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의 꿈과 왕세자의 꿈은 다르다<대왕세종>에서는 세자 이제(양녕대군)가 요동수복을 꿈꾼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4월 12일 제29회 방송에서는 국왕 직무대행(인사·군사권 제외)이 된 세자가 요동정벌론자인 이천을 수하에 두고 요동수복 의지를 피력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전에도 세자는 명나라 칙사 황엄의 밥상을 뒤엎는 등 반(反)명나라 태도를 여러 차례 표출한 바 있다. 요동수복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요동수복! 그 말만으로도, 대다수 한민족은 가슴이 설렐 것이다. 그 말만으로도, 광활한 고구려의 숨결이 자신의 콧속으로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숨이 벅찰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사대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일지라도 속으로는 한민족의 요동수복을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야!'라는 생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다수 한민족이 일반적으로 품는, 어떤 막연한 희망사항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국의 세자인 양녕대군이 요동수복을 구체적으로 꿈꾸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될 수만 있다면야!'라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것을 이루고 싶다'는 단계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양녕이 실제로 그 단계까지 갔다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일개 백성도 아닌 왕세자가 그런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녕이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는지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자 이천은 과연 요동정벌을 꿈꾸었을까?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을 위해 두 가지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로 한다. 하나는 이천(1376~1451년)이 요동수복의 꿈을 꾸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양녕이 그런 꿈을 꾸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두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은, <대왕세종>에서 두 사람의 결합을 요동정벌 추진의 조건 중 하나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먼저, 과학자인 이천은 충청도병마도절제사 및 평안도병마도절제사로 외적 방어에도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천이 마음속으로 요동정벌을 꿈꾸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그의 행적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가 그런 꿈을 꾸었다고 볼 만한 여지가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천의 이력 중에서 평안도병마도절제사 경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안도라는 곳은 북방과 접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파악한다면, 요동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의 일단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시절에 이천이 남긴 행적은 평안도·함경도의 여진족과 대결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14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여진족과의 대결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몽골제국만큼의 힘이 없는 명제국. 그래서 명제국의 역내 패권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 정권과 동맹을 강화한 명제국은 여진족 등을 상대로 끊임없는 대결구도를 조성함으로써 자국의 역내 패권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대테러전쟁 구도를 조성하여 위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명제국이 여진족 등을 상대로 대결구도를 연출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이천은 평안도병마도절제사로서 여진족과의 대결 일선에 서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일선에서 명제국과의 동맹을 실천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제국과의 동맹을 실천하는 데에 참여했다는 것은, 조선-명나라 관계를 위태롭게 할 만한 요동수복 같은 데에는 관심을 둘 여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이천이 구체적으로 요동수복의 꿈을 꾸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는 그가 요동수복의 야심을 품었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그렇게 볼 만한 구체적 증거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과학기술자 이천의 머릿속에서는 요동문제보다는 신기술 개발문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양녕의 요동수복 꿈을 지탱한 한쪽 축으로 묘사된 이천의 요동수복 의지는 위와 같이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명 황제의 '은전'에 눈물까지 흘린 양녕이 요동수복을 꿈꾼다?
다음으로, 양녕 본인이 과연 요동수복을 꿈꾸었다고 볼 만한 여지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태종 8년(1408)에 명나라를 방문한 세자 이제가 그곳에서 남긴 행적을 음미해보자.
<태종실록> 태종 8년 4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측의 조공에 대한 답례로 회사(回賜, 조공에 대한 반대급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에는 개인과 개인의 무역이 원칙상 금지되고 군주와 군주의 선물교환 형식으로 국제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은 국제무역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청나라 때에는 조선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적자를 본 측면이 있지만, 명나라 때에는 중국과의 교역에서 전반적으로 흑자를 내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어떻게든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늘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조공을 많이 하면 그만큼 회사(回賜)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역 횟수를 늘리려는 노력의 결과로, '사대파'인 이방원 정권이 들어선 1400년부터 조선은 1년에 3차례 명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특전을 얻게 되었다. 이것을 1년 3사(使)라 했다. 1년에 3번 사신단을 파견한다는 말은 1년에 3번 무역을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의 오키나와가 2년 1사, 베트남·태국이 3년 1사, 일본이 10년 1사였던 점을 고려하면,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꽤 많은 무역특혜를 누린 셈이다. 이방원 정권이 '자주파'인 정도전 세력을 무너뜨리고 조명동맹을 강화한 데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명나라를 방문한 세자 이제, 그로서는 어떻게든 명나라로부터 더 많은 회사(回賜)를 받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것은 정부로서는 경제적 성과이고, 세자 개인으로서는 정치적 성과였다.
