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저마다 외갓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던 얘기를 하곤 했지요. 내가 살던 고향이 시골인데도 동무들은 외할머니 댁에 다녀온 이야기를 어떤 ‘무용담’처럼 신나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곤 했어요. 그 때마다 난 신기한 눈빛으로 아이들 얘기를 귀담아 들으며 마냥 부러워했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다른 동무들처럼 딱히 외갓집에 얽힌 추억은 없어요. 하지만, 고향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런지 어른이 된 지금도 산골 풍경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답니다.
올 여름 휴가, 어릴 적 고향 풍경을 찾아 산골로 떠나는 건 어떨까? 꼭 내 고향이 아니더라도 산골 마을에 찾아가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말벗도 되어 드리고, 갖가지 마을에 얽힌 옛이야기도 들으면서 알차게 보내면 매우 값진 휴가가 되지 않을까? 세상인심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산골에서 삶터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은 매우 순박하고 착하답니다. 때때로 깊은 산골에 살다 보면, 사람이 그리울 때가 더 많은 곳이기도 하지요.
오늘 잠깐 맛보기로 저와 함께 정겨운 고향, 외할머니 품속 같은 산골마을로 함께 떠나볼까요?
산골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리와!~ 여 쉬었다 가!”지난 5월 첫머리 쯤, 경북 구미시 옥성면 ‘옥관 저수지’를 지나 신나게 내리막길을 달릴 때였어요. 자전거를 타고 옥성면에 있는 임도를 지나 ‘대둔사’ 절집을 찾아가는 길이었지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왔는데, 짙푸른 물빛이 감도는 넓은 저수지를 보며 신나게 내려가다가 작은 마을이 나오기에 멈춰 섰어요. 마을 앞에 서서 아늑하고 정겨운 산골마을 풍경을 사진기에 담느라고 바빴지요. 그때 동구 밖에 나와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손짓을 하면서 오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마을까지 들어가서 구경하려고 했는데, 우리를 반겨주니 퍽 반가웠답니다.
“어여 와! 더운데 이거라도 한 잔 하고 쉬었다가 가!”
“아이고 할아버지 고마워요.”
“근데 어디서 오는 거여? 자전차 타고 이 산골까지 왔구먼?”할아버지는 우리가 산을 넘어 왔다는 얘기를 듣고 고생한다며 마침 잡숫고 있던 토마토 주스를 따라주면서 먹으라고 했어요. 땀을 흘리며 왔는데, 시원하게 목축일 주스를 주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꽤나 깊고 높은 곳이라서 아무도 살 것 같지 않던 곳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도 놀랍고 또, 이렇게 스스럼없이 길손을 불러 마실 것도 나눠주면서 살갑게 대해주시는 게 무척 고마웠어요.
"내 죽어도 울 할무이한테 공을 다 못 갚지!"
김명돈(78) 할아버지는 한 마을이 모두 일곱 집밖에 없는 구미시 옥성면 옥관2리(중말)에서 터 잡고 살아온 지 벌써 예순 해가 넘었다고 해요. 여기에서 이치분(74)할머니를 만나 장가들고 온 삶을 살아온 토박이 어르신이지요. 여느 시골처럼 농사를 지으면서 터를 부지런하게 가꾸고, 4남3녀 자식농사까지 남부럽지 않게 지으셨어요.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 살지만, 틈틈이 부모님을 찾아와서 기쁘게 해드린다고 했지요.
조용한 산골마을에서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큰 욕심 없이 살아오셨는데, 그만 지난 2006년에 병이 나서 허리도 제대로 못쓰고 다리도 많이 아프다고 하셨어요. 지금까지 할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병이 난 뒤로 몸이 아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할머니한테 매우 미안하게 여기셨답니다.
“내 죽어도 울 할무이한테 공을 다 못 갚지!” 하시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보니, 할아버지 마음이 어떨지 알만했어요.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산골마을에서 가끔 우리처럼 낯선 이들이 오기만 해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대요. 그저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고, 얘기를 들어준 것밖에 없는데도 말이에요.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사람을 만나면, 이것저것 말을 걸고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요. 시골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이 김명곤 할아버지처럼 무척 살갑게 맞아준답니다. 마을에 얽힌 옛이야기도 해주고, 또는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도 들려주시지요. 우리처럼 글감을 찾아다니는 이한테는 어쩌면 너무나 손쉽게 인터뷰(?)가 이루어지기도 해서 더욱 고맙고 즐겁지요.
마을에 얽힌 옛이야기 따라 귀를 쫑긋!
마을마다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그 마을에 이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요. 전설이나 신화도 많지만, 마음 착한 효자 이야기, 정조를 꿋꿋이 지킨 열녀 이야기, 또는 절집을 지으면서 있었던 이야기……. 참 남다른 얘깃거리들이 매우 많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지난해 여름에 가보았던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 얽힌 마을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개령면 동부리는 삼한시대에 ‘감문국’이란 작은 나라가 섰던 곳이에요. 산세가 아름답고 ‘명당’이라고 일컫는 좋은 터가 많은 ‘감문산’이 뒤로 병풍처럼 펼쳐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 옛날, 신라 눌지왕 때에 감문산에 아도화상이 절집을 하나 세웠는데, 이 절을 세운 뒷얘기가 참 남다르답니다.
아도화상(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했던 스님)이 동부리 마을을 지날 때였는데, 마을에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걸 미리 알고 마을 사람들한테 이곳에 절을 짓고 닭을 일천 마리를 풀어놓고 키우라고 했대요. 또 절 이름을 ‘계림사(鷄林寺)’로 지어주었지요. 그 뒤로 신기하게도 그 끔찍한 살인사건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마을 어귀에 우물 두 개가 나란히 있어 ‘쌍샘’이라고 하는데, 이 우물에 얽힌 얘기도 참 놀랍답니다. 감문산에는 명당으로 이름난 곳인데도 묘를 찾아볼 수 없답니다. 예부터 이곳에 묘를 쓰기만 하면 놀랍게도 마을사람들이 모두 먹는 이 쌍샘에 물빛이 바뀌어 마실 수가 없었대요. 지금도 가끔 몰래 묘를 쓰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온 산을 뒤져 묘를 파낸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자전거 타고, 사람냄새 나는 산골마을 따라 옛이야기에 흠뻑~우리처럼 자전거를 타고 마을마다 찾아다니면 더없이 좋겠지요? 자전거는 차와 달라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답니다. 또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어느 때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요. 마을 사람들 살가운 정을 느끼면서 옛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재미도 퍽 남다르지요.
무엇보다 이렇게 만나는 풍경마다 어릴 적 고향 같은, 외할머니 품속 같은 따스함이 배어있어 무척 즐겁답니다. 아직도 더러 남아 있는 흙담집,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놓은 장독대, 울 밑에 피어난 빨간 봉숭아, 담장 너머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웃음을 흘리는 능소화처럼 그저 눈에 보이는 풍경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답니다.
조용하고 사람 드는 일이 거의 없는 산골마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이라도 한 번 잡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해도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답니다. 해가 일찍 뜨고 이내 져버리는 산골에서 그야말로 사람냄새 나는 옛이야기를 더듬어보는 것도 여름날 좋은 추억거리가 너끈히 되겠지요? 때때로 그 옛날, 밤늦도록 할머니 무릎에 누워 귀찮게 하면서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보채던 귀여운 손자 녀석이 되어보는 건 어떨는지요.
아마 우리 부부도 이번 여름휴가 때에는 또 어떤 낯선 산골마을로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산골에서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을 배우고 뜻 깊은 시간을 보내고 오겠지요.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살가운 사람들 이야기가 있는 그곳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