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9시 뉴스데스크의 주말 일기예보를 담당하는 박신영(30) 기상 캐스터는 또박또박한 억양의 예보로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기상캐스터로 발탁된 지 5년. 그에겐 프로의 면모가 엿보인다.
박신영이 기상 캐스터가 되는 과정은 '좌절극복'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자신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좌절할 뻔한 적도, 열악한 환경에 좌절할 뻔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좌절극복'을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꿈인 전문 방송인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고 있다.
[# 1] 소심 소녀, 변신하다
MBC 기상캐스터로 맹활약하고 있는 박신영.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소심한 아이였다. 커다란 돋보기 안경과 까만 피부, 게다가 남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네는 성격을 가진,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전 정말 소심한 아이였죠(웃음). 지금의 제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실 거에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다니… 그땐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거였죠. 흔히 말하는 '범생'이였습니다. 집하고 학원, 학교밖에 몰랐죠. 친구들도 사귀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박신영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일어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장에 덜컥 선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담임 선생님이 성적순으로 후보를 냈기 때문이다.
그 후보군 안에 들어있던 박신영이 후보 연설을 할 때 작은 목소리로 "전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리더십도 없으니까 다른 분들 뽑아주세요"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솔직함을 겸손함으로 착각한 아이들이 무작정 그를 반장으로 뽑아버린 것이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도 못할 정도인데, 내가 반장이라니 끔찍하고 두려웠죠. 나중에 애들한테 물어보니 너무 착해 보여서 자기들 말을 잘 들을 것 같아 뽑았대요. 그도 그럴 것이 중2 때 저희 반에는 일명 문제아(날라리)들이 많았거든요."하지만 소심한 반장이 좌충우돌 반을 이끌기엔 문제가 많았다. 알고 보니 그 반은 선생님들이 수업을 거부할 정도의 문제아 반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꾸지람을 듣는 것은 반장이던 박신영의 몫이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반장의 무능력을 손가락질했고 덕분에 반성문을 수도 없이 써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이 밥 먹는 아이들도 떠나갔다. 외톨이가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반은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그동안 쌓였던 것이 있어서였는지 조용조용하던 박신영도 이날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교탁에 나가 큰 소리를 냈다. 출석부 모서리를 교탁에 치면서 '야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라고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저도 놀랐고 애들도 놀랐죠. 순간 반에서 정적이 일어났어요! 전 그때까지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때 득음을 했죠. 저 지금 목소리 엄청 크거든요? 사람들한테 그래요. 그때 득음했다고. 내 인생에 있어 첫 번째 반환점·과도기·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이죠." 중2 때의 득음(?) 사건 직후 박신영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 그는 소심 소녀에서 활달한 명랑 소녀로 변신을 시작했다.
[# 2] 어려워도, 슬퍼도 당당하게 '좌절 극복'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신영은 그 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대학교 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전공과목인 독일어에 영 적응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영어과는 성적이 안 됐고 불어는 배워봤으니까 독일어 한번 해보지 뭐 이런 생각으로 입학했죠. 그런데 그게 실수였어요. 학교 특성상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이 굉장히 많더군요. 수업도 1학년 때부터 회화가 있는데 잘하는 애들 기준으로 했어요. 전 너무 적응도 안 되고 힘들었어요."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등록금을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박신영은 부모님 몰래 휴학이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 학교를 휴학할 즈음, 박신영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홈쇼핑 방송의 쇼호스트였다. 그의 눈에 비친 쇼호스트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도 저렇게 열정적인 방송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제 꿈과 목표에 대한 길을 만들어갔죠. 휴학 후에는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 마련도 하고 백화점·편의점·커피숍, 핸드폰도 팔아보고 전단도 돌려보고 과외도 하고. 그러면서 틈틈이 기회가 되면 오디션도 보고 리포터도 하고 그랬어요. 제가 배울 수 있는 곳은 텔레비전뿐이었거든요. 그냥 무작정 따라 했어요. 저한테 꿈이 있고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도 힘들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박신영은 2년 동안 꿈을 위해 앞만 보고 전진한다. 당시 그는 한 달에 150~200만원의 돈을 꼬박꼬박 벌만큼 열심히 뛰었고 어느 일을 하건 의지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난 방송인이 될 사람이니까. 방송인 박신영, 이게 내 미래의 명함이니까. 함부로 행동하고 다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웃기죠?(웃음) 그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그런데 그런 휴학 생활이 1년쯤 계속될 즈음이었다. 박신영은 방송일을 하려면 대학 졸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주저하지 않고 휴학생 신분에서 다시 본연의 학생으로 돌아갔다. 24살 때 학교에 복학한 그는 그 후, 방송이란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방송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꿈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면서 복학해서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 뒤로 정말 꿈을 향해 열심히 했어요.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고 계절학기란 계절학기는 다 들어서 성적을 올렸죠. 결국 어디 공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3] 나석에서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
