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혜와 대조되는 조순호나민혜의 눈에 비친 조순호는 여전히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여자 중에는 스물이 넘으면서 부쩍 여성적 매력이 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조순호가 바로 거기에 해당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맞은 신체에 정연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얀 가운마저도 여성적으로 보였고 목에 두르고 있는 검은 청진기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그녀의 귀여운 액세서리같이 보였다.
"순호야, 너 참 예뻐졌다."
운동을 하는지 조순호의 얼굴과 몸은 생기와 탄력이 넘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요가와 승마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독립군이 되었다는 김문수의 소식을 들은 후, 자기의 삶에 어떤 큰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고 그에 따른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조순호는 나민혜를 우동집으로 데려갔다. 조순호가 젓가락을 맞춰 나민혜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 혹시 김문수 씨 소식 아니?"
나민혜는 아주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라."
조순호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나민혜가 또 돈을 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삿포로에서는, 돈은 없었지만 나민혜가 김문수의 여자라는 것 때문에 빌려줬던 그녀는 지금은 돈이 있기 때문에 빌려 주기로 했다. 그녀는 되돌려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시 찾아온 김일성보통 서간도라고 하면 압록강 이북의 만주를 말하지만, 더 정확히 짚으면 중국의 동북삼성 중 하나인 길림성 이남 지역이었다. 조선인들이 새로 개간한 땅이라고 해서 간도(墾島)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의 동북 방향인 간방(艮方)애 있다고 해서 간도(艮島)라 하기도 했다. 수많은 산간분지로 되어 있는 간도는 10월 중순에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면서 겨울이 시작되는데 이 겨울은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풀렸다.
김문수가 양세봉의 휘하에서 황동하고 있는 곳은 주로 간도 지역이었다. 양세봉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봉천성 홍경현이었는데, 이미 그는 홍경현 전투와 영릉가 전투의 승리로 항일 무장 투쟁사를 새로이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양세봉은 자기처럼 일선 중대장으로 독립운동에 데뷔한 김문수에게 유다른 친근감을 느꼈다. 양세봉은 김문수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지만 언제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물었다.
양세봉이 남만주 일대에 명성을 드날리게 되자, 언젠가 한 번 그의 막사에 왔었던 소년 김성주가 다시 찾아오겠다고 연락을 보내 왔다.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꾼 김성주는 19세부터 항일 유격대를 지휘하며 공산당 독립군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문수 동지, 김일성이가 오겠다고 하는데 동지의 생각은 어떻소?"
김일성이 좌우 합작 문제를 논의하러 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의견은 극단적으로 갈려 있었다. 소수의 중대장 급들은 이번 기회에 합작을 성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참모장 김호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진은 김일성을 붙잡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병사 셋을 이념 문제로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양세봉이 김문수의 의견을 중시하는 것을 아는 간부들은 모두 김문수의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문수는 먼저 자기가 의견을 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양세봉은 김문수의 의견대로 하자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문수는 이것은 화급한 문제이자 향후 조선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니 외람되지만 간부진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 형식으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문수는 정말 김일성이 조선 독립군을 이념 문제로 처단했는지를 알아보았다. 관련자들의 진술을 취합해 보니 그것은 맞는 말일 거라는 심증이 들었다. 문제는 목격자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김일성이 얼마나 좌우 합작에 열의와 진정성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김문수는 그 날 저녁 조선혁명군 간부진 20여 명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저는 김일성이 우리 동지를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합작 문제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건 그는 우리의 동포입니다. 그러니 그를 처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처단한다면 그가 앞으로 죽일 적군을 우리가 살려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를 죽이는 일은 어떻든 조선 독립군 내부의 분열 행위입니다.
저는 합작에도 반대합니다. 김일성이 합작에 열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압니다. 그러나 합작 이후가 문제입니다. 그들은 우리더러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10년 전 있었던 자유시 참변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소련 적색군은 전향을 거부하는 우리 선배들을 한꺼번에 도륙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나 이동휘 선생의 말로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시베리아의 낭인으로 죽었습니다.
이런 걸 차치하고라도 저는 좌익이건 우익이건 어느 한 쪽의 색깔을 뚜렷이 가진 사람들과는 함께 일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회색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순수이고 중용입니다. 망국의 상황에서 색깔을 뚜렷이 내는 일은 필경 민족의 반목과 분열을 조장하게 됩니다.
