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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스의 호텔 지펙졸리
▲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 누쿠스의 호텔 지펙졸리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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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의 시작은 누쿠스의 외곽에 있는 버스터미널이다. 누쿠스의 작은 호텔 지펙 졸리의 여사장은 나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한국에서 온 도보여행자인데 잠잘 곳을 찾습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카라칼팍어로 써주었다. 비상시에는 이 종이를 사람들에게 보이면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누쿠스는 우즈베키스탄 내에 있는 카라칼팍 자치공화국의 수도다. 이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라칼팍 민족으로,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는 우즈벡이 아니라 카라칼팍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한 국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치공화국. 여기서도 어쩌면 먼훗날 분리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때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는 어떤 대응방식을 택할지가 궁금해진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이 공화국에서는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다.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는 우즈벡어를 사용할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주민들의 상당수가 카라칼팍어로 대화한다. 우즈베키스탄 내에는 여러 개의 언어가 혼용되고 있다. 한때 구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아직도 거리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당연히 우즈벡어를 배우고 익힌다.

사마르칸드 지역에 가면 타직 민족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또 타직어를 사용한다. 공식언어는 우즈벡어지만, 적어도 네개의 민족언어가 지역별로 뒤섞여 있는 셈이다. 이것도 구소련의 영향일 것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갑작스럽게 국경을 정하고 독립했다.

이때 만든 국경이 민족의 경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다양성이란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한 국가 안에서 이렇게 많은 언어가 사용된다는 것이 과연 좋은 점일까. 이런 점도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물론 이것도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누쿠스에서 도보여행을 시작하다

누쿠스의 박물관
▲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 누쿠스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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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스 버스터미널 앞의 주유소
▲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 누쿠스 버스터미널 앞의 주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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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나는 출발했다. 시간은 오전 7시 30분. 호텔에서 주는 아침식사를 챙겨 먹고 버스터미널 앞의 주유소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호텔 여사장의 말에 의하면 킵차크까지 40km, 킵차크에서 망기트까지 25km라고 한다. 오늘 부지런히 걸으면 저녁 때는 킵차크에 도착할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무사히 킵차크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하고 걷기 시작했다. 누쿠스를 벗어나자 나타나는 사막. 그 가운데로 포장도로가 뻥 뚫려있다. 달려오는 차량을 마주보면서 걷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다. 그래서 난 그 도로의 왼쪽을 차지하고 걸었다. 배낭에 우즈벡 전통빵 두개와 물 2.5리터를 추가로 넣었다.

한손으로는 그 배낭이 묶인 핸드카를 밀면서 걷는다. 아침의 공기는 선선하고 날씨는 맑지만 아직은 태양이 뜨겁지 않다. 핸드카는 포장도로를 미끄러지면서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배낭에 매달린 스테인레스 컵도 규칙적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얘기다. 도로의 상태도 내 발의 움직임도.

뜨거운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한다. 괜히 아침에 어물거리다가 해가 떠오르고 나면 그때부터는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며 걸을 수밖에 없다.

여름 한낮에 뙤약볕 속에서 걷다 보면 땡칠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부지런히 낮 12시까지 걸으면 20km 정도는 갈 수 있고, 그 다음에 좀 쉬면 된다. 해가 지는 것은 저녁 7시 경이니까 쉬고난 다음에 다시 걸으면 되지 않을까.

걷다 보니까 나타나는 경찰 검문소, 내가 걸어서 킵차크에 간다니까 이들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 여권을 검사하고 비자와 거주등록도 살펴본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자 우즈베키스탄에서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주몽>, <장보고>를 말하면서 웃는다.

검문소를 지나서 계속 걷는다. 경찰을 보면 묘하게 긴장되지만, 여기 경찰들은 참 친절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더욱 그렇다. 오래전에 우즈벡에 들어온 대우자동차를 포함해서 한국 제품에 대한 이들의 호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인기있는 한국드라마 <겨울연가>, <대장금>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쌓아올려진 한국에 대한 우즈벡인들의 호의를 믿고 도보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호의가 앞으로 계속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자에게 친절한 경찰들

키질쿰 사막
▲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 키질쿰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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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도 잠시, 어느새 태양은 뜨거워졌다. 도로 양 옆으로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내가 동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태양은 내 정면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 발과 다리는 아프지 않지만 몸이 나른해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쉴 곳이 없다. 쉬려면 그늘에 들어가 앉아야 하는데, 그늘도 없고 앉을 만한 곳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막뿐.

