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교는 전 세계 최고의 인재 집단으로 평가 받는다. 그런데 하버드대는 신입생들을 '글쓰기 초보자'로 간주하고 혹독하리만치 철저하게 글쓰기를 교육한다.
고교 때까지 이미 실력이 검증된 영재들에게 의무적으로 글쓰기 과정을 철저하게 이수하게 하는 이유는 뭘까. 하버드대의 글쓰기 훈련 프로그램은 다른 교육기관과 어떻게 다를까. 하버드대 글쓰기 수업의 성과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기자는 하버드대를 현장탐방 취재하기로 결정했다. 한 달 넘게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 협조를 요청한 끝에 어렵사리 '승낙' 사인을 받았다.
하버드대 글쓰기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교수 2명과 글쓰기센터 소장이 직접 나와 기자의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줬다. 1차 인터뷰(오전) 뒤 자리를 옮겨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2차 인터뷰(오후)까지 하면서 '하버드대 글쓰기 교육'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
이들은 "왜 우리 학교의 글쓰기 교육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냐"면서 하버드대 글쓰기 프로그램 자료와 영상물도 듬뿍 안겨 줬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진행하는 글쓰기 교육을 취재하겠다며 태평양을 건너온 기자가 신기하다는 표정도 엿보였다.
기자도 한국 홍삼 엑기스를 선물했다. "인삼 중에서 가장 좋은 게 홍삼인데 인종과 체질에 상관없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무척 기뻐했다. 하버드대 교수들도 한국 인삼이 건강에 좋다는 점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일부는 한 나라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상황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우선, 하버드대 토마스 젠(Thomas jehn)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젠 교수는 2007년 8월부터 신입생들이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논증적 글쓰기 수업(Expos, Expository Writing Program)'을 총괄 지휘하고 있다.
"하버드대는 신입생 1600명에게 한 학기 동안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듣게 한다. 입학할 때 테스트를 거쳐 입문 단계인 '논증적 글쓰기 10'과 고급 단계인 '논증적 글쓰기 20' 중 어느 강좌를 수강해야 할지 결정한다. '논증적 글쓰기 10'을 마친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논증적 글쓰기 20'을 수강할 수 있다. 교수들은 학기 당 15명으로 구성된 반 두 개를 맡는다. 꼼꼼하게 지도하기 위해 한 반 수강생을 15명으로 제한한다. 한 학기 동안 최소 3편의 글을 쓰고 교수와 학생이 적어도 세 차례 1대 1로 토론한다. 글을 쓸 때마다 초안과 고쳐쓴 글을 함께 제출해야 한다."여기서 토마스 젠 교수가 말하는 논증적 글쓰기 수업은 정확히 말하면 '대학 학술 작문(Academic Writing)'이다. 그런데 이것을 '논증적 글쓰기 수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명(Exposition)'은 서술(narration), 기술(description), 논쟁(argumentation)과 함께 문장 서술 방식 중의 하나다. 그런데 대학에서 작성하는 글은 대부분 '설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글의 도입부는 '설명'과 '기술'을 주로 사용하고, 본문은 주로 '설명'과 '논쟁'을, 결론은 '서술'과 '논쟁' 그리고 '설명'이라는 표현 방식에 의존한다.
따라서 한편의 글(학술적인 글을 포함한 다양한 글의 갈래)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술 방식이 바로 '설명'인 것이다. 그래서 하버드대뿐만 아니라 미국 대학의 대부분은 학부생 글쓰기 프로그램을 '논증적 글쓰기'라고 부른다.
하버드대 학부 글쓰기가 '설명'을 전면에 내세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까지는 주로 표현 위주의 작문 교육을 한다. 그런데 그 서술 방식은 주로 서술이나 기술 혹은 간단한 논증 구성을 차용하는 논쟁에 중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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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사"라고 말했다. 플라톤 사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철학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흔히 '설명'으로 번역하는 'exposition'에 해당하는 글을 쓰다보면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와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는 원문을 인용하는 경우, 직접 인용이 아닌 간접 인용을 사용하라고 한다. 바로 이 간접 인용이 원문을 정확히 그리고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중요한 연습 과정인데, 이는 인용문에 대한 필자의 정확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반영한다. 이 점에서 'exposition'이라는 서술 방식이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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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학 수준의 글쓰기에서는 깊이 있게 독서한 뒤에 그 내용을 인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때 필자(글을 쓰는 학생)가 인용하는 원문과 필자의 생각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인용하는 원문을 정확히 그리고 독창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창의적인 해석을 할 때 필요한 표현 기법이 '설명'이다.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창안한 주인공은 낸시 서머스 (Nancy Sommers) 교수다.
