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랜만의 기차여행입니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고속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는 여행보다 더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기차를 탄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골 역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달콤했습니다.

 

이번 도보여행은 좀 복잡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일단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원도 태백시의 통리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영동선 기차를 타고 승부역으로 갑니다. 승부역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있습니다. 강원도를 넘어 경상북도까지 가는 것이지요.

 

역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역이라는 승부역에서 태백시의 구문소까지 22km를 걷습니다. 이 길, 포장된 도로이기는 하나 강을 따라 걷기에 무르익을 대로 익은 가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강과 하늘과 산을 벗 삼아 걷는 가을 여행입니다. 자, 함께 떠나보시렵니까? 이번 도보여행도 걷기 모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25일 밤, 서울을 떠난 버스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통리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부근의 국밥집에서 조금 이른 아침을 먹고 통리역에서 기차를 탄 것은 오전 7시 50분.

 

통리역은 강원도 태백시 통동에 있는 역입니다. 모든 무궁화 열차가 이곳에서 정차한다고 합니다. 194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된 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驛舍)는 새로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합니다. 시골 간이역을 상상하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통리역에서 기차를 타다

 

기차 도착 시간이 되어 역 안으로 들어가니 시멘트를 나르는 화물차가 도착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승객을 태우는 기차보다는 화물차가 더 많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기관차에 매달린 차량 수도 화물차가 더 많네요.

 

덜컹거리면서 기차는 달립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탄광지역을 지나고, 단풍으로 물든 산의 풍경도 지나고, 강도 지납니다.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늘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지요. 계절에 따라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르고, 나그네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지요.

 

8시 30분쯤 승부역에 닿았습니다. 이 역, 1956년 영암선이 개통되면서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달리한 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통역이었다가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다시 신호장으로 격하되었다지요. 그러다가 보통역으로 다시 승격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역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변덕 많은 사람들이 역의 등급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한 것이지요. 승부역이 보통 역으로 승격하게 된 것은 1999년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면서랍니다.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역으로 인식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거지요.

 

승부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필이 새겨졌다는 영암선개통비가 아니라 승부역에서 근무하던 역무원이 새겼다는 승부역 비입니다.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라는 승부역. 이 글귀에 홀려서 사람들이 승부역을 찾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이 어찌 세 평밖에 안될까요. 역사만 해도 세 평을 훌쩍 넘기고도 남을 터인데. 두메산골(오지)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승부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철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계절의 끝이 머물러 있는 꽃밭의 꽃은 시들어갑니다. 멀리 보이는 가을 산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부는 바람도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굳이 도보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승부역까지 기차여행을 하는 것도 이 가을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승부역까지 왔으면 그래도 영암선 개통비는 보고 가야겠지요? 물론 돌로 만든 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습니다. 비를 보러 올라가는 길에 호박 한 덩이가 넝쿨에 매달려 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을이 그곳에도 서려 있네요.

 

승부역을 빠져 나와 길 위에 섭니다. 이 강, 낙동강 줄기라고 합니다. 길은 강을 끼고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들, 능선은 완만해 보이나 골이 깊어 보입니다. 그 깊은 골에 고운 가을이 색색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가을 산은 가까이 보아도 좋지만 멀리서 보아도 좋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은 마음을 그리움으로 물들입니다. 그렇게 산을 보면서 걷는 길, 나쁜 기억을 남길 수 없겠지요.

 

길옆에는 배추밭이 넓게 펼쳐지고, 양배추가 익어가는 밭도 있습니다. 무청을 뜯긴 채 썩어가는 무들이 있는 밭도 있습니다. 겨울은 땅이 먼저 준비하나 봅니다. 어느 시골집 처마 밑에는 잘 익은 옥수수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동네 개들이 낯선 여행객들이 들이닥치자 컹컹 소리를 내면서 짖습니다. 이런, 낯선 여행객을 향해 사정없이 꼬리를 치는 개도 있습니다.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오래 집을 떠난 주인을 맞이하는 기세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반가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개도 가을에는 외로움을 타는가 보네요.

 

길을 걷는데 바람이 붑니다. 제법 강한 바람은 마른 나뭇잎을 길 위에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구르게 합니다. 바람을 따라 먼지와 모래가 덩달아 날아오릅니다. 가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듭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의 길목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에 하늘을 보니, 온통 푸른색인 하늘 가운데에 붓끝으로 살짝 찍은 것 같은 구름이 한 조각 걸려 있습니다.

 

이래서 길을 걸을 때는 길만 보지 말고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가을의 흔적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강 건너 편에 커다란 공장이 하나 나타납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지나가다 보니 규모가 엄청나게 큽니다. 무슨 공장이지? 영풍제련소 석포공장이라고 합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석포역이 나오네요. 

 

낙동강을 끼고 걷는 길은 아름다워

 

승부역에서 이곳까지는 13km 남짓 됩니다. 강을 따라 걷는데 길옆에 자그마한 현수막이 붙어 있습니다.

 

'열목어를 놓아주세요!'

 

이곳에 열목어가 산다더니 사람들이 잡아가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현수막을 걸 리가 없겠지요.

 

석포리를 지나 육송정(六松亭)에 도착합니다. 정자 그늘에 앉아 묵직해진 다리를 쉽니다. 그런데, 그늘 아래 앉으니 서늘하네요. 해서 따뜻한 햇볕을 찾아 자리를 옮겨 앉습니다. 여름에는 햇빛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사람 마음이란 계절에 따라 이리 달라지나 봅니다. 사람 마음, 함부로 믿을 게 못되는 건 아닌지...

 

조선시대에 육송정 부근에 금강송 소나무가 여섯 그루가 있었는데 경복궁 창건당시 이 나무들을 베어다가 기둥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지요.

 

이곳부터 구문소까지 이어지는 길은 제법 차가 많이 다니는 31번 국도입니다. 씽씽 달리는 차를 피해 갓길에 바싹 붙어 걷습니다. 마른 먼지가 바람을 따라 풀썩이며 날아오릅니다. 동점역을 지나고, 철도 건널목도 지나고 나니, 구문소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태백시입니다.

 

태백시에서 봉화군으로 넘어와 다시 태백시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날의 도보여행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주말, 가을이 깊어가기 전에, 나뭇잎이 전부 떨어지기 전에, 가을을 만끽하면서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태그:#도보여행, #통리역, #승부역, #육송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