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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농활이 무슨 뜻인지 알아?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줄임말이다. 작년 9박 10일 동안의 농활은 내 가장 행복한 추억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올해 아르바이트하며 나온 여름휴가를 몽땅 써서 농활을 가는 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휴가일에 맞추느라고 어쩔 수 없이 후발대로 떠나게 되어 9박 10일이 아닌 3박 4일의 짧은 농활이 되었지만 어쨌든 신나는 일이었다. 농활은 무슨놈의 농활이냐며 안 가겠다는 걸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마음 돌려놓은 친구와 함께였다.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없는 돈 긁어모아 산 아이스크림이 금세 줄줄 녹았다. 멍청하게 버스시간도 알아보지 않아서 용인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로 가는 데만 해가 동에서 서로 넘어가고 말았다. 친구가 짜증을 냈다.

쨍알대는 녀석에게 약간의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해 입을 다물게 하고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창유리 밖으로 논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충주터미널을 떠나는 용바위행 버스에서 나는 작년 농활을 추억했다.

 적채밭에서 일하는 모습. 적채 박스가 무척 무겁기 때문에 밭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로 꼽힌다. 마을에서 가장 흔한 밭이다.
 적채밭에서 일하는 모습. 적채 박스가 무척 무겁기 때문에 밭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로 꼽힌다. 마을에서 가장 흔한 밭이다.
ⓒ 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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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나는 어벙한 새내기였다. 제도권 교육을 벗어나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났다. 축구공을 차기 시작했고 매일같이 친구들과 동틀 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이면 벌개진 얼굴로 도서관에 갔다가 과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깔깔한 입맛에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다 농활이란 말을 들었다. 농활을 간다고. 선배가 물었다. "농활이 뭔지는 아냐?"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농촌봉사활동이요." 선배는 내 뒤통수를 후리며 혀를 찼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이야 인마. 봉사활동이 아니라." 아파서 눈물 찔끔거리며 속으로 지분거렸다. "젠장, 거 무슨 차이람?"

그렇게 떠난 농활이었다. 버스는 산골로 굽이굽이 들어갔지만 내가 상상했던 '깡촌'은 전혀 아니었다. 아마 마을 전체가 벼농사가 아니라 특용작물 농사를 지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가 물으니 벼농사로는 수지맞기 어렵다고 했다. 이를테면 시대변화에 맞춘 현대식 농촌인 셈이다.

산속에서 똥눌 때 비가 오면...

우리는 마을회관을 빌려 썼는데 인원이 하도 많아서 여자들은 안쪽 화장실과 샤워실을, 남자들은 바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썼다. 나는 거기서 세상에 엄지손가락만한 파리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을 뿌려 녀석을 쫓아내긴 했지만 깊이 숙성된 묵은똥의 구수한 향취는 사람의 정신을 단박에 어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모두 우는 소리를 냈지만 별 수 없었다. 담배와 함께하면 그나마 참을 만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똥이 모이고 모여서 구멍에 넘실거릴 정도가 되자 우리는 우리가 화장실의 존재에 너무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곤란할 때는 역시 한창 밭일 중인데 아랫배에 격통이 올 때였다.

나는 주머니에 휴지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산속에 쭈그려 보는 큰일은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온통 고요한 가운데 새소리만 고즈넉이 짹짹거리는데 다리만 저릿했다. 하지만 한창 볼일을 보는 도중 소나기가 쏟아져 휴지가 뭉텅이가 되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만 울 뻔했다. 마침 그곳이 호박밭이 아니었다면 정말 울었을 것이다. 호박잎은 까끌까끌하긴 하지만 면적이 넓으니까 참 편했다.

씻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보통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을 하는데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이미 말했듯이 인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안쪽 샤워실을 쓰지 못하고 재래식 화장실 앞에 천막을 치고 호스를 연결해 몸을 씻었다. 당연히 찬물밖에 나오지 않아 우리는 몸을 비비 꼬며 빠르게 문질러야 했다.