2007년 7월까지 하버드대에서 이 프로그램을 총괄 지휘했으며 지금은 안식년을 맞고 있다. 서머스 교수는 교육 방법에는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15년 이상 이 프로그램을 관리하면서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최상의 글쓰기 교육을 받도록 이끌었다. 특히 90년대 중반에 지금처럼 별도의 건물에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담당하는 공간을 두고 글쓰기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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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가 글쓰기 교육을 시작한 시점은 18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버드대는 미국 최초로 신입생 작문 과목(Freshmen English)을 도입했다.
하버드대 수사학과 학과장인 W. Channing이 수사학의 성격을 웅변에서 작문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학부생들의 글쓰기 교육을 관장하는 최초의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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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하버드대의 '논증적 글쓰기 수업'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일까. 바로 교수들이 학생들의 글을 자세하게 첨삭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첨삭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 학교는 학생 글에 대해 짧게 평을 하고 부분적으로 수정해 주는 데 그치지만 하버드대는 교수가 학생의 글쓰기 과정에 적극 동참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단어 몇 개를 고치는 형식적인 수준의 첨삭이 아니라 학생들과 1대1로 대화하면서 상세하게 점검하는 방식을 쓴다. 문장과 글의 구성만 봐 주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계속 다시 고쳐쓰게 하면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글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다시 쓰는 과정에서 좀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려 더욱 좋은 글을 쓰게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신입생들의 글을 첨삭한다. 대개 교수가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대학원생들이 후배들의 글을 세부적으로 봐 준다. 교수와 학생이 수시로 개별적으로 만나 토론하기도 하는데 4시간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그 뒤에도 언제든지 교수와 학생이 다시 만나 고쳐쓴 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글쓰기 지도 교수들은 일 주일에 보통 40시간 이상 일한다. 학생들이 고쳐쓴 글을 가져오는 주에는 60시간 정도로 초과 근무를 하기도 한다."
토마스 젠 교수는 '논증적 글쓰기 수업'이 전공과목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연계하는 데에도 무척 신경을 쓴다고 한다. 신입생 때 배운 글쓰기가 전공에 필요한 글을 쓰는 데 요긴하게 활용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흔히 이것을 '학제 간 글쓰기(WAC, Writing Across the Curriculum)'라고 한다.
실제로,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영문학 등 전공 수업에서 요구하는 글은 각기 서로 다른 구성과 전략을 사용한다. 그래서 하버드대는 이와 같은 전공별 글쓰기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문학 전공자는 독창적인 논지 전개에 신경을 써 가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전자공학 전공자는 당연히 실험 결과의 정확성을 중시한 실험 보고서를 써야 한다. 논증적 글쓰기 수업에서는 신입생들이 상급 학년에 올라가 전공에 필요할 글쓰기를 할 때에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도록 작문 지도를 하는 것이다.
하버드대는 '학제 간 글쓰기'를 하기 위해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하는 교수들이 전공과목 교수들과 대학원생들, 그리고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 전공과목 교수들과 학생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글쓰기 교육을 하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교수들이 잡지나 신문기사, 논픽션 등을 활용하여 수업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전공 수업에 맞춘 글쓰기를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 학기 전에 어떤 종류의 글쓰기가 필요한지 파악해 두는 것은 기본이다.
하버드대 글쓰기 교육의 성과에 대해 젠 교수는 "논증적 글쓰기 수업을 학제 간 글쓰기로 연결하기 때문에 신입생들이 고학년이 되면 좀더 사려깊게 생각하여 글을 쓰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다른 전문적인 학업을 할 때 필요한 사고법을 배웠다고 느낀다면 우리 프로그램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학교 측의 노력에 화답하듯 글쓰기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교수들을 흐뭇하게 한다. 학생들은 보통 수업 전날 밤 과제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새벽 4시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교수가 깨어 있을 것으로 보고)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하버드대는 학생들이 글을 써내야 하는 분량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통계에 따르면 6명의 학생들이 4년 간 제출한 글이 600파운드(273kg)를 넘을 정도다. 대부분의 전공 과목을 글쓰기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글쓰기 공부를 제대로 하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단언하느냐"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이에 젠 교수는 "100% 그렇다. 글쓰기를 하면 생각을 명석하게 정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자신의 추측과 주장을 너무 보편적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반대 의견은 없는지 등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검증할 수 있다. 머리로만 생각해서는 윤곽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증거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는 글을 쓰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취재를 마친 기자와 기념 사진을 촬영한 토마스 젠 교수는 "글쓰기 분야에 대해 같은 관심을 갖는 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 토마스 젠 교수와의 일문일답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미국 보스톤의 하버드대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취재한 기사입니다. 앞으로 하버드대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10여 차례 기사를 올릴 예정입니다. 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이 없는, 좋은 정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