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참 복 받은 사람이야.""왜? 뭐가?""생각해봐, 큰 도시에 살면 이런 풍경을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보겠나?""아아, 난 또 뭐라고, 하긴 그래! 남들은 한 번 볼까 말까한 풍경을 철따라 구경하고 다니니 복 받은 게 틀림없지.""게다가 자전거 타고 다니니까 더 좋은 거야. 차로 다닌다면, 이렇게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겠나! 그저 겉핥기밖에 안 되지.""맞아 맞아, 하하하!"
자전거를 타고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금빛 들판을 따라 달립니다. 온종일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녀도 마냥 신나고 즐겁기만 하네요. 눈길 닿는 곳마다 정겹고 넉넉한 풍경에 연방 감탄을 자아냅니다.
남편은 이런 멋진 곳에 자전거를 타고 구경 다니는 게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맛보지 못할 넉넉하고 살가운 가을 풍경 때문에 울퉁불퉁 돌탱이 길을 쿵덕거리며 달려도 조금도 힘든 줄을 모릅니다.
큰 바람 한 번 없이 잘 지나간 덕분에 풍년이여!
몸으로 부딪히며 일해서 땀 흘려 가꾼 알찬 열매를 거둔다면 그보다 더 뿌듯한 일이 있을까? 한 해 동안 가꾼 곡식과 열매를 거두는 농사꾼의 손길에선 저절로 흥이 솟구칩니다. 어르신들만 사는 시골마을이지만, 일구어낸 곡식들을 도시로 나간 자식들한테 나눠 먹일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더구나 올해에는 큰 바람 한 번 없이 잘 지나간 덕분에 풍년이라고 하면서 좋아하십니다. 볕 좋은 곳에 일찌감치 거둔 나락을 널고 있던 노부부가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을 합니다. 두 분 모두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네요. 환한 웃음에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할아버지는 까맣고 기다란 망사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나락을 쏟아 붓고요. 할머니는 손때 묻은 밀개(이렇게 쓰윽쓱 민다고 해서 '밀개'라고 한다면서 쓰는 방법까지 시늉으로 보여주셨어요. 다른 말로는 '고무래'라고도 합니다)로 나락을 골고루 펼치고 계셨어요. 낯선 우리가 사진을 찍으며 이것저것 묻는 말에도 하나하나 대꾸해 주시면서 쉼 없이 일을 하십니다.
"어르신, 농사가 잘 돼서 뿌듯하시겠어요?""암만, 그렇고 말고, 요것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이리 댕길라믄 배고플 텐데, 감 좀 먹고 가소! 내가 따줄게!"
어릴 적 고향 같은 정겨운 풍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 속에 사진기 속에 콕콕 박으며 룰루랄라, 힘차게 자전거를 밟아 갑니다.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리에서 고로면 학성리까지 오고가는 동안 만나는 이마다 하나 같이 살갑기가 그지없어요. 낯선 이한테도 먼저 말문을 틉니다. 또 어떤 이는 먹을 것도 서슴없이 내줍니다.
군위군 고로면 지호3리, 선암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서 정겹게 살아가는 산골 마을에 들어갔어요. 탐스럽게 익어가는 빨간 능금, 몇몇 논에는 벌써 나락을 거두어 볏짚을 한데 모아놓은 곳도 있어요. 콩도 누렇게 익어서 볕을 받으며 더욱 야물어지고 있고요. 모퉁이 하나 돌면 고소한 들깨 냄새가 온통 코를 찌릅니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내려오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납니다. 산 아래 밭에서 고추를 따온다면서 우리를 보더니 무척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네요. 무엇보다 할머니 웃음이 무척 멋졌어요. 환하게 웃는 얼굴이 어찌 그리 정겹던지….
"어서 왔는데, 이키 산골짜기까지 왔어 그래?""구미에서 왔어요. 마을이 참 예쁘네요.""하이고, 그키 멀리서? 그래 어데를 갈라고?""네, 저 산 너머 고로면까지 가려고요.""엥? 자장구 타고 여를 올라간다고?"할머니는 자꾸만 힘들 거라고, 끌고 가야 할 거라면서 조심해서 잘 댕겨 가라고 하시네요. 낯선 이한테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정겨운지 몰라요.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 산길을 타고 내려가니, 저 밑에 집이 서너 채 보입니다. 이 깊은 산속에도 사람이 사나 봐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래요? 평평한 돌 위에 빨갛게 익은 홍시 하나가 있었어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놔둔 것처럼 말이에요.
"어머나! 홍시다!""우와, 맛있겠다.""거, 감 다 따먹고 가소."
우리 얘기가 채 끝나기도 앞서 어르신 한 분이 나오면서 감을 따먹고 가라고 하시네요. 지금까지 다니면서 철마다 복숭아·자두·참외·배·사과…. 갖가지 열매들을 보면서 먹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렇더라도 어디 남의 것을 함부로 따먹을 수 있나요? 그것도 농사꾼들이 애쓰는 걸 날마다 눈으로 보고 다니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어르신은 우리를 보고 다 따먹고 가라니, 무척 놀라웠지요.
"아니, 그카지 말고 내가 따줄 테이까 마이 먹고 가소."하시더니, 어디선가 긴 장대를 가지고 와서 감을 따 주셨어요. 후두두둑~ 마구 떨어지는 감을 보니 매우 잘 익었어요. 어떤 것들은 퍽퍽! 터지기도 했어요. 다 못 먹는다고 그만 따라고 말려도 '먹고 가방에 싸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면서 자꾸만 따십니다.
어르신이 따주신 홍시를 맛나게 먹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까지 듣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멀리서 산 아래 마을을 볼 때면, 쓸쓸해 보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막상 골목골목 누비고 돌아 나오면 한 아름 웃음을 안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웃음 속에 담긴 건 모두 우리네 고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