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초, 맨 처음에 그 이름을 듣고는 설악산과 무슨 관련이 있나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를 처음 만난 곳이 강원도 쪽이었다. 그런데 설악초는 강원도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마을 길이나 골목길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설악초는 대극과의 꽃으로 '초설초'라고도 부르며 '야광초'라고도 부른다. 하얀 이파리가 눈을 연상케 하고, 달빛이 좋은 밤이면 하얀 이파리가 야광처럼 빛이나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결국, 설악초는 설악산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하얀 이파리와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눈이 쌓인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과 어우러진 하얀 이파리가 아름답다. 꽃보다도 이파리가 더 아름답다. 게다가 꽃은 작고 하얀 색에 연록의 꽃술이 전부다. 아주 단순하게 생긴 꽃이다. 작은 꽃임에도 이파리가 아름다워서 헛꽃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파리가 헛꽃의 역할을 해주고 있으므로.
꽃이 피었다는 것은 그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꽃을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들은 그들이 있어 존재하며, 꽃은 또 그들이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더불어 삶'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이 꽃을 만난 곳은 전라북도 덕유산 자락의 한 시골마을이었다. 가로등도 한적한 시골의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라고 했는지 길가에 무성지게 심어놓았고, 한 무더기씩 피어난 설악초의 무리는 마치 뜨거운 여름 햇살에도 불구하고 녹지 않는 하얀 눈을 연상케 했다. 순백색의 이파리와 꽃에 눈이 시원하다.
설악초는 일년생 꽃이다. 그러니 지금 피어 있는 저 꽃은 지난 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피어났던 꽃의 후손일 것이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꽃을 피웠다면 나는 그것을 우리꽃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꽃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주민들을 떠올린다. 2세를 이 땅에서 낳은 이주민들, 그리고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로 감싸안지 못한다면 그 민족주의는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이파리가 예뻐서 날아왔는지, 꽃향기에 이끌려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들이 입맞춤 할 곳은 꽃이다. 아무리 이파리가 고와도 이파리에서 꿀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헛꽃을 피운 꽃들을 찾은 곤충들도 헛꽃과 입맞춤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얻을 꿀이 없기 때문이다. 꿀은 꽃에만 있는 법이다.
본질이 아닌 것에서 본질을 묻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 허상에서 실체를 만나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갈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의 목적과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허상이 아무리 화사하다고 할지라도 그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설악초의 꽃말을 붙여준다면 뭐라 붙여줄까? 나는 '시원함'이라고 붙여주고 싶다. 뜨거운 한 여름에 피어나되 한겨울의 빛깔을 가지고 있는 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니까.
배추흰나비를 보니 하얀 눈 위에 앉은 나비, 상상으로나 그려볼 수 있는 풍경을 보는 듯하다. 나비가 꽃인지 꽃이 나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둘은 하나처럼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시원한 사람이 그리워진다.
마음이 시원한 사람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그와 눈인사를 나누고 한두 마디 대화를 하면 막혔던 마음의 물꼬가 트여가는 느낌이 든다. 차라도 한 잔하면 트인 물꼬가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것 같고, 내 안에 갇혀 나를 괴롭히던 단어들이 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런 사람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라도 다시 돌아가 만나고 싶어진다. 설악초, 그 꽃이 꽃 중에서는 그렇게 시원한 꽃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카페<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