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2008. 08. 17. 첫째 날

첫째 날 고빗길인 토끼봉에서 아이가 지리산 종주의 매운 맛을 처음으로 느꼈던 곳입니다. 이후 조잘대던 입에서 말이 사라져갔습니다.
첫째 날 고빗길인 토끼봉에서아이가 지리산 종주의 매운 맛을 처음으로 느꼈던 곳입니다. 이후 조잘대던 입에서 말이 사라져갔습니다. ⓒ 서부원

천은사 옆을 지날 때만 해도 화창하던 날씨가 꼬불꼬불 가파른 길을 따라 700, 800m 고도에 다다르자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구름에 덮여 버렸습니다. 소풍이라도 가는 양 마냥 즐거워하던 녀석의 얼굴도 날씨마냥 찌푸려졌습니다.

족히 한 달 남짓 충실하게 준비한 산행이었습니다. 아빠와 함께 매일 저녁 자전거를 이용해 체력 단련을 했고, 주말마다 아파트 뒷산부터 오르기 시작해 500여m의 무등산 중머릿재, 700여m의 담양 추월산, 800여m의 순천 조계산 등을 차례로 섭렵하며 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꿈꿨습니다.

기실 떠나기 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7살짜리 아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며, 무모한 일이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자그마치 35km가 넘는, 그것도 가파른 능선길을 걷는 건 자칫 아이의 관절 성장판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귀에 들어왔습니다.

하나 같이 부모로서 뜨끔할 수밖에 없는 충고들이었지만, 이미 지리산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녀석의 들뜬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10번도 넘게 완주해 본 터라 장비를 철저히 챙기고 날씨만 도와준다면 크게 문제될 것 없을 거라는 아빠의 '무모한 용기'도 결정에 한 몫 했습니다.

하긴 녀석에게 맞는 산행 장비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 다녀봤지만, 190mm 발 치수에 맞는 등산화는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배낭과 장갑 등도 제대로 몸에 맞는 건 없었습니다. 차선책이랍시고 넉넉한 쿠션의 운동화와 어깨끈이 넓은 책가방, 그리고 여성용 등산 장갑을 마련했을 따름입니다.

7살짜리 아들아이와 나선 지리산 종주

첫째 날 숙소, 연하천 대피소에서 연하천 대피소 앞에 걸린 지리산 종주 지도를 보며 다음 날 코스를 따라가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지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첫째 날 숙소, 연하천 대피소에서연하천 대피소 앞에 걸린 지리산 종주 지도를 보며 다음 날 코스를 따라가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지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 서부원
서둘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오전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이번 지리산 종주의 시작점인 성삼재 고갯마루에 닿았습니다. 천 미터가 넘는 고지인데다 산바람마저 거세 그곳에선 전혀 여름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신발끈을 묶고 배낭끈을 조인 채 사뭇 긴장된 얼굴로 아빠와 함께 하는 7살짜리 아이의 지리산 종주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잘 닦인 노고단 고개까지의 산행은 아이에게도 그저 몸을 덥히는 정도의 가뿐한 '산책'이었습니다.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대개 한 번 쉬어가는 노고단 대피소도 못 본 채 지나쳤습니다. 노고단 정상이 잡힐 듯 가까운, 움푹 파인 이곳 노고단 고개가 지리산 종주의 공식적인 기점입니다. 여기부터는 지리산을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교행조차 어려운 좁은 등산로가 내내 이어집니다.

노고단 고개에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가 만나는 삼도봉까지 2시간 20분 만에 주파했습니다. 이는 보통 성인의 산행 속도보다 조금 빠른 것입니다. 다른 곳에 비해 능선이 비교적 완만한 코스라지만, 녀석은 "잔뜩 겁먹었더니만 별 것 아니다"며 조금 쉬어가자는 아빠의 제안마저 뿌리치고 앞서 나갔습니다.

