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얼린 물 좀 먹고 가요."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친 차끈한 길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쌀쌀한 바람을 머리 뒤로 빗어내고 달려가니 저만치 J가 나를 기다리며 슬쩍 웃음을 흘린다. 아들과 함께 있는 남자로부터 얼려 녹인 물을 건네받아 마시던 중 내가 도착하자 나에게도 한 잔 권하는 것이다. 차갑게 냉각된 물을 털어 넣으니 가슴까지 확 뚫린 듯하다. 자전거 타는 J를 보고서는 남자가 먼저 물을 권했단다.
시원하게 목을 축였으니 우리도 뭔가를 보답해야 했다. 가방을 뒤져 참치캔과 과자를 집어 아이에게 주었다. 낯선 이방인에 사근사근 대하지 못하는 과묵한 아이의 표정과 냉수 한 사발 대접하며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표정이 대비된다. '네가 아버지의 나이가 됐을 때 지금 아버지의 넉넉한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겠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달리는데 또 얼마를 가니 이번에는 주스를 가득 따라 주고 각종 열대 과일로 손님을 대접해 준 카를로(Carlo)와 두 딸 라우라(Laura), 멜리(Meley)를 만났다. 어찌나 목이 타던지 그 자리에서 쥬스 1.5ℓ를 한 번에 들이켰을 정도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카를로는 자꾸 뭔가를 주고 싶어했다. 주스로 허겁지겁 목을 축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것저것 더 권한다.
지나가는 길에 이런 대접도 황송한데 늘 우리가 주는 게 더 적다는 것이 미안하고 불만일 뿐이다. 이번에도 생글생글한 두 아이에게 참치캔과 땅콩 과자를 쥐어 주었다. 그랬더니 카를로가 또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탐스레 익은 망고 4개와 바나나 2개 그리고 과야바까지 안겨 준다. 망고 4개를 더 주려던 것을 간신히 무마시키고 나왔다. 받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주는 카를로 입장도 고려해야했다. 마음이 물 먹은 창호지처럼 축 처진다.
정해진 시간의 안내에 따라 정을 뿌리쳐야 한다는 건 늘 어려운 마음의 훈련이다. 막역한 친구를 먼 곳으로 떠나보내듯 카를로의 왠지 처연한 인사가 마음결에 눌러 붙어 버린 듯하다. 이런 마음에 대한 작은 위안일까. 더 차가워진 바람, 더 어두워진 도로 위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너무도 순간적인 일이라 당황하며 기어를 급히 올려 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찬 비라 이미 온 몸은 젖어들었고 시야는 흐려졌다. 조급한 마음에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넘다 다행히 언덕 위에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순간 그 괴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엄청난 무게의 자전거를 집어 들고 축지법 같은 이동으로 단숨에 언덕 위의 집에 들어섰다.
잿빛 하늘에서 밑도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비는 사정없이 땅바닥에 튀겼다. 뒤따라오던 J의 모습까지 집어삼켰다. 먼저 올라온 흥건하게 젖은 내 모습을 보고 사태를 직감한 주인 집 남자가 급히 언덕 아래로 내려가 J를 도와줌으로써 그 역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최악은 면했지만 이미 우리는 비 맞은 생쥐꼴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 현지인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호흡과 함께 안도의 한숨도 같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절망적인 자전거 여행으로 젊음의 마지막 자존심인 패기마저 잃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루카스(Lucas)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와 우리의 상황을 말없이 지켜본 그의 딸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였다. 부녀의 마음 밭이 참 곱다. 아내는 집안일을 하다 멀찍이 우리를 보고 웃기만 한다. 고마운 마음에 함께 먹자며 카를로에게 받았던 과야바를 꺼냈다.
루카스는 여기저기 녹이 슨 무딘 칼인데도 익숙하게 과야바를 잘라낸다. 나와 J, 루카스와 그의 딸이 각각 한 꼭지씩 집어 들고 먹는데, 과연 꿀맛이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타닥타닥 비 내리는 소리는 이제 정감있게 들린다. 피할 공간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는 것이다.