그것도 물줄기가 비실대서 언제나 불안했는데 어느 날 진짜로 물이 끊기고 말았다. 그때 난 막 비누칠을 끝낸 참이었다. 이십 분 동안 우두커니 못 박힌 신세가 되었다. 그쯤 되니까 비누거품이 다 말라버리더라. 나중에는 우리가 너무 불쌍했는지 여자애들이 쇠대야에 물을 데워서 가져왔다.

 열심히 일하다 먹는 새참은 참으로 꿀맛이다. 수박 한 쪽에도 행복하다.
 열심히 일하다 먹는 새참은 참으로 꿀맛이다. 수박 한 쪽에도 행복하다.
ⓒ 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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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건 오직 우리들일뿐...

뙤약볕을 받으며 일하니 허옇던 살갗이 금방 갈색으로 변했다. 마을 형님들의 검붉은 살갗이 이해가 되었다. 예상만큼 일이 무척 고되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우리와 함께 새벽까지 술을 하셨는데도 아침이면 우리보다 먼저 밭에 계신 것이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른들이 철인처럼 보였다.

밥을 많이 드셔서 그런가? 하기야 밥이 많긴 많았다. 오전에 먹는 '새참'과 정오쯤 먹는 '점심'이 따로 있었는데 도무지 둘의 차이점을 모를 노릇이었다. 누님이 쇠대접에 밥을 가득 퍼 주시기에 덜어 먹으라 하는 줄 알았건만 그것이 일인분, 내 몫이었다.

매일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참 이상하게도 일은 몹시 고되었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일하다 때때로 마시는 막걸리와 소주 탓인가 생각했다. 열흘이 지나고 마을을 떠날 때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나는 거기 더 있고 싶었다. 많은 친구들이 마찬가지였다.

추억에서 다시 돌아와, 용바위에 내려 어둑해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가 부릉부릉 가 버리자 거기에 추억의 고요한 마을이 있었다. 일 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길가에서 기세 좋게 짖다가 막상 다가가면 깨갱거리던 개가 사라진 것만 빼고 말이다.

날씨가 덥고 사람 기가 허해지니 비극을 맞았는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도 다 그대로였다. 나는 또 엄청나게 먹고 일하게 되었다. 나는 안심했다. 마을은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우리 인원이었다. 작년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집안에서 씻고 쌀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농활'은 단순히 농사를 돕는 차원이 아니라 농민과 학생이 어울려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농활'은 단순히 농사를 돕는 차원이 아니라 농민과 학생이 어울려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 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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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관한 순박한 판타지는 사라지고

하루는 아저씨를 따라 우렁이 하우스에 일을 하러 나갔다. 작년에는 없었다. 우렁이 농사는 올해 새로 시작했다고 했다. 우렁이를 가득 채운 한 박스에 십만 원이 넘고 올해 일억  원을 버셨다고 했다. 하우스 짓고 장비를 사는 비용을 빼고도 몇 천만 원을 버신 셈이다.

모두 놀라워했다. '이만하면 농민이 되는 것도 괜찮겠어.' 한창 우렁이를 퍼내는데 트럭을 타고 '아줌마 군단'이 우르르 도착했다. 우렁이 건지는 솜씨가 놀라웠다. 누군가 하니 모두 돈을 받고 일하러 온 아주머니들이었다.

말을 듣는데 문득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농촌에 관한 순박한 판타지가 어쩐지 망가진 기분이었다. '이제 두레 품앗이 이런 것들 사라졌구나. 산골 깊숙한 곳까지 다 똑같구나. 도시 사람이든 농촌 사람이든 모두 돈 때문에 아둥바둥 살아가는구나. 도시를 멀리 떠나와서도 계급이란 놈을 보는구나.' 새참으로 먹는 닭도리탕이 무척 매웠다.

사실 작년 농활 와서도 그런 것을 느끼긴 했다. 농촌에도 빈부격차와 계급은 엄연히 존재했다. 어떤 집은 트랙터에다 커다란 냉동창고를 두 대나 가지고 있는데, 어떤 집은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할머니 홀로 농사를 짓고 계셨다.