뱀사골 계곡이 시작되는 화개재에 다다라 준비해 온 김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4시간, 힘들고 배가 고플 때도 됐 건만 아이는 여전히 성성합니다. 그러고 보니 임걸령에서 마신 물 몇 모금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이곳 화개재까지 내달렸습니다. 햇빛이 사라진 우중충한 날씨 탓이라고는 하지만, 녀석의 발걸음은 아빠의 체력과 경험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여기서부터 토끼봉에 이르는 능선은 길고도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사실 첫째 날 일정의 최대 고비이며, 녀석의 '자만심'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시험대인 셈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30분여를 쉬지 않고 올라서야 하늘과 맞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만만치 않음을 알았던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성냥갑 같은 산 속 대피소에 몸을 누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까매졌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옷과 배낭이 시나브로 젖어드는 축축한 날씨에 몸이 천근만근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다리의 힘이 풀린 데다 물기 머금은 돌너덜에 자주 미끄러지다 보니 발이 삐고 넘어지는 위험한 상황도 많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녀석의 조잘거리는 입에서 말이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방증입니다. 능선 아래 산자락은커녕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뿌연 등산로는 길고도 지루했습니다. 짓궂은 날씨는 아이의 지리산 종주 시도를 더욱 무모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쉬어가자는 말조차 하기도, 듣기도 귀찮아하기를 두 시간, 가까스로 첫째 날 밤을 보내야 하는 연하천 대피소에 닿았습니다.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반찬이래봐야 즉석 식품 두어 가지가 고작인 단출한 식사지만, 지쳐 허기진 까닭인지 아이는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았습니다. 반찬 투정은커녕 밥 먹는 모습이 게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밥도 밥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가 7살이 되도록 우리 부자, 단 둘이서 외박하기는 처음입니다. 늘 엄마 곁에서라야만 잠들었던 녀석이 아빠와 나란히, 더욱이 낯설고도 비좁은 성냥갑 같은 깊은 산 속 대피소에서의 밤에 적응하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줌 마렵다며, (몸은 피곤한데) 잠자리가 불편해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며 아빠에게 징징거리길 수차례, 자정이 다 돼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대피소 밖을 내다보니, 산 전체를 덮어버린 시커먼 구름이 외려 또렷하고 안개비 소리마저 요란스럽게 들렸습니다.

# 2008. 08. 18. 둘째 날

둘째 날 비바람을 헤치며 벽소령 넘어 칠선봉에 이르자 서 있기도 곤란할 만큼 비바람이 거셌습니다. 그렇잖아도 힘든 코스인데, 아이의 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돼 갔습니다.
둘째 날 비바람을 헤치며벽소령 넘어 칠선봉에 이르자 서 있기도 곤란할 만큼 비바람이 거셌습니다. 그렇잖아도 힘든 코스인데, 아이의 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돼 갔습니다. ⓒ 서부원
설마 했던 날씨가 우리 부자에게 재앙처럼 다가왔습니다. 아침 늦게 눈을 떴지만 그토록 바랐던 해는 보이지 않고 여전히 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예 검은 빛의 안개비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산을 휘감아 버렸습니다.

출발 전 인터넷을 통해 대피소를 예약할 때, 첫날 아이가 많이 지칠 것으로 판단해 두 번째 날 일정을 다소 느긋하게 잡아 연하천 대피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석 대피소까지 가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순전히 첫날 아이의 체력이 소진될 것을 감안한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이 가장 큰 변수가 되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비옷을 걸쳐야 하는 불편함과 물먹은 배낭을 지고 가야하는 체력 소비도 그렇지만, 아이가 가파르고 미끄러운 바위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겪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전반적인 내리막길인데다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거센 비바람에다 온통 울퉁불퉁한 바윗돌을 디디며 가야 했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비옷은 입었으되 벽소령에도 닿기 전에 온몸은 땀인지, 비인지 모를 물로 범벅이 돼 버렸습니다.