2004년의 봄, 박신영은 인터넷에서 MBC 기상 캐스터 공채가 뜬 걸 보게 된다. 하지만 처음엔 시험을 봐야 할지 고민을 했다. 당시 그는 쇼핑 호스트라는 꿈을 위해 리포터와 엠씨로 경험을 쌓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상 캐스터와 쇼핑 호스트는 방송 스타일의 차이가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민하던 그에게 당시 기상 캐스터이면서 연기와 CF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던 김혜은(연기자)은 좋은 본보기가 됐다. '기상 캐스터도 저렇게 자기 개성을 드러낼 수 있구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이 갖는 숨은 매력을 알게 된 박신영은 결국 용기 내어 기상 캐스터에 도전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방송 아카데미 수업을 한 번도 듣지 못했기에 본인도 자신이 기상 캐스터가 될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신영은 방송 아카데미 수업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경험. 그리고 꿈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일까? MBC 기상 캐스터 면접장에서 박신영은 떨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을 감히 다이아몬드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보석 중 최고인 다이아몬드도 처음에는 흙이 묻어 있는 나석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보석을 볼 줄 아는 전문가의 눈엔 그 가치가 보인다고 합니다. 전 지금 흙이 묻어 있는 나석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MBC라는 보석을 볼 줄 아는 전문가가 저를 조금만 다듬어 준다면 저는 분명 수백만불의 가치를 가지는 다이아몬드가 될 것입니다."그런 당당함은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런데 MBC와 계약하고 정식 출근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합격에 들떴던 그에겐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났다. 모 홈쇼핑에서도 정식 쇼호스트를 제의한 것이다.
더욱이 그 홈쇼핑은 박신영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꿈꾸던 회사였다. 그렇기에 목표로 삼던 회사와 MBC의 기상 캐스터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고민 끝에 박신영은 옛 꿈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인 '기상 캐스터'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방송인 박신영. 지금은 이게 내 인생 명함이야. 때문에 MBC 보도국이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나를 한번 시험해보자. 너 높고 넓은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기상캐스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2004년 7월 1일 정식으로 MBC 기상캐스터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 4] 다이아몬드는 진흙 속에서도 빛난다
2004년 7월. 첫 출근을 했지만 기상 캐스터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방송 이후, 석 달 후인 2004년 11월에는 주말 뉴스데스크 기상 특보를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긴급 상황도 발생했다.
박신영은 나름대로 정확하게 방송을 한다고 노력했지만 정작 방송이 나갈 시간엔 특보가 바뀌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정확한 방송은 이뤄지지 못했다. 너무 속상해 울던 박신영은 타 방송사 선배 캐스터의 일기예보를 보며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 특보가 내려진 지역을 타이틀로 박아서 정확하게 짚어서 말을 했다면, 그분은 뭉뚱그려서 방송을 했죠. 사실 그게 정보였죠. 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방송을 한다고 했지만 정작 방송이 나갈 시간엔 특보가 바뀌었으니 제가 생각한 정확한 방송은 아니었으니까요."그런 크고 작은 시련들. 하지만 박신영은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 실수의 경험을 발판 삼아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흙 속에서도 빛나는 다이아몬드, 그런 기상 캐스터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연구했고 기상 소식을 듣는 시청자들의 의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노력은 그에게 있어 좀 더 좋은 방송을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박신영이 시청자들에게 친근감을 갖는 방송을 전해주는 기상 캐스터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뜨거운 열정의 결과였다. 기상 캐스터란 꿈을 향해 쉼 없이 전진한 그는 이제 좀 더 큰 꿈을 꾼다. 그것은 바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양한 방송을 하는 꿈이다.
"전 방송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수많은 가지가 만들어지죠. 그 수 많은 가지엔 리포터가 있고 연기자가 있고 아나운서, 기상 캐스터, 쇼핑 호스트가 있어요. 즉 제 말은 다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색깔의 차이가 있는 거죠."2008년 11월에 만난 박신영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의 꿈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 꿈은 자신에게 다가와 현실이 된다고 말이다.
"제가 기상 캐스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늘 가능성의 문은 열려 있고 언제든지 준비된 사람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때를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을 다듬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제가 기상캐스터를 위해 따로 준비를 해온 것은 없었지만 방송에 대한 꿈을 위해 제 자신을 끊임없이 다듬고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비로소 잡을 수 있었던 거라는 거죠."그는 마지막으로 기상캐스터 지망생들에 대한 따뜻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작은 좌절에 실패하지 마세요. 작은 실패를 딛고 전진하다 보면 언젠가 꿈은 현실이 될 것이에요' 그의 충고는 짧았지만 가슴에 오래 남는 언어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