한나절을 걸려 적채를 모두 따드리니 할머니가 고맙다며 주름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고마워. 난 무거워서 이거 못 해. 우리 영감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밤에 술을 마시다 밖에서 잠깐 담배를 피우는데 마을 형님이 오시더니 씁쓰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네는 남 잘 되는 꼴 못 보고 그러면 안 돼. 보고 배워야지. 타산지석. 난 이 말이 참 좋아." 마을 어른들 사이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주민들과 함께한 체육대회. 함께 어울려 즐기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주민들과 함께한 체육대회. 함께 어울려 즐기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 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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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나라 걱정하지 말고 농민 걱정하셔야죠'

다음날에는 칡주와 아구찜을 가지고 '덕이 형님'이 오셨다. 직접 담근 술이라 했다. 몹시 독하다더니 과연 첫잔에 얼굴이 빨개지고 땀구멍이 다 열렸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도 한 곡 뽑은 끝에 이야기가 깊어졌다.

덕이 형님이 말했다.

"한-미 FTA, 나도 정치인 처지 이해해. 나라가 다 잘 돼야 하니까. 그런데 우리한테 아무 것도 안 해주고 죽으라 그러니까 그게 싫지. 데모도 못 나가. 겨울 한철 빼고는 죄다 일해야 하니까."

그런 정치인 양반들은 자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거라고, 형님은 나라 걱정이 아니라 오로지 농민 계급을 걱정해야 한다고, 국익이니 국력이니 모두 다 악랄한 '레토릭'이라고 말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몸으로 사는 분께 내 말은 한갓 말장난처럼 너무 비루한 것일 터였다.

마지막 날 밤에 후배 한 녀석을 불러 앉혀놓고 푸념하듯 이야기했다.

"너 내년에도 올 거냐?"
"올 거예요."
"작년에 다들 너처럼 이야기했어. 그런데 지금 봐. 작년의 반절도 안 돼."
"정말이에요. 이번에 느낀 게 많아요. 내년에도 꼭 올게요."
"그래. 어디 믿어 보자."

나는 대학생들이 여름이면 모두 농활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활약했던 칠팔십년대는 훌쩍 지나가고 이제 농민운동을 하는 학생은 천연기념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농민의 삶을 살아보는 농활이 외면받는 걸 보면 슬프고 화가 난다. 해를 거듭할수록 농활을 가는 학생은 줄어들고 있다.

괴물 같은 세상은 홀로 이기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

임금만 빼고 다 오르는 시대라든가. 어릴 적에 이백원 하던 아이스크림이 칠백원이 되었고, 치솟는 유가 때문에 아버지는 차를 몰기 꺼려하고 계신다. 불안한 세상에서 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아둥바둥, 토익 공부니 자격증 공부에 힘을 쓴다. 학원 등록하기도 바쁜데 농활에 코웃음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렇듯 우리의 현실은 몹시 절박하다.

그러나 괴물 같은 세상은 홀로 이기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알아야 한다. 농민이 얼마나 불쌍한지 보라는 것이 아니라, 농민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라는 이야기다.

노동자, 학생, 농민의 공통점은 모두 돈에 괴로워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광우병 소고기 시위를 보면서 그걸 생각한다. 저 많은 사람들은 옛날 바로 저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죽고 할 때 어디 있었을까? 듣는이 없는 소릴 외치다 쓰러진 농민들, 노동자들. 그 사람들과 내가 그리 다른 사람일까?

광장의 비정규직 시위가 노동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위가 되어야 한다. 등록금 시위와 쌀 개방 반대 시위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것이 계급간의 '연대'다. 당장 먹고살기도 괴로운 현실에서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학생과 농민이 모두 함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승리할 것이다. 나는 이제 농활이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학생 '연대' 활동임을 이해한다. 바다와 계곡도 좋지만 이번에는 '우리 모두 그곳으로 농활을 떠나요. 뜨거운 볕 아래서 농민과 학생이 연대할 수 있도록.'

농활에서 돌아올 때 친구가 나에게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덧붙이길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농활#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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