비바람은 계속되고... 지루한 고행의 연속

둘째 날 세석 대피소에 이르는 길 가파른 바윗길에는 어김없이 로프가 매달려 있는데, 비옷을 걸친 채로는 오르기 힘들어 벗어버리더군요. 이곳에서 무릎이 긁히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둘째 날 세석 대피소에 이르는 길가파른 바윗길에는 어김없이 로프가 매달려 있는데, 비옷을 걸친 채로는 오르기 힘들어 벗어버리더군요. 이곳에서 무릎이 긁히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 서부원

벽소령 대피소에 닿자마자 취사용 가스버너로 불을 지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추위에 잔뜩 움츠린 녀석의 몸을 덥히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 한참을 머물며 비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연신 하품을 하는 녀석의 모습이 무척 측은해 보였고,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안개비는 소낙비가 되어 후드득거렸습니다. 한두 시간을 기다렸지만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냥 기다렸다가는 어두워지기 전 세석 대피소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쨌든 길을 나섰습니다. 초콜릿을 먹고, 따뜻한 물을 계속 들이키며 힘내자고 다독이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벽소령에서 대피소가 있는 세석평전까지는 1500~1600m의 산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 하는 종주 능선 중 가장 길고도 험한 구간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화창한 날이라면 곳곳에서 발아래 장쾌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덤이라도 있지만, 코앞도 보이지 않는 이런 궂은 날씨에는 갑절은 더 힘들고도 지루한 고행길입니다.

지친 우리를 조롱이라도 하듯 비보다 더 세차게 약숫물을 내뿜는 선비샘을 지나 칠선봉에 이르자 비바람이 아예 비옷을 벗기고 찢어낼 기세로 몰아칩니다. 바위나 나무에 기대지 않고서는 서 있기조차 곤란할 지경입니다. 마지막 한 고비, 저 앞 영신봉만 넘으면 되는데, 날씨는 우리 부자의 체력과 인내력을 조금 더 시험하고픈 모양입니다.

단 한 마디 말없이 영신봉을 넘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도 그 기세등등했던 비바람은 잦아들었습니다. 이틀 내내 줄곧 질퍽한 길을 걷다보니 운동화는 이미 황톳빛으로 변해 버렸고, 물에 불어터진 녀석의 발은 할아버지의 그것마냥 쭈글쭈글 했습니다. 세석 대피소에 이르니 발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목욕탕 속에서 막 나온 듯 축 처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가끔 흐림'이란 예보가 맞길 간절히 바라다

채 10km도 되지 않아 가벼우리라는 둘째 날 여정이 거센 비바람 때문에 7시간 동안의 '지옥 훈련'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피소에서 잠자리를 배정받자마자 대여한 담요를 펴고 드러누웠습니다. 밥을 짓거나 씻는 것은 물론, 먹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을 정도로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고등학교 학생 한 무리가 소풍이라도 온 듯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그 소란스러움마저도 자장가로 여겨질 정도로 힘든 하루였습니다. 눈이 반쯤 감긴 녀석을 억지스레 깨워다가 옷을 갈아입히고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아예 말이 없어진 녀석의 표정에서 더 이상의 '자만심'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잠들기 전 뜬금없이 "엄만 지금 뭐하고 있을까"라고 묻는 모습에서 몹시도 힘들었던 하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날. 새벽녘에 일어나 길을 나서야 합니다. 밤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가자면 늦어도 오후 3~4시까지는 산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빠듯한 시간도 시간이지만, 마지막 날마저 험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천왕봉 오르는 건 물론, 중산리에 이르는 깎아지른 듯한 내리막길이 아이에게는 무척 위험할 것입니다.