국토를 잃은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무력을 키울 해방구가 꼭 있어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간도입니다. 그러므로 간도는 민족의 성지가 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성지에서 분열하는 사람들이 제 땅을 찾는다 한들 어찌 또 분열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여러분이 김일성을 처단한다거나 아니면 그와 합작한다면 저는 분연히 조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곳에 가서 지하 운동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간도로 올 때 맺은 사랑하는 제 숙부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김문수가 말을 마치자 양세봉은 재빨리 단상으로 올라갔다.
"동지들이여! 김문수 동지의 의견이 맞지 않습니까? 동감하신다면 박수로 표시해 주십시오."
간부 전원이 부서질 듯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박수를 보냈다.
양세봉은 김문수의 논리대로 김일성을 설득했다. 김일성은 매우 아쉬워하면서도 양세봉을 새삼 우러러보게 되었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지극한 예의를 갖추더니 순순히 물러갔다.
군신 양세봉, 남과 북 국립묘지에 동시 안장양세봉, 그는 소작농 출신의 지장이었다. 일본 점령 지대에서 버티고 있는 그는 관동군의 제1 표적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 병력은 연인원 10개 사단 이상이었다. 그는 남만주의 산세에 밝았다. 그는 숨을 곳이 어딘 줄을 알았고 나설 시간이 언제인지를 잘 헤아렸다. 사람들은 그를 군신(軍神)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은 하루가 다르게 그의 지역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그는 사태를 더 이상 낙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뜻있는 큰일을 하나 터트려야 한다는 초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박창해라는 조선인이 그를 찾아왔다. 박창해는 홍경현 북방에 있는 이름 난 마적단의 간부라고 했다. 그는 지난 달 말일에 마적단장의 첩 셋이 한꺼번에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마적단장은 조선혁명군과 세를 모아 일본군에 복수하려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합작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협상 대표를 이리 보내라고 하시지요."
양세봉은 김문수의 신중론을 완곡히 거절했다.
"먼저 그쪽에서 사람을 보냈으니 우리가 가보는 것이 협상 진척에 도움이 될 것이오. 내가 좋은 추석 선물을 가져오리다."
양세봉은 부하 여섯을 대동하고 신빈현 소황구로 가던 중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저격되었다. 박창해는 몸을 감췄고 대원들이 양세봉을 급히 민가로 옮겼으나 상처가 깊어 다음 날 그는 죽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은 양세봉의 가묘를 파헤쳐 목을 잘랐다. 그의 얼굴은 시가지에 효시되었다.
김문수는 그의 목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비가 워낙 삼엄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는 양 장군의 목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대신 그는 일본 밀정 박창해를 1년 반의 추적 끝에 찾아내 죽여 버렸다.
지금도 신빈에는 양세봉 장군의 항일 투쟁을 기리는 민요가 불린다. 조선족 학교의 정문 옆에 남아 있는 그의 대리석 흉상을 본 한국인도 적지 않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동시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동작동 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는 허묘(虛墓)이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묘는 그의 가묘를 옮긴 것이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 양세봉의 처와 아들을 위해 평양에 집을 마련해 주었다.
아름다운 한국의 역사서들학교를 그만 둔 김영세는 집에서 독서로 소일했다. 그는 <고려사> 열전을 읽고 있었다. 고려사는 동양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편찬된 사서였다. <고려사>는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재구성했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기 때문에 객관성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편찬자인 유학자의 명분론이 반영되어 있는 사서라고 할 수 있었다.
김영세는 태조부터 세종 대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유학자들이 30년간 집필한 사서를 읽으며 아름답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고려 목종 때의 학자 '최충전'을 읽고 있었다.
최충의 자는 호연이고 청주 대령군 사람으로 풍채가 큼직하고 지조가 굳세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으며 목종 8년(1005)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최충이 시중으로 도병마사가 되었을 때 왕께 진언을 하였다.
"작년에 서북의 각 주와 진에서 흉작이 들어 백성의 생활이 궁핍한데도, 남자는 부역에 시달리고 여자는 징발에 시달리니, 앞으로 성지를 수축하는 이외의 공역은 모두 금하여 주시옵소서."
왕이 그대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동여진의 추장 무리 86명은 자주 변방을 침범한 자들로 지금 경관에 억류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본시 오랑캐들이란 인면수심이어서 형법으로 징계만 할 수도 없고 인의로 교화를 하기도 어려운데, 억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깊을 것이고 원망도 있을 것이며, 아울러 비용도 크게 들어가니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왕이 그에 따랐다.
선생은 70세가 되어 왕에게 퇴직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왕은 오히려 벼슬을 추가하고 예물 을 보내도록 하였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작자 김갑수는 최근 전작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