경찰대와 교전한 결과, 대장 정득주(鄭得柱) 이하 수명을 생포하였다. 그 뒤에도 광주의 동촌(東村), 담양의 대치(大峙), 장성의 낭월산(浪月山), 함평의 석문산(石門山) 등 여러 곳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승전고를 울렸다.

이와 같이 연전연승하던 조경환 의병장은 1908년 음력 12월 19일 구정을 앞두고, 설을 쇠고자 의병을 귀향시킨 뒤,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 사동(寺洞)에 은신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기증 받은 백마를 타고 이리저리 내달으며 일병을 무찌르던 중, 적탄이 오른쪽 가슴에 연달아 두 발 명중되었다.

조경환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깨닫고는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진 명단을 꺼내 안간힘 다해 불사른 후 조용히 순국하였다.

"섬나라 왜놈 멸망치 않으면 내 죽어 혼백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리(不滅島夷 惟魂不復)."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하면서 남긴 말씀이다.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한 광주 어등산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한 광주 어등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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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창녕조씨 광주종친회 '조경환 의병대장 행적'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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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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