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자무식꾼이오"목숨 하나 이어온 것만도 다행이었어요."
그리고는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구한말 호남의병장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의 수괴 중 하나'라고 일제가 그들의 전투일지인 <전남폭도사>에 밝힌 바 있는, 전해산 의병장의 아들 전진규(89)씨가 나에게 말한 첫 마디였다. 더 이상 무슨 얘기가 필요하랴.
전해산 의병장 후손을 취재하고자 지난해 섣달부터 평소 안면이 있는 손자 전영복씨에게 연락하였다. 하지만 그 무렵 전영복씨가 서울 여의도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하다가 광주광역시 국회협력관으로 발령이 나 광주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업무 파악으로 매우 바쁘다면서 한 달 정도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 한 달이 두세 달 지났다. 마침 전해산 의병장 출신 지역도 전북인 데다가 일제조차도 거물 수괴로 일컫는 바라 이 참 저 참 맨 뒤로 돌렸다.
4월 초 호남 의병 전적지 7차 답사 여정을 짜면서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전영복씨에게 지난 약속을 채근했다. 그러자 당신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는 듯, 4월 5일 남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신 아버님은 서울에서 사시기에 당신 아버지 대담은 그 전날인 4월 4일로 약속하였다.
마침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이 당신 할아버지(조경환 의병장)가 전해산 장군이 일제 토벌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출해준 전대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마침 당신 집과 멀지 않는 곳으로, 부인도 아버님 내외도 잘 안다고 동행을 자청하셨다.
전영복씨와 부인이 전화로 몇 차례나 댁에서 점심을 준비해 둘 테니 같이 진지를 들면서 이야기하자고 간청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는 오후 2시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지하철 5호선 종착역인 방화역 대합실에서 조세현 위원을 만나 미처 5분 거리도 안 되는 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초인종이 울리자 전해산 의병장 손자며느님 송화진(52)씨가 반겨 맞았다. 전진규씨는 누워계시다가 마나님 부축을 받아 일어나시고는 굳이 거실로 나와 쇼파에 앉았다. 노환으로 수전증이 있는 데다가 언어장애까지 겹쳐 곁에서 손자며느님 도움으로 몇 마디 대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배운 게 없어요. 국문(한글)도 못 깨친 무식꾼인데다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아버지(전해산 장군)는 돌아가셨고, 부모조차 모두 일찍 여의어서 부모 없는 아이로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어요."평생을 머슴으로 소작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장가도 서른이 되도록 못 가 하는 수 없이 나이를 두 살 속여서 띠 동갑인 18세 처녀에게 갔다는 얘기에, 곁에 앉은 마나님은 "내가 속아서 시집갔다"고, 그때 신랑이 서른 살난 총각이면 가지 않았을 거라고, 6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억울해 했다.
"내가 일자무식꾼이라 큰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아들한테 물어보시오. 걔는 다 알고 있을 거요."
전해산 의병장 병풍에 얽힌 사연전해산 장군은 1910년 7월 18일 대구감옥소에서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의병장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당신이 순국하자 부인도 따라 극약을 마시고 자결하여, 쌍 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장군의 슬하에 아들이 없자 아우 기영의 둘째 아들 진규로 양자를 삼아 대를 이어오고 있다.
2005년 9월 30일, 나는 의병선양회원을 따라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 길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을 들렸을 때 소장된 진귀한 호남의병 유품들을 살려본 바가 있었다. 그때 전해산 의병장 작전도로 만든 병풍과 진중일기를 대하고는 눈물을 쏟는 전영복씨를 보고서 그 영문이 자못 궁금하였다.
그때 그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대하니 갑자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답했는데, 그 병풍과 진중일기에 얽힌 곡진한 사연이 있는 듯하였다. 어쩌면 이번 취재에는 그 사연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진규씨는 젊은 날 폭도 수괴의 아들로 배우지도 못하고 갖은 수모를 받으며 머슴으로, 소작인으로 살아왔으나 늘그막에는 자식을 잘 둔 덕분으로 요즘 세상에 드문 며느리의 봉양을 받는 모습을 보니까 내 마음이 흡족하고 며느님이 감동스럽게 보였다.
"어르신, 아들 며느님 잘 두셨습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들 하나밖에 두지 못하였는데, 열 자식 부럽지 않소. 아들 며느리가 아주 잘 해요. 고맙고 고맙지요."나와 조세현 위원은 세 가족의 인사를 뒤로 한 채 아파트 승강기에 올랐다. 왜 자식이 소중한지 그 까닭을 일깨워주는 만남이었다. 이튿날 이른 새벽 나는 남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