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걷는 것이 길이라지만, 사람마다 걷는 길은 다릅니다. 아스팔트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흙길을, 그리고 어떤 이는 바닷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신분에 따라 걷는 길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행복의 길... 22km 길트기
누구나 걸어왔던 길은 다양합니다.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며 걸었던 동구 밖 길은 기다림의 길이었지요. 유년시절 친구와 걸었던 기찻길 옆 코스모스 길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리고 강원도 절집 가는 내설악의 산행 길은 수행의 길이었지요. 혼자 걷는 길이 수행의 길이라면 둘이 걷는 길은 데이트가 되고, 여럿이 걸으면 기행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걸었던 길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길이 있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쓰레기도 버리러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22km를 걸으려고?"
지난 27일 아침, 제주올레 9코스를 참가하겠다는 내게 던진 남편의 말입니다. 정말이지 그동안 나는 간세다리(느리고 게으른 사람)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내가 하루 22km를 걷는다는 것은 무리지요.
하지만 드디어 친구와 함께 걷는 제주 올레 길 길트기가 시작됐습니다. 제주 토박이들에게 올레 길은 자신의 인생길이지요. 척박한 땅에서 인정의 꽃을 피우며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가 담겨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육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레 길은 동경의 길이기도 합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중산간 마을과 오름, 목장 길과 바다길이 이어지는 제주올레 9코스는 어쩌면 제주사람들의 삶이 깃든 길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내가 이 동경의 길을 걷게 된 동기는 간세다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온평 포구 공백의 미학에 빠지다
오전 10시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포구. 한적하던 제주의 동쪽마을 포구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주민 1500여명이 사는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마을은 '열운이' 마을로 삼성신화 혼인지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특히 온평 포구 연혼포에는 세 공주가 입도 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지요.
연혼포 바로 옆에 있는 온평리 포구에 9월 아침 햇빛이 넘실거렸습니다. 바람 한 점 없으니 포구 모퉁이에 떠 있는 테우도 부동자세입니다. 너무 작아 눈물 나는 배 한 척은 어선이라기보다도 인테리어 소품 같습니다. 작은 포구의 한적함에 공백이 있습니다. 공백은 바로 여유로움입니다.
옛날에 온평리 마을을 밝혔을 어촌마을 등대 도대불이 꼭 첨성대 같습니다. 밭벼를 포구 주변에서 말리는 온평리 아낙은 "오늘 무슨 일 있수꽈?"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는 "옛날에는 이곳에 마을 당이 있었던 자리우다." 친절하게 마을 이야기를 알립니다. 아주머니는 한적한 포구에 갑자기 많은 손님이 모이니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요.
벽랑국 세 공주 재현하는 온평리 주민 예술단
온평이 마을 예술단원들의 길트기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허연 머리를 연출한 강추익(60·온평리 마을 주민)씨와 키다리 아저씨는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삼성신화 관련 유적지인 연혼포와 혼인지의 연계로 벽랑국 세공주와 삼성신화를 재현한 길트기라더군요. 이들은 온평리 예술단원인데, 마을 주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분장을 한 모습이 꼭 옥황상제 같기도 하고 산신령 같기도 헙니다. 이들은 "마을을 찾아와 줭 고맙수다!"라며 인사를 하더군요.
삼산오오 걸으며 남국정취 빠져
오전 10시 10분, 드디어 제주 올레 9코스 22km 도보 기행이 시작됐습니다. 온평리 포구에서 출발한 올레꾼들은 왼쪽 해안도로를 따라 걷더니 다시 마을길로 접어듭니다. 온평리 해안도로에는 오징어가 걸려 있습니다. 바다냄새 듬뿍한 남국의 정취가 물씬하더군요.
삼삼오오, 둘이서, 혼자서, 아니면 단체로 참가한 이들도 많습니다. 올레꾼들의 참가 사연도 각양각색입니다. 경상북도가 고향이라는 중년의 남자는 혼자 걷는 것이 취미라 합니다. 백두대간을 혼자 걸었다는 중년의 아저씨는 "혼자 걸으면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혼자서 길을 걷다 보면 친구를 만날 수 있지요.
흙길, 자갈길, 농로길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걷는 길
반농반어의 마을 온평리, 해안선이 6km에 달한다니 바다냄새가 제법 짭짤하더군요. 그 바다를 뒤로 하고 마을로 접어들면 감귤원이 펼쳐집니다. 올레꾼들의 이야기가 9월의 하늘을 수놓았습니다.
30분쯤 걸었을까요,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체험학습장입니다. 작은 연못에 연꽃 서너 송이가 올레꾼들을 반겨줍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돗통시와 촐눌, 그리고 초가가 배고픈 제주인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이날 참가한 500명 이상 되는 올레꾼은 온평리 마을길을 모두 이었습니다. 빠르게 걷는 이가 있는가 하면 느릿느릿 걷는 사람, 그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걷는 게 아니라, 미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가 올레 길에 툭 하고 풀어집니다.
마을길을 벗어나니 농로입니다. 자동차에 의지하면 걷기 싫어하던 간세다리들 신이 났습니다. 거무죽죽한 흙길에 거무티티한 자갈길,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 돌담을 옆에 끼고 걷는 올레 꾼의 마음은 그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 가벼울 수밖에요. 날아갈 듯 가벼우니 9월에 걷는 올레 길은 행복합니다.
바다에 떠오른 해... 행복의 길로 이어져
마을 사람들이 사는 집을 훔쳐봤습니다. 돌담 아래 우영 밭에는 고추가 익어 갑니다. 그리고 아열대식물들이 울타리를 만들고 있더군요. 바다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을 쏟으면 넓은 길을 타고 온 마을에 가득 펴져 나간다는 온평리. 다른 곳이 구름에 가려도 온평리에서는 구름 사이로 하늘이 내다보인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올레 9코스 길을 터준 온평리 마을 아침, 파란 하늘이 훤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에는 포구와 해안도로, 마을을 관통하여 농로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온평리 사람들의 인생 길입니다. 그리고 올레꾼들 자신의 길이기도 하지요.
텅빈 온평리 올레길, 그 길에서 공백의 미학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길은 다시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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