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거, 왜 이렇게 하나 같이 인생들이 이래?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첫 번째는 이혼, 두 번째는 남편이 싸우고 집을 나가고, 세 번째 이혼, 네 번째는 남편이 죽고, 다섯 번째는 능력 없는 바람둥이 남자에, 여섯 번째는 유방암에 우울증에….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여자들 인생이 우울하잖아.'

 <명랑한 밤길>
 <명랑한 밤길>
ⓒ 창바

관련사진보기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창비 펴냄)을 읽으며 소설 속 주인공들만큼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답답하기도 했다. 여자들 인생이 왜 다들 이런 건지.

그러면서 '왜 행복한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나, 남편이 성실하게 돈 잘 벌어오고, 아이들도 속 썩이지 않는 여자는, 또는 가난하더라도 행복한 여자는 소설 주인공이 될 수 없나, 꼭 이렇게 이혼한 여자만, 꼭 삶이 고달픈 여자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꼭 고단한 삶 속에서만, 이리저리 얽힌 관계들 속에서, 또는 남편의 부정에 힘들어하는 주인공에게서만 소설의 가치를 느낄 수 있고, 삶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아무리 힘든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고, 힘든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도, 소설집 한 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이렇다는 것은 조금 너무 한 것 아닌가, 조금 더 다양하게 적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추석을 맞아 주인공은 남편과 아이들과 큰집에 간다. 시동생은 아이 하나 낳고 여자와 헤어진 후 몇 해 전 아이가 하나 딸린 여자와 재혼을 해서 또 아이를 하나 낳았다. 시동생은 카드빚에 몰려 살림살이가 경매에 넘어갔고, 고시 공부를 하다 포기하고 은행에 다니던 상고출신 시숙은 퇴출되고 만다. 주인공은 집에서 혼자 추석을 맞을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며, 묵묵히 송편을 빚는다. 시숙과 시동생이 다툼을 하고, 큰 동서와 동서가 다투고, 성이 다른 동서의 아이는 서러움에 겨워 싸움을 걸고, 시어머니는 당신이 쥑일년이고 뵉없는 년이라고 한탄을 한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남편은 여전히 리모컨만 돌리고 있다. 명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비오는 달밤'이라는 짧은 글 줄거리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인생들이 참 구질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삶이 다들 이러냐고. 그러다 문득 아주 갑자기,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이 구질한 인생이 진짜 삶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 인생은 조금도 구질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소설로 적으려면 책 열 권을 적어도 모자란다는 사람이 우리 집안에도 수두룩하다. 이제는 자식들 다 키워놓고 편히 쉬실 때도 되었건만, 아픈 동생 때문에 하루라도 맘이 편하지 않을 엄마, 아빠. 천식을 앓으시며 그다지 좋지 않은 몸으로 할머니 가시는 마지막 달을 돌보아야만 했던 숙모, 막내딸인데도 오빠들 사정 때문에 결국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할머니를 모셔야 했던 막내 고모.

아빠는 장남이라는 부담감을 항상 안고 계시고, 작은아버지는 독불장군 같은 아빠를 그냥 묵묵히 받아주고 있고, 고모는 오빠들 사이에서 맘 편히 하고 싶은 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위 눈치 보며 할머니도 상처를 입었을 테고, 아빠도 엄마도, 작은아버지도 숙모도, 고모도 모두가 마음에 얼마쯤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사는 게 싫다고, 사는 게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느냐고,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설책 열 권을 낼 수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엄마나 혹은 숙모나 고모가 행복하지 않았다고는 또 할 수 없다. 많은 날들이 행복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차린 밥을 맛있게 먹어줄 때도, 또는 공부를 잘 해서 상장을 받았을 때도, 장학금을 받아와 친척들에게 넌지시 자랑을 했을 때도, 그렇지 않으면 그냥 건강히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이유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다지 속 썩이지 않고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고, 내 집이 있고 당장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동생처럼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자기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든 후, 소설집을 점점 읽어가면서, 나는 더 이상 주인공들 삶이 구질구질하니, 팔자들이 다 왜 이러니, 하는 생각을 접었다. 비록 마흔 다섯 살에 떠나 버린 남자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 비록 아이를 남편에게 보내고, 자신과 살자고 하는 책방 남자를 떠나보내기로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살아가는 것은 가끔은 행복하지 않다가도, 또 때때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는 순간도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해피엔딩을 향해 나가는 삶이, 살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닐까.

인생이 왜 이러냐고 가끔은 속상한 때도 있겠지만, 해피엔딩을 위해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가끔은 지난 일 다 잊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술잔을 드는 날도 있을 테고, 그 행복에 겨워 잠깐 눈물이 나기도 할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

공선옥의 소설집 <명랑한 밤길>에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도,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모두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 테니, 그들에게도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같이 해피엔딩을 위해 열심히 살아보자고 말해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 올립니다.



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창비(2007)


#공선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