결국 나는 선채로 태양을 등지고 이미 따뜻해진 물을 들이켜고 빵을 먹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앉을 만한 곳이 나오지 않을까. 도보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힘들면 어떡하나. 지평선을 바라보며 계속 걷는다. 몇차례 언덕을 넘었지만 그때마다 똑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저 언덕을 넘으면 쉴만한 곳이 보이겠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저 멀리 도로 옆으로 뭔가가 보였다. 저게 과연 무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적인 구조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저곳에 그늘이 있다는 얘기다. 난 걸음을 빨리 옮겼다. 조금씩 지쳐가지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그런데도 저 건물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낮은 언덕 위에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언덕에 오르고나니까 다시 저 멀리 떨어져있다. 멀리 있는 것이 가깝게 느껴지는, 사막에서의 전형적인 착시현상이다. 나는 걸으면서 울화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도로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간판도 없다. 도로 양옆으로는 나무 한그루 없다. 족히 20km는 넘게 걸어왔는데 그 동안에 그늘이라고는 경찰검문소의 그늘이 전부였다. 도보여행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도로다. 하긴 이곳에 와서 도보여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테니,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도 이해가 된다.

걷다 보니까 그 구조물이 점점 가까워진다. 저건 우리나라 국도변에 있는 버스 정거장 비슷한 건물이다. 콘크리트로 만든 견고한 구조물. 내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저기까지 가서 쉬자, 시원한 그늘에 들어가 앉아서 물도 마시고 빵도 먹자. 그러면 다시 힘이 생겨날 것이다. 킵차크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쉬고나면 괜찮을 것이다.

드디어 도착한 버스정거장. 허리는 뻣뻣하게 굳었고 머리는 텅 비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헛구역질이 난다. 이게 바로 탈진 직전의 증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늦지않게 휴식장소에 도달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정거장 안에 들어가서 핸드카를 한쪽에 놓고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막의 열기와 비교하니까 이 그늘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물을 마시고 콘크리트 벽에 기대 앉아 있자니 점점 노곤해진다. 이대로 조금 자고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내 머리에서 경고하지만, 나의 몸은 계속 늘어지고 있다. 자꾸만 드러눕고 싶다. 정신없이 졸립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종일 걸어서 도착한 킵차크 마을

사막의 길, 쉴 곳은 없다
▲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 사막의 길, 쉴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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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자 오후 3시가 가까워져 있다. 30분 넘게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을 마시고 빵을 먹었다. 밖을 내다 보니 여전히 뜨거운 한낮의 사막. 걷긴 걸어야 할텐데 저 열기 속으로 다시 나가기가 싫다. 킵차크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누쿠스를 떠나자마자 사막일꺼라고는 짐작도 못했는데.

그래도 가자.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가야 한다. 지도에 의하면 누쿠스 동남쪽에는 아무다리야 강이 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도 그쪽이다. 내 눈에 강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한참을 걷다 보니 광활한 사막 저 멀리 푸른 목초지와 나무가 보인다. 사막 너머로 보이는 저곳은 킵차크 마을일까 아니면 신기루일까.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사막이 나무와 풀밭으로 변해가는 모습, 이거야말로 마법과도 같은 장관이다. 그 안으로 많은 건물이 보인다. 결국 킵차크 마을에 도착했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타난 집의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집주인인 듯한 할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내 상태는 그런 것을 신경쓸만한 여력이 없다. 집 건물 바깥쪽에 놓여있는 평상에 나는 무너지 듯 앉았다. 그리고 3초 후에 그 평상에 두팔을 쭉 펴고 누웠다. 할아버지는 내 앞으로 오더니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아마 내가 나사가 몇 개쯤 빠진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었다. 나는 일어나서 할아버지에게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여기서 하룻밤 재워줄 수 있냐고 손짓발짓으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러라고 하더니 나에게 따뜻한 차를 여러 잔 대접해 주었다. 저녁 식사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날 밤에는 비가 왔다. 사막의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그것도 8월 말에 비가 오다니,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첫날, 시원하게 맞이한 밤이다.

하루만에 익어버린 다리
▲ 사막의 열기 속에서 하루만에 익어버린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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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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