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코펜하겐의 모습 유럽의 '명품도시'의 하나인 코펜하겐의 풍광을 '덴마크의 스팅'이라 불리는 젠스 리스달의 <그림자>(Shadows)에 실었음.
ⓒ 이종민

관련영상보기

 

일탈 자체를 위한 여행만이 참여행이라 할 수 있다. 목적이 있는, 말하자면 숙제를 동반한 여행은 그 무게만큼 즐거움이나 의미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연수여행이 마뜩찮은 것은 이 때문이다. 목적이 뚜렷하고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어 해찰의 재미를 맛볼 수 없다. 낯선 곳에서 접할 수 있는 가슴 떨리는 의외성도 기대할 수 없다. 일탈이라 해도 너무 뻔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유럽명품도시 연수여행에 참여하기를 결심하면서도 목적 자체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겉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의 역사나 철학까지 살피자, 그런 마음가짐만 챙겼을 뿐이다. 연수단이 비교적 낯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나만의 일탈을 꿈꾸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일 주일 넘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전자우편을 서둘러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가슴 홀가분한 벗어남인가!

 

'유럽 명품도시 연수 학습자료'는 일찌감치 큰 가방에 숨겨 버렸다. 대신 딸아이에게서 빌린 녹음기 음악을 들으며 신경숙의 <리진>을 읽었다.

 

"저를 파리로 대려가 주세요!"

 

궁중 무희 리진의 외침을 나를 부르는 소리쯤으로 여기며 가끔 생각났다는 듯 와인을 시켜 마셨다. 그 정도의 일탈만으로도 암스테르담까지의 긴 여정 내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와보는 그 도시를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 여행의 묘미는 역시 추억 만들기. 공항 내 맥주 가게에 들러 낯선 사람들 틈에서 하이네켄을 주문했다. 혼자서 일행 몰래. 그리고 생맥주 잔을 앞에 놓고 사진까지 찍었다는 것이다! 하이네켄 본고장의 맛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덕에 스웨덴 쪽으로 선회하여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황혼에 휩싸인 코펜하겐의 멋진 모습을 좀 더 절절하게 즐길 수 있었을까?

 

북유럽의 관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코펜하겐에는 볼거리가 제법 많다. 화려한 왕궁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궁전만 해도 여러 개 있다. 왕립공원의 녹음을 배경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붉은 벽돌의 로젠보그궁전, 로코코 양식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아밀리엔보그궁정, 성 두 채가 불타 버렸지만 아직도 인상적인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크리스티안보그성, 현재는 왕립미술원으로 쓰이는 사를로텐보그궁전. 그밖에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는 니하운, 세계 최초의 테마공원 티볼리.

 

그러나 정해진 일정 때문에 모두 주마간산(走馬看山), 버스를 타고 스치듯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의 상징인 인어상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게피온 분수대의 역동적인 황소와 여신상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무는 보지 못하고 숲의 아름다움만 멀리서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연수 목적을 듣고 안내인이 추천한 '이비아고'라는 신도시를 둘러보았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낮은 건물들이 끊임없이 우리들 시신경을 자극했으며 '느림의 미학'을 절감케 했다. 실용성만 앞세운 우리들 천편일률적인 주거환경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연출했으니 과연 명품도시라 할만 했다. 아무런 쓸모도 없이 그냥 세워놓은 붉은 벽돌담 장식, 노인전용 아파트나 학교의 생명공학적, 아니면 생태적 공간도 매우 이색적이었다. 실용보다 삶의 질을 먼저 챙기는 문화선진국의 풍모를 여지없이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했던 스트뢰에 거리! 말 그대로 보행자 천국인 이 거리는 시청 앞 광장에서 콩겐스 뉘 광장에 이르기까지 5개의 거리와 광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북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상점가이지만 일반 차가 들어오지 못한다. 차가 다니지 않으면 상권이 죽는다는, 우리에게는 상식으로 되어있는 아우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나만의 일탈은 불발로 끝났다.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마당에 독자적인 행동을 꿈꿀 수는 없었다. 겨우 한다는 것이 음반 가게에 들러 덴마크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 두 장을 서둘러 구입한 것. 그리고 중세풍의 건물 앞 거리의자에 앉아 다양한 사람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 한옥마을 은행로가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연수단원다운 꿈을 잠시 꾸어보는 것. 거리 곳곳에 있는 야바위꾼들을 보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시답지 않은 깨달음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여행의 일탈이 좋은 것은 돌아옴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떠나온 곳을 생각하며 되돌아올 준비를 한다. 여행 첫날부터 이 준비는 시작되었다. 그 자유분방하고 생기 넘치는 보행자 천국의 거리를 거닐며 한옥마을과 '차 없는 거리'를 되뇌는 것이나 안데르센 동상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우리 지역의 유명 예술인들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역시 벗어남을 꿈꾸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돌아옴의 준비과정이라 하겠다.

 

특히 건강과 지속가능성, 생태환경까지를 고려한 자전거를 중심으로 한 '로하스'적 교통정책, 전주가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이 아닌가, 7박 8일 여행 동안 내내 떨쳐버리지 못했던 고민이다. 예측 불가능한 이 고유가 시대에 아직도 자동차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이 자동차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연수 내내 떨칠 수 없는 화두가 되고 말았다.

 

일탈을 꿈꾸며 부푼 마음으로 시작한 첫 유럽여행은 이처럼 출발부터 일상의 반복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유럽인들이 서둘러 접고 있는 (전)근대의 시행착오를 발전과 실용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우리들 현실을 차마 떨치지 못했다. 이들의 노인복지와 교육정책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천박하게 실용만 강조하는 작금의 세태가 짜증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 '동화의 나라'에 가서도 '집 생각'을 버리지 못하지. 제대로 떠나야 제대로 돌아올 수 있다 했는데, 언제나 한번 제대로 떠나볼 수 있을 것인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코펜하겐#덴마크#리스달#SHADOWS#명품도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마이유스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살기좋은 전주의 모습을 홍보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내주는 음악편지도 연재하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