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넷. 내 나이 어느새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빛이 많이 바래졌지만 이름 하여 '386세대'입니다. 5월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엔 철부지 중학교 3학년 이었고, 대학 4학년 때 87년 유월 항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취방 가득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던 시기였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엔 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교사의 지위를 위협 받기도 하였습니다. 해직교사 복직 요구 서명에 동참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급기야 부모님이 긴급 출동을 하셨지만, '절대 양심을 속일 수 없다'며 배수의 진을 친 자식을 이기지 못한 부모님은 눈물 속에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17년 전의 일입니다.
참 바쁘게 달려온 날들입니다. 어머님의 마흔 넷 시절 당신의 자식은 스물 셋의 대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4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던 시절입니다.
지난 석가탄신일 연휴는 예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를 모시고 어버이날 기념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경남 사천을 출발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돌아 봉화의 권진사댁, 영주 부석사, 그리고 청량산과 도산서원을 둘러보는 여행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주변을 둘러보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우리 '옴마'(어렸을 적엔 엄마를 옴마라고 불렀습니다.)의 뒷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네 아들 결혼 일을 도맡아 치루시고, 이젠 조금 편해지나 싶은 순간 암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설상가상 항암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엔 아흔이 넘어 거동이 불편하신 시아버지까지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듯합니다.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변변하게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6남매 중의 장남 집으로 시집을 왔으니 말입니다.
'자식 셋은 키워봐야 부모 마음 알 수 있다'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지금이야 옛날처럼 궁핍한 시절도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 키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어렵고도 힘든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작 온 몸을 다바쳐 고생하신 내부모에게는 내 자식에게 쏟는 정성의 절반 만큼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손자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이었는데도 우리 '옴마'는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밥 때가 되었는데 식당엔 들어가지도 않고 저거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만 다녔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뒷모습 속에서, 은연중 자식에게는 늘 부모에게 효도해야 된다고 가르치면서 내 부모에게는 얼마나 효성스런 자식이었나를 반성하며 돌아보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아들이 라면을 끓입니다. 바람이 불어 한참을 공들여 끓였습니다. 어떤 진수성찬보다 맛있었습니다. 다 함께 웃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라면 맛이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라면 맛있게 드시고 난 후에는 화가 많이 풀렸습니다.
'옴마' 사랑합니다. 오래 오래 사셔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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