어차피 산 날씨는 두루뭉술한 기상청의 예보와는 상관없이 변덕스러운 법이니 여느 때 같으면 크게 귀 기울이지 않지만, 피곤에 찌들어 웅크린 채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노라니 '가끔 흐림'이라는 예보가 맞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세석 대피소를 뒤덮은 짙은 밤 안개비는 연하천 대피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 2008. 08. 19. 셋째 날

셋째 날 세석에서 드디어 해를 보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빠꼼히 고개를 내민 지리산 자락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종주하면서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지리산 풍광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셋째 날 세석에서 드디어 해를 보다검은 먹구름 사이로 빠꼼히 고개를 내민 지리산 자락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종주하면서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지리산 풍광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 서부원

새벽 산행을 나서는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습니다. 부리나케 바깥에 나가 보았습니다. 고맙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날이 개어 있었습니다. 언제 비바람이 몰아쳤냐는 듯 새벽녘 둥근 보름달이 유난히 밝고 환했습니다.

아빠의 즐거워하는 호들갑에 잠이 깬 아이도 구름 걷힌 하늘을 보더니 피곤한 기색이 싹 가셨습니다. 아빠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는 대피소 난간에 기대어 서서 주변의 너른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의 맨살을 본 건 이 아침이 처음인 셈이라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집 앞의 텃밭 같이 생겼다"며 이곳이 산꼭대기 능선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세석평전이라고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7살의 순진무구한 눈으로 본 대로 느낀 대로 정확히 지형을 파악해내고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가을의 그것 같은 깨끗한 하늘은 종주 마지막 날에 힘을 북돋워주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세석평전을 분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1700여m의 촛대봉을 지나자 다시 변덕스러운 날씨의 시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 세석평전에서만 맑은 하늘을 허락해준 셈입니다. 어차피 이틀 동안 비바람에 면역된 터라 녀석의 얼굴은 그리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습니다.

세석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거리에 비해 코스가 무난합니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거쳐 정상인 천왕봉에 이르는 막바지 가파른 오르막을 차분하게 준비하라는 지리산의 배려입니다.

장터목에 이르러 마사지를 해줄 요량으로 녀석의 다리를 살펴보니 미끄러지고 넘어져 긁힌 상처가 한두 군데 아닙니다. 집에서 같으면 울며불며 약 발라달라고 아우성일 텐데도 언제 다친 지도 모를 뿐더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의젓하기까지 합니다.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주려니 어째 좀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나중에 날씨 좋을 때 다시 와야겠다"

셋째 날 드디어 천왕봉에 오르다 계속된 궂은 날씨도 일곱 살 바기의 천왕봉 등정을 막진 못했습니다. 다만 발아래 장엄한 경치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셋째 날 드디어 천왕봉에 오르다계속된 궂은 날씨도 일곱 살 바기의 천왕봉 등정을 막진 못했습니다. 다만 발아래 장엄한 경치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 서부원
제석봉 고사목 지대를 지나 천왕봉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에 다다르니 비바람은 아예 태풍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던 아이인데 몸을 가눌 수 없는 바람에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거창한 이름 그대로 아이에게는 마지막 시험대였습니다.

바위를 기어오르다시피 했고,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매달리듯 올랐습니다. 200m, 100m, 50m 드디어 천왕봉 정상을 알리는 봉긋한 표지석 앞에 섰습니다. 끝내 해냈다며 얼싸 안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돌아올 리 만무한 메아리를 외쳐보기도 했습니다.

기념할 만한 순간을 사진에 담고 나서 거센 북풍을 피해 남쪽 바위 면에 내려와 앉았습니다. 추위에 떠는 아이에게 아빠의 바람막이 점퍼를 입혀주었더니, 수도승 마냥 아무 말 없이 천왕봉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녀석도 목표에 이르고 난 뒤의 허탈감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무모한 바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구름 걷히길 마냥 기다렸습니다. 10분, 20분, 30분.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도, 점점 더 저녁처럼 캄캄해질 뿐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산줄기와 구름의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목석처럼 굳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끝내 정상에서의 비 갠 하늘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웠지만 좋게 생각하면 그 덕(?)에 지리산 종주를 한 번 더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산을 내려가면서 "다시 지리산에 가자면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힘들어 당장은 못하겠지만, 나중에 날씨 좋을 때 다시 와야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자신감이 생긴 건지, 등산에 맛을 들인 건지, "지리산만큼 힘든 산이 또 있느냐"며 캐묻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에 올랐던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무심코 설악산이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다음엔 설악산에 가자고 합니다.