과야바를 먹고 나서는 다시 루카스가 우리를 위해 망고를 꺼내 온다. 이미 가방에도 까를로가 준 망고가 있는데 그의 호의를 져버릴 수 없어 맛있게 먹었다. 언제 먹어도 망고의 맛은 천상의 성찬이다. 가슴이 뜨뜻해진다. 과일 한 알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대도 행복의 기운이 몸 안에 잔잔히 퍼진다.
루카스는 예정에 없이 급히 맞이한 손님을 받아주고 안정시킨 후에야 다시 우리를 보낼 순간을 맞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J의 자전거를 언덕 아래까지 내려놓는데 힘을 보태며 비단결 마음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게 밤이 내렸다.
"형, 무섭지 않아요?"J는 아무것도 없는 밤길을 달리는 데서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뿌려지는 은은한 달빛은 낭만파 화가의 풍경화가 되고 살며시 속삭이는 바람은 고요한 이 밤의 노래가 된다. 그러니 무서울 리가. 이만한 밤풍경을 느끼는 것도 자전거 여행만의 매력이다.
바나오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우리는 우연히 만난 노아(Noa)라는 남자의 누이 암빠르(Ampar)의 집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숙소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먼저 다가오더니 여기저기 상황을 점검하고 누이의 집을 추천한 것이다. 노아가 미리 경찰에게 협조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아주 맛있는 망고와 저녁식사가 포함된 건 우리로선 최고의 복이다. 이렇게 피곤한 하루가 저물어갔다. 하루 사이에 현지인의 도움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받은 건지. 오늘따라 요동치게 찾아온 행복에 대해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나와 J는 대화를 나누다 잠시 마음이 숙연해졌다.
노아가 말했다.
"난 쿠바 사람이지만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정치관계로 영향 받지 않아. TV나 신문을 통해 정치상황을 늘 체크하거든. 그래서 다 알고 있지. 무슨 얘긴고 하면 미국 때문에 역사적으로 무역이 많이 차단됐잖아? 사실 미국과의 관계가 그렇긴 하지만 그건 정치문제일 뿐이야. 정치문제는 정치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여기 사람들은 적어도 미국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아. 쿠바 체제가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린 자유롭거든. 그래서 미국인이 와도 괜찮아. 언제든지 환영이야. 물론 너희들 같은 여행자도 말야. 우린 50년 전에는 무척 가난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만 하거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쿠바 사람들이야. 그래서 지금 이 상태가 행복해. 이게 쿠바거든. 만약 너희가 3년 후에 다시 여기에 와도 우린 그대로 여기 있을 거야. 자전거를 놓고 가도 그대로 찾을 수 있는 건 물론이지." 살짝 취해있는 노아의 긴 얘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손님을 집에 들이고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업 된 듯 보였다. 톤은 나지막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그의 진심은 강렬하게 느껴졌다.
노아의 기쁨은 그것을 받아들인 우리에게 감사로 흡수되었다. 오랫동안 그 진심을 잊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망각의 존재가 늘 그렇듯이 뒤돌아서면 그 고마움을 잊고, 내가 받은 감격을 놓치고, 다시 그렇고 그런 뻔한 인간으로 점차 수렴하게 되니….
우리는 쿠바를 갇힌 세계라고 생각한다. 허나 그건 명백한 편견일 뿐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오늘을 만족할 수 있는 삶도 있었다. 길을 가는데 얼음물을 주던 남자나 과일을 듬뿍 내어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운 미소를 보이던 카를로, 빗 속에서 귀찮고 고생스런 일을 자기 일처럼 묵묵히 도와준 루카스, 그리고 마음 문을 활짝 열어 우리를 품어 안아 준 노아까지…. 이만큼 마음이 열린 세상, 어쩌면 쿠바이기에 만날 수 있는 순수한 영혼들인지도 모른다. 넉넉한 삶이 아님에도 마음만은 부유했던 그들의 살가운 정이 흐린 날씨에 마음의 난로가 되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