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비화가야(非火伽倻) 문화유적을 찾아서’를 연재하면서
창녕은, 진흥왕순수비에 의하면 ‘비자벌’,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비화가야’, 일본서기에는 ‘비자발’,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는 ‘불사국’ 등으로 불리어졌다. 비화가야(非火伽倻)는 낙동강 중류의 동안인 창녕, 계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현풍, 남쪽에 영산 등에 이르는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녕은 `제2의 慶州‘로 불릴 정도로 가야시대의 유적 유물이 많다. 문화재 현황은 국보로 창녕진흥왕척경비, 창녕술정리동3층석탑 등 2점, 보물로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 등 9점, 사적으로 화왕산성 등 5점, 중요무형문화재로 영산쇠머리대기, 영산줄다리기 등 2점, 중요민속자료로 창녕 하병수씨 가옥 등이 있으며, 도지정문화재로 창녕 지석묘를 비롯한 37점이 있다.
창녕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연재하기 위해서 답사 코스는, 1) 창녕읍내 지역의 유적과 유물, 2) 계성-옥천지역의 유적과 유물, 3) 영산-남지지역의 유적과 유물을 모두 아우르며, 총 30회 연재할 예정이다. 답사는 전체 발품으로 한다. <기자주>
지난 15일 경남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시인과 함께하는 제5회 경남청소년문학학교’ 한 강좌로 의령지역 문화유적을 답사하였는데, 그때 지역의 김영곤 시인이 해박한 입담으로 문화해설을 하는 것을 듣고 뜨악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토박이로 살면서 진솔한 삶에 밀착한 시를 읊조릴 뿐만 아니라, 의령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조상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풀뿌리 역사를 낱낱이 헤아리고, 조그만 것 하나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역시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정설이 담뿍 묻어나게 했다. 그이 지역 사랑에 대한 자부심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지역에 살면서 창녕에 대한 향토애가 그리 녹록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너무나 컸다. 그다지 많은 발품을 팔지 않아도 창녕에는 숱한 문화재가 널려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자신하며 그것들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냥 무덤덤하게 대했던 탓이다.
하여 이번 기회에 내 고장 비화가야(非火伽倻)의 문화유적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관심을 갖고 눈을 바로 뜨니까 그동안은 쉬 보이지 않았던 유무형의 문화유적들이 뇌리를 헤집고 들었다. 비화가야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가질 만큼 더 많은 문화재들이 신라 천년의 숨결과 함께 다가들었다. 애애한 만남이었다.
그 첫 번째로, 창녕 만옥정공원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한 채 누각에 갇혀 있는 국보 제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와 만났다. 엊그제 처서, 여름의 끝물이라 바람은 서늘하다. 만옥정공원은 긴 하루일상을 낚고 있는 노인네들 차지다. 선머슴애들 파리하게 잘 깎여진 잔디밭을 지나자 발길 뜸한 언덕배기에 당그랗게 자리하고 있는 국보 신라진흥왕척경비, 고개를 외로 꼬며 길손을 맞는다. 누각에 갇힌 그 신세가 처연하다.
화왕산 자락 아래 만옥정공원, 이곳에는 국보 33호인 진흥왕척경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0호인 퇴천리3층석탑, 대원군척화비,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창녕객사, 그리고 창녕지역에 흩어져 있던 현감 공덕비가 뭇 세월을 담보하고 서 있다. 제각각 원래 점지했던 자리를 벗어나 한곳에 모였지만 그 모습들이 어찌 처량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답사가의 객쩍음 때문일까. 있는 그대로의 볼품을 생각한 위치 선정이 아니라 내보이기 위한 거창함이 먼저 보였던 까닭이리라.
그것은 수십 년째 억새를 갈대라고 우기며 ‘화왕산갈대제’를 열고 있는 어처구니와 맞닿아있다. 억새와 갈대의 서식지 자체를 모르는 아둔함이 빚어낸 아이러니가 모두에게 먹혀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만옥정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제자리를 잃고 억지 춘향 하듯 남의 허세에 어깨 춤사위를 추고 있다. 이 때문에 진흥왕척경비는 더 측은했다.
