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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벌어진 권투시합에서 이겨 세계참피언이 된 한 청년이 귀국을 한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부터 중계방송을 하던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더욱 커져가고 서서히 멈춰선 비행기 트랩을 정보기관원이 재빨리 뛰어 올라가 기내에서 선수를 먼저 만난다. 이윽고 챔피언이 두 손을 흔들며 비행기에서 내려와 중계석 아나운서 옆자리에 앉는다.

"OOO선수 챔피언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먼저 소감부터 한 말씀 해 주시죠" 중계 아나운서의 주문에 챔피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첫마디를 토해낸다. "먼저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 감사드립니다" - 5공 때 세계챔피언을 땄거나 국제 대회에서 승리하고 귀국하는 선수들은 대게 이렇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자신이 피땀 흘리며 노력해 챔피언이 된 것과 전두환 대통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으나 5공 정권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준 스포츠 선수들에게 반드시 대통령께 감사드리도록 함으로써 국민들이 느낀 기쁨 뒤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숨은 공로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20여년 전의 이야기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3S(스포츠·스타·섹스)정책은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즐거움의 공급' 수단으로 흔히 활용되곤 한다. 아무튼 우리도 곧 그런 중계방송을 다시 듣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 비슷한 중계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지난 19일 베이징 올림픽 스포츠 센터 체육관에서 여자 핸드볼 8강전 한국 대 중국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정확히 후반 27분 한국이 31 대 22로 앞서 갈 때 SBS아나운서와 함께 TV 중계방송을 하던 해설자가 갑자기 "이명박 대통령과 문화체육부 장관님의 많은 관심에 꼭 보답을 해야겠습니다"라고 격앙된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 경기장에 이명박 대통령과 유인촌 장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무리 보답할 일이 많았다 해도 바다 건너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전파에 그런 외침을 실어 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우연이나 그냥 별 의미 없이 이뤄진 해프닝이 아니라는데 있다. 나라를 감싸가고 있는 기류가 반드시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런 흐름을 재빨리 간파한 해설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올림픽 대표팀 집단 퍼레이드... '땡전뉴스'와 같은 발상

오는 25일 올림픽 선수단이 한꺼번에 귀국해 전례 없는 대규모 집단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과도 궤를 같이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특정 종목차원의 퍼레이드는 있었으나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단이 한꺼번에 귀국하는 것도, 대규모 퍼레이드를 벌이는 일도 전례가 없다. 그동안 올림픽 선수단은 본진이 귀국하면 공항에서 해단식을 하고 해산했으며 일찍 경기가 끝난 선수들은 본진보다 먼저 따로 귀국해 가족과 만나는 게 관행이었다.

이 정권으로서는 쇠고기 정국과 언론 장악, 헛발질 외교 등 이런저런 골치 아픈 분위기를 전환해야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이참에 올림픽이 국민들에게 공급한 기쁨에 편승해 점수도 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시합이 일찍 끝난 선수들은 귀국도 하지 못한채 현지에서 시간 때우기에 애들 먹고 있으며 나이 어린 박태환 선수는 코 감기 상태인데도 반 감금 상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올림픽 선수단이 전례없이 한꺼번에 귀국해서 대규모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경이 TV로 전국에 중계되는 가운데 누군가 대표가 '예전에 그랬듯이' "이명박 대통령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면 이번 이벤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을 다 떨어진 고무신짝쯤으로 아는 후진적 발상이다. 국민을 가르침의 대상으로 인식하던 시절, 땡전뉴스가 일상적이던 시절의 저급한 발상이다.

다 알다시피 땡전뉴스란 시보가 '땡'하고 울리면 첫 뉴스가 항상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시작되던 권위주의시대의 상징물이다. TV이건 라디오이건 첫 뉴스는 항상 비중있고 가치있는 것이어야 하나 땡전시대의 첫 뉴스는 가치가 있거나 말거나 그저 전두환 대통령의 이야기가 독차지했다. 언론자유는 털끝만큼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공정성이나 독립성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영방송에서도 그랬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그런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입법을 이뤄냈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 때문에 2000년 통합방송법에서 KBS사장에 대한 대통령의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고쳐 해임할 수 없도록 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당시 강원용 목사가 DJ에게 건의했고 문광부장관에게 의견을 물어 결심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조했듯이 임기가 남아있는 정연주 사장의 해임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 해임의 부당성을 들어 정연주 사장이 제기한 해임처분효력정지신청은 서울행정법원에서 기각됐다. "해임처분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긴급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과민한 해석인지는 몰라도 요약하자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므로 예방조치가 필요 없다는 내용 같다. 정 사장 변호인 측이 지적한대로 "정 사장은 이번 해임처분으로 그 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시간 소요되는 해임무효청구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재판부가 기각결정을 한 것은 해임 자체가 부당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정사장 변호인 측은 즉시 항고했고 지루하게 재판은 이어질 것이다.

새벽닭이 울고 날이 샐지도 모른다. '후임'으로 임명된 사장의 임기가 끝난 뒤에 결판이 날지도 모른다.

스스로 법복을 벗고 금강산 암자로 갔던 이찬형 판사

법언(法諺)에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날 이를 지켜낸 법관은 희생을 당하고 이 법언을 헌신짝처럼 버린 법관은 출세하는 해괴한 사례를 우리는 이 땅에서 적지 않게 봐왔다. 권위주의 군사통치시절에 그랬다.

1971년 6월 국가 배상법 위헌 판결 사건은 사법부내에서 지금도 신화로 남아있다. 국가 배상법상 공무원의 과실에 대한 국가배상 대상에서 군인은 제외한다는 단서가 발단이 된 사건이었다. 이 단서 조항이 위헌이라면 당시 파월 장병 사상자에게 정부는 300억원이라는 거금을 배상하게 되어있었다. 정부는 총력을 기울여 대법원 판사들에게(당시는 헌법재판소가 없었다) 로비도 하고 협박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 합의체는 9 대 7로 "군인에 대해서만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 9명의 대법원 판사들은 그 뒤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명에서 무더기로 목이 잘렸다. 나항윤, 방순원,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홍남표, 한봉세, 손봉욱, 유재방 선생 등이 그들이다. 그 분들은 지금도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권위주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무렵 통치권자의 뜻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에게 "국가관이 없는 법관"이라고 질책을 하는 참혹한 본을 보인 대법원장도 있었다. 법관의 판단 하나 하나는 더러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일제 때 평양 복심(覆審)법원에 이찬형이라는 판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살인죄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한다. 문제는 그 뒤에 생긴다. 사형까지 집행된 어느 날 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힌 것이다. 이찬형은 그 날로 법복을 벗고 금강산 암자로 들어가 수도승의 길을 걷는다. 그는 훗날 우리나라 최고의 선승인 효봉스님이 된다. 그는 그렇게 책임을 졌다.

판단 잘못이나 권력의 압력에 굴복해 사법살인을 하는 비참한 죄를 저지르고도 책임지지 않는 뻔뻔한 법관들도 우리는 보았다. 진보당 사건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 사건 등에서 판결로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한 판사들은 누구인가. 책임은 졌는가.

수도승처럼 끝임 없는 구도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게 건강한 법관 이라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했다.

바야흐로 권위주의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권과 언론자유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권과 언론자유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는 두말할 나위 없이 사법부다.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단하는 존경받는 법관이 사법부에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정연주#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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