정상에 오른 후의 허탈감일까? 천왕봉 정상 남쪽 사면에 기대어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멍하니 구름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정상에 오른 후의 허탈감일까?천왕봉 정상 남쪽 사면에 기대어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멍하니 구름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 서부원

낡아버린 아이의 운동화... 다음은 설악산이다

셋째 날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식사, 라면 로터리 대피소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습니다. 사흘 내내 밥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준 아이에게 고마웠습니다.
셋째 날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식사, 라면로터리 대피소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습니다. 사흘 내내 밥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준 아이에게 고마웠습니다. ⓒ 서부원

이번 산행에서 얻게 된 '훈장'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두 다리엔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렇지만 울거나 아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잘 버텨내 외려 안쓰러웠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얻게 된 '훈장'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두 다리엔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렇지만 울거나 아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잘 버텨내 외려 안쓰러웠습니다. ⓒ 서부원

중산리 쪽으로 암벽을 타듯 1시간 남짓 내려오니 로터리 대피소입니다.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 준비했습니다. 고작 라면일 뿐이지만,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고 했습니다. 늦은 점심을 라면으로 때운 후 벤치에 걸터앉아 우연히 녀석의 눅눅해진 운동화를 보니 신발 바닥의 홈이 많이 닳아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기 전 불과 며칠 전에 새로 산 건데 완전히 낡아버린 겁니다.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주변의 우려 속에 시작한 일곱 살배기 아이와의 지리산 종주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래 친구들은 영어다, 수학이다 선행 학습을 하며 취학 준비를 하는 중요한 때라지만, 그나마 다니는 유치원마저 쉬면서 아빠와 함께 사흘 동안의 산 생활을 체험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구입한 운동화인데. 이번 사흘 간의 종주로 낡아버린 '새' 신발의 모습입니다. 바닥 곳곳에 홈이 닳아 새로 사야 할 지경이 되었더군요. 아이는 이 신발만 보면 지리산을 떠올리게 될 테니 버릴 수는 없겠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구입한 운동화인데.이번 사흘 간의 종주로 낡아버린 '새' 신발의 모습입니다. 바닥 곳곳에 홈이 닳아 새로 사야 할 지경이 되었더군요. 아이는 이 신발만 보면 지리산을 떠올리게 될 테니 버릴 수는 없겠습니다. ⓒ 서부원
그저 취학 전 아빠와의 추억 거리 하나 나눠가질 생각으로 길을 나선 것이었지만, 종주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물론 대피소 직원들까지도 올해 '최연소 등산객'이라며 의미를 부여해주었습니다. 아빠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큰 사고 없이 완주해낸 것도 어쩌면 만난 등산객들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넨 '대단하다'는 칭찬에 우쭐해져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아이는 달라진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리산 때문에 이래저래 며칠 동안 유치원에 빠졌더니 숙제가 밀려 힘들다며 투정이지만, 그래도 녀석의 기억 속에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대단한 일을 경험했다는 뿌듯함만큼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산행 중 만난 사람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먹었고, 어떤 봉우리를 넘었는지, 또 어디에서 쉬었고, 어느 곳에서 힘들었는지 등을 떠올리며 지금도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7살짜리 아이의 사흘 동안의 지리산 종주는 어쨌든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은 겁니다. 녀석의 말마따나 내친 김에 다음은 설악산입니다.

덧붙이는 글 |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로 무척 고생했던 아이입니다. 뾰족한 약이 없어 오로지 스스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는 '뻔한' 조언만 들어왔습니다. 체력을 기르는 것이 곧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에 짬이 날 때마다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오르는 등 운동을 해왔고, 이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볼에, 사타구니에 긁어대 진물이 흘렀던 아이가 지리산 종주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아빠로서 고맙고도 고마운 일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지리산 종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