원래 진흥왕척경비는 1914년 말흘리 85번지(지금 창녕여고 예지원 뒤쪽) 밭 속에 묻혀 있었는데, 목마산성으로 소풍을 갔던 한 어린이가 다랑이밭에서 처음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가 동경제대에서 이 비를 학계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만옥정공원에 서 있는 신라진흥왕척경비는 1924년에 비각을 짓고 현 위치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 비는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테두리선을 돌렸다. 하지만 비석에 새긴 글씨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몹시 어렵다. 비석 아래쪽에 새겨진 글씨만 겨우 띄엄띄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간추려 보면, 비석의 두께가 30㎝, 너비 175㎝인 자연 그대로의 편편한 화강암으로 한 면을 갈아서 비문 27줄 643자를 세로로 새겼는데, 자수는 적게는 3자부터 많게는 27자까지로(세로의 글자 수는 26자이나 가로 셋째 줄만 유일하게 27자이다) 일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비문 외곽에 선을 그어 구분지어 놓았다. 서체는 예서와 해서의 중간으로 광개토대왕비문과 흡사하다. 643자 가운데 판독된 것이 400자 정도인데, 비문의 첫 부분에 ‘辛巳年二月一日立’(산사년 2월 1일 세움)이라는 글자가 뚜렷하여 이 비가 진흥왕 22년(561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략 세 가지다. 첫째는 비를 세운 사실, 곧 진흥왕이 창녕의 비화가야를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나라 땅을 넓힌 사실이다. 이를 진흥왕 22년(561) 시점에서 본다면 이 지역에 대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창녕비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토지, 산림 등 경제적 관계의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명시하고, 그 관련 업무의 계통 수립과 처벌 결정권의 소재를 밝혀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진흥왕 22년(561) 당시의 영토 중 낙동강 하류 동쪽의 요충지인 창녕에 중앙 정계의 최고 귀족과 지방 통치의 담당자인 사방군주 등을 회집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창녕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를 점차 확대해감에 따라 이미 전쟁으로 취득한 영역의 토지와 그 경작자 등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대상과 관련된 공적인 권력의 행사 규정, 그리고 그 계통의 확립 및 위배 시 처벌 규정 등을 명료히 해 두는 교서를 하달하고 순수비를 건립토록 한 것으로 보여진다.
후반부는 진흥왕의 행차에 자리를 같이한 인물들을 관직, 출신지, 이름, 직위 순서로 적어놓고 있다. 그 때문에 이 비를 ‘진흥왕순수비’라고도 부른다.
진흥왕이 새롭게 신라의 땅으로 복속한 곳에 세운 비가 이른바 진흥왕순수비다. 그러니까 일종의 전공 기념비인 셈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진흥왕순수비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를 포함하여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4개의 순수비 중 창녕비는 순수비라 하지 않고 ‘척경비’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들은 창녕에 세워져 있는 이 비는 다른 지역의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없기 때문에 척경비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척경비(拓境碑), 즉 땅을 넓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것이다. 게다가 창녕에 이 비를 세울 때만 하더라도 진흥왕이 이른바 순수(巡狩)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비에 진흥왕을 따르던 신하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라 불러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이 창녕비는 진흥왕척경비다. 그동안 경주를 답사하고, 공주부여를 다녀왔으며, 남도일번지를 휘돌면서 발품을 팔아 문화유산에 대해 그저 맨눈은 아니라고 자신하는데도 이번에 관심을 두고 훑어본 창녕의 유적유물들은 여전히 낯설다.
창녕토박이로서 너무나 허두로 지나쳐 살았다는 낭패감이 든다. 낼모레 쉰 나잇살을 앞두고 있는데, 분발해야겠다. 더 이상 국보 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가 쓸쓸하고 고즈넉하게 멀어진 당신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언젠가 의령 김영곤 시인이 창녕에 들르면 걸쭉한 목청으로 창녕 문화의 향기를 들려주고 싶다. 다음 답사지는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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