그런 양녕대군을 감동시킬 만한 상황이 명나라 영락제에 의해 연출되었다. 장자가 아니라서 본래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영락제, 결국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를 찬탈한 영락제.
그래서 여느 황제들과 달리 정치감각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던 명나라 제3대 영락제(재위 1402∼1424년)는 조선측이 더 많은 회사를 얻어내는 데에 주된 관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측에 대한 무역특혜를 늘리면 늘릴수록 조선을 끌여들여 동북방 여진족을 견제하기가 더 수월해지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조선의 젊은 왕자를 감동시킬 만한 상황을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위의 <태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세자 일행에게 개별적으로 회사(回賜)를 하고 자작시인 찬불시(讚佛詩)까지 선사한 다음에, 세자 이제를 친히 불러 그에게만 특별히 또 한 번의 회사를 했다.
바로 이 대목.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양녕대군이 갖고 있던 국제관(國際觀)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너희들이 이 따위 물건으로 내 환심을 사려고 해?' <대왕세종> 같았으면, 세자 이제는 분명히 그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양녕 같았으면, 더 많은 무역 성과를 갖고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명나라가 돈 몇 푼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사실에 더욱 더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실제의 양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멋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당대 최강 명제국의 황제가 찬불시까지 지어주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따로 불러 별도의 회사까지 내주자, 양녕은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선물을 받을 때에 세자가 감사해 하면서 말하기를 '조공이란 신하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성은이 여기에 미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當受賜之際世子謝曰朝貢臣子所當爲不意聖恩至此)그뿐 아니었다. 양녕은 그만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因泣下). 자신이 더 많은 경제적 성과를 갖고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영락제. 특별한 대우로 자신의 정치적 위신을 강화시켜준 영락제. 그런 영락제가 너무 고마워서 순간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이다.
드라마 속의 양녕 같았으면 영락제의 밥상이라도 뒤엎었겠지만, 실제의 양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양녕은 그저 계속 감동만 했다. 그런 양녕을 지켜보던 영락제가 다시 한마디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으라."(帝再言終始如一)영락제는 그것으로써 조선 왕세자의 환심을 사려 한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써 향후 대(對)여진족 구도에서 조선측의 협력을 더 많이 얻어내고자 한 것이다. 선물을 잔뜩 '챙겨간' 왕세자가 훗날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무역특혜 받은 조선, 반명 감정 높지 않아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자 양녕은 명나라 영락제의 특별한 배려 앞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인물이었다. 그는 사대파인 자기 아버지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서 과연 요동수복 같은 웅대한 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명나라 황제 앞에서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이, 그 명나라와의 충돌을 전제로 하는 요동수복을 꿈꾸었다고 볼 수 있을까?
<대왕세종>에서 양녕의 요동수복을 뒷받침하는 인물로 묘사된 이천은 물론이요 양녕 자신도 이와 같이 결코 명나라와 대립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태종 이방원의 국제관(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국제관이란, 명제국을 도와 여진족을 견제하는 대신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무역특혜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반명 감정이 크게 확산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적어도 명나라는, 아무 특혜도 안 주면서 파병요구니 뭐니 하면서 동맹국을 귀찮게 하는 그런 '치사한 패권국'은 아니었다. 당시의 조선은 요동수복을 포기하는 대신 적어도 일정 정도의 경제적 성과는 얻어내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토대로 할 때, 최근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묘사되고 있는 요동수복론자 양녕의 이미지는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양녕이 다른 문제로 자기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은 있지만, 대